< 93화. 이사 준비 >
대표님과 함께 한강변 아파트들을 돌아다녔다.
“제일 넓은 평수에 한강뷰 위주로 매물을 보여주세요.”
“아유, 물론 그래야죠!”
공인중개사님은 굉장히 들뜬 얼굴로 우리를 안내해주신다.
가장 먼저 확인한 집은 조금 낡긴 했지만 시원한 통창에 한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곳이다.
“구조는 그냥 평범에서 조금 떨어지는 아파트이긴 한데... 뷰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그런데 두 번째 집을 가는 순간 첫 번째 집을 잊어버렸다. 최고층에 인테리어까지 화이트 모던 스타일로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구조, 벽지, 조명, 심지어 놓고 갈 예정이라는 주방 가구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강뷰도!
집 구경에 푹 빠져 있던 내게 대표님이 속삭이듯 말씀하신다.
“여기 진짜 좋다. 킵해두자.”
세 번째, 네 번째 아파트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리모델링 다시 하려면 최소 1억 이상은 들어갈 텐데, 내가 보기에는 두 번째 집이 최고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 결정에 대표님이 공인중개사님께 말씀하신다.
“두 번째 집 계약하고 싶네요.”
가전과 가구는 역시 GL과 서성!
매장에 방문해 두 회사의 시그니쳐 품질 가전을 구매했다.
“얼마 안 하니까 내가 사줄게.”
“네?!”
아니... 이렇게 갑자기 감동을 선물해준다고?
내 표정을 보고 대표님이 기가 차다는 듯 한 마디 하신다.
“야. 평소에 좀 그런 표정으로 날 봐주면 안 되겠냐?”
“제가 평소에는 어떤데요?”
“날 무슨 동네 바보 형 취급하잖아!”
그런데 구매하면서 놀랐다.
가장 좋은 제품들이라 그런지, 하나하나 가격이 만만치 않더라!
그런데 대표님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저기... 너무 비싸지 않아요? 그냥 하나만 사주시고 나머지는 제가 할부로....”
“할부는 얼어 죽을, 됐어. 이게 사람 우습게보고 있어.”
님이 수천억대 자산가라는 건 알고 있는데, 그래도 그거 대부분 주식 아닌가요? 정말 이렇게 돈 막 써도 되는 거야?!
최종 가격은 나로서도 걱정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수준이다. 하지만 대표님은 아무렇지 않게 카드로 긁어 버렸다.
심지어 그 유명한 블랙 카드로!
“우와, 진짜 이런 게 있었구나!”
“너도 성인 되면 만들던가. 이런 거 하나 가지고 있으면 세계 어디에든 큰 돈 쓸 있을 때 좋지.”
“에이, 제가 그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왜 없어? 집을 살 수도 있고 스튜디오 마련하겠다고 여기저기 질러댈 수도 있고.”
“아하....”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른 아침.
가족이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 선포했다.
“서연이 너도 오늘 학교 일찍 끝나지?”
“응. 수요일이니까. 왜?”
대답하지 않고 이번에는 부모님을 향해 말했다.
“엄마도 아빠도 오늘은 일 하지 말고 오후에 저랑 어디 좀 같이 가.”
“왜?”
“어디 가려고?”
“아, 그럴 일 있어.”
지금 말해주면 재미없지!
아빠와 서연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러려니 넘어가시는데 엄마는 달랐다.
“어디 갈 건데?”
“그럴 일 있다니까?”
“말을 해줘야 주방 이모들에게도 말해서 문을 닫던가 하지.”
“에헤이. 안 그래도 하루 정도는 쉴 수 있다는 거 뻔히 알고 있는데....”
날 가만히 째려보는 엄마.
헛기침을 하고, 괜히 허세를 부려본다.
“오늘 우리 가족 역사에 굉장히 중요한 이벤트가 벌어질 거란 말이야. 오후 한 시까지 집에 있어. 꼭. 무슨 일이 있어도!”
4교시 수업을 마치자마자 날아갈 듯 집으로 달려왔다.
아빠, 엄마, 서연이.
가족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옷만 후다닥 갈아입고 말했다.
“자, 갑시다!”
이동한 곳은 바로 구두 계약을 완료한 청담동 한강변 아파트.
정문 앞에서 공인 중개사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위치 아시죠? 비밀 번호 알려드릴 테니 편히 구경하고 끝나면 연락 주세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치고 단지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부모님이 황급히 붙잡는다.
“미, 민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여기엔 왜 왔어?”
흡사 들어가면 안 될 곳이라도 온 듯한 얼굴.
난 그 모습을 보고 씩 웃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대충 짐작은 했을 거 아니야?”
“.......”
“.......”
서연이는 두 분과 뭔가 달랐다.
당돌한 계집애는 청담동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게 팔짱을 끼고 코알라 마냥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반짝 거리는 두 눈으로 내게 묻는다.
“우리 이사 가는 거야?”
“너 강남 아파트 자가로 사는 친구들 보고 부러워했었지?”
“응!”
“이제 그럴 필요 없어. 왜냐면 우리 집이 제일 멋지고 좋을 테니까.”
“꺅!”
좋아서 비명까지 지를 서연이.
기분 좋게 단지 안으로 입성, 그대로 구두 계약을 완료한 호수로 이동한다.
[ 삑삑삑삑! ]
[ 띠리릭! ]
도어 락을 해제한 뒤, 바로 확 열어젖히지 않고 가족을 보며 말했다.
“자, 모두들 기대하세요. 이제부터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휴대폰으로 미리 준비해 둔 <미술관 옆 동물원 – Synopsis>를 재생한다.
새 집 볼 때는 이 브금이 국룰이지!
“우와...!”
올 리모델링을 하여 현관 바닥과 외벽이 고급스러운 비얀코 타일로 교체되어 있다. 펜트리도 잘 갖춰져 있고, 결정적으로.
“아니, 무슨 아파트 현관이 이렇게 넓고 고급스러워?”
“아우, 들어가기 부담스럽다. 민아. 엄마 못 들어가겠어.”
부담스러워하는 두 분에 비해 서연이는 제일 먼저 발을 들이밀더니 거대한 신발장과 펜트리를 열어본다. 그리고 탄성을 터트린다.
“우와, 여기 진짜 넓다! 창고가 아니라 내 방으로 써도 될 정도야!”
과장이 아니라 그만큼 넓은 공간이 현관 왼편에 마련되어 있다.
거실을 향해 쭉 뻗어 있는 길목에 화장실이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
이번에는 서연이까지 할 말을 잃었다.
5성 호텔 최고급 객실을 연상케 하는 구조와 인테리어. 시설들. 고급 마감제와 섬세한 조명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공간이고, 욕조 재질은 무려 편백나무!
“여기서 목욕하면서 한강뷰를 즐길 수 있어요. 굉장하죠?”
내가 이 집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편백나무 욕조에 몸을 담근 채 감상할 수 있는 파노라마 한강 뷰!
한강이 전경이 그야말로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다!
“집이 넓어서 봐야할 곳이 많아요. 그러니 여기서 정신줄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손님!”
주방은 오픈 형으로, 상부장 하부장 등, 수납공간이 완벽히 짜여 있다. 역시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길고 커다란 대리석 아일랜드 식탁!
“오픈 형이라 거실과 그 너머 테라스, 한강까지 감상하면서 요리할 수 있어. 엄마, 좋지?”
“.......”
천성이 요리사인 우리 엄마는 최고급 주방 환경에 넋을 놓은 얼굴이다. 요리와 거리가 먼 아빠와 서연이는 주방 한가운데서 천천히... 빙글 빙글 돌며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양문형 냉장고와 식기 세척기, 정수기... 모든 주방 가전제품이 최고급으로 들어올 예정이야. 심지어 엄마가 사랑하는 GL 제품이지!”
엄마가 화들짝 놀라 반문한다.
“너 어디서 돈이...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가전제품, 가구 같은 것들은 대표님이 사주신 거야. 정말 고마우면 나중에 집들이 때 요리라도 좀 대접해 드리던가.”
“그거야 당연히... 응? 잠깐만, 가전제품 말고 가구도?”
거실에 최고급 가죽 소파와 공기 청정기, TV와 홈시어터 장비까지 들어올 예정이다. 부부 침실도 굉장히 잘 꾸며져 있었고 서연이 방에서도 작은 테라스가 있어 화단을 조성해주면 최고의 휴식 터이자 카페 같은 곳이 될 수도 있다.
한강? 당연히 보이지!
가이드를 하다 보니 나도 점점 이성을 잃어 간다. 가족이 놀라워하는 모습에 흥이 지나치게 오른 탓이다. 하지만 이전 삶에서부터 내가 바랐던 상황이었다.
내 첫 번째 임무를 완벽하게 완료한 뒤, 난 당당히 말했다.
“이사 예정일도 받아 놓긴 했는데 제가 미성년자라서 두 분이 해줘야 할 일이 많아요.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알아서 해결해놨으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대표님 통장이 해결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금방 값을 테니 내가 해결한 거나 다름없지!
집 구경을 마친 뒤 근처에 있는 국산차 매장으로 이동했다.
아빠가 묻는다.
“여긴 또 왜 오는 거야?”
“자동차 매장에 왜 왔었겠어? 차 사려고 왔지.”
“누구 차?”
“아빠 차!”
“.......!”
아빠는 고급 세단보다는 넓고 실용적은 SUV를 선호한다. 가끔 가족을 태워 좋은 관광지로 놀러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 차박에 흥미를 갖게 된 것 자체가 아빠의 영향이 컸다.
매장에 도착하자 호남형의 미남 딜러가 반갑게 맞아준다.
“어서 오세요! 김민 군! 오늘은 부모님과 함께 오셨군요.”
“어제 구매했던 그 차 모델 보여드리러 왔어요.”
“네. 이쪽으로 오세요.”
매장 안에 전시된 새하얀 SUV가 다시 나를 반겨준다.
“편하게 살펴보시고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 주세요.”
딜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피해줬다.
가족 모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상태.
심지어 아빠는 나를 닦달한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어제 구매했던 차량이라니?”
“대표님하고 방문해서 구매 계약 완료했으니까.”
“그걸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결정해? 그리고 너 어쩌려고 대표님께 그렇게 계속 폐를 끼치는 거야?”
“폐라니, 정당하게 도움을 받은 거지.”
난 투덜거렸다.
“솔직히 내가 미성년자만 아니었어도 혼자 다 알아서 할 수 있었는데... 아무튼 계약한 게 이 모델이니까 쭉 살펴봐.”
“돈 그렇게 함부로 쓰면....”
“아빠. 그리고 엄마.”
이 기회에 확실히 말해둬야겠다.
“두 분 아들, 전 세계 음악 시장 휩쓸고 있는 히트 메이커예요. 이 정도 돈 쓴 거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
“저 두 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능력 있는 놈이에요. 아들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니 부담감 같은 거 갖지 말아요.”
차를 혼자 여기저기 살펴보는 아빠의 표정이 점점 밝아진다.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
우리는 매장 소파에 앉아 커피와 음료를 마시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 서연이를 흘끔 보고 말했다.
“너 양궁 계속 하고 싶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양궁 힘들어했잖아. 부상도 잦고.. 훈련도 힘들고, 싫으면 안 해도 돼.”
“.......?”
상황 파악을 못한 채 어리둥절해하는 어린 서연이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이제는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라고. 노래든, 노래든 미술이든, 배우고 싶은 거 없어?”
부모님도 부모님이지만, 이전 삶에서 서연이에게 특히 신세를 졌다. 나 때문에 피해도 많이 입기도 했고.
아마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것이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남매는 원수지간이라지만, 난 서연이를 굉장히 각별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고 싶다는 거, 사고 싶다는 거 있으면 모두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엄마도 서연이를 바라본다.
재능이 뛰어나고, 서연이 본인의 의지가 있어 양궁을 시켜주긴 했지만 내심으로는 탐탁지 않아 했었다.
모든 엘리트 스포츠가 그랬지만, 양궁은 특히 힘든 종목이다. 국제 대회보다 국내 대회가 몇 배는 힘들고 경쟁도 치열하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 협회 자체가 굉장히 깨끗하고 공정하게 운영되기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인재도 많고 그만큼 치고 나가기도 힘든 곳이다.
진로를 바꿀 의향이 있다면 초등학생인 지금 바꾸는 게 훨씬 유리하지.
“어떻게 할래? 계속 할래, 아니면 다른 거 배워볼래?”
내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던 서연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