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가자, 미국으로! >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쇼케이스 시작 10분전.
대기실의 멤버들을 바라본다.
의상, 헤어, 메이크업.
이미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치고 마인드 컨트롤, 심호흡을 통해 긴장감을 다스리고 있었다.
묵직한 분위기 속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조언 드릴게요.”
한순간에 모이는 시선들.
“춤, 노래는 더 할 나위 없이 완벽해요.”
“미모는?”
“네?”
“미모에 대해서는 왜 언급 안 해? 그건 완벽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우리 별로야?”
“어....”
“야! 너 왜 시선 피해? 빨리 똑바로 쳐다보고 대답해!”
발끈해서 소리 지르는 주아.
순간 긴장감이 부셔지며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나 역시 슥 웃으며 말했다.
“미모도 어마어마하고....”
“그렇게 말하니까 비꼬는 것 같잖아!”
“... 여기까지만 해도 굉장한 건데 연기력까지 더해졌죠. 이건 실패할 수가 없어요. 결정적으로 제가 바로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참여했죠.”
난 확신을 담아 말했다.
“무조건 성공합니다. 아니, 이미 성공했어요. 밥상 다 차려놨으니까 나가서 떠먹기만 하면 돼요. 그렇다고 추잡하게 평소 먹는 것처럼 허겁지겁, 막 흘리면서 드시지는 마시고!”
“저게 진짜...!”
“너 응원하러 온 거야, 아니면 우리 디스하러 온 거야?”
“누나들한테 혼좀 나 볼래?”
[ 짝짝! ]
힘껏 손뼉을 두 번치고 양팔을 좌우로 벌린다.
“모여서 어깨동무 하시고....”
“우리가 무슨 축구팀이야?”
“굳이 이런 걸....”
투덜거리면서도 내 말을 따라준다.
“하나 둘 셋 선창하면 다 같이 파이팅 외치는 겁니다. 자....”
내가 먼저 힘차게 외친다.
“하나! 둘! 셋!”
[ 파이팅! ]
“자,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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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 플라워 팬 커뮤티니는 진작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 5분 남았다! ]
┗컴백 쇼케이스 한 두 번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리냐...ㄷㄷㄷ
┗이번 앨범 컨셉이 기존 했던 것들과 굉장히 달라서 그런 듯.
┗ 곡은 확실히 대박인데... 뮤비랑 화보 컨셉도 다 마음에 드는데... 무대만 완벽하면 된다. 근데 귀염귀염하고 순둥순둥한 우리 애들이 잘 소화해 낼지가....
┗ 나도 그게 가장 걱정임. 우리 애들 원래 이미지랑 굉장히 상반되는 컨셉이라 과연 잘 해낼지....
마침내 쇼케이스 방송이 시작됐다.
기대감을 한껏 북돋아주는 신나는 BGM 인트로 화면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멤버 소개 페이지까지 끝나고 화면이 쇼케이스 현장으로 전환된다.
어둡고 우울함이 잔뜩 깔려 있는 분위기 속에서
[ 퉁! ]
[ 빠밤 ― ! ]
트렌디한 808 힙합 리듬과, 강렬한 파괴력의 브라스 셋이 울려 퍼진다.
풀 샷으로 무대 전체를 잡고 있던 화면이 급격히 클로즈업되며 춤추는 멤버들의 표정을 상세히 담아낸다.
그 순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 와... 표정...! ]
[ 느낌 왔다. 느낌 왔어! ]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모습들.
곡 분위기가 점점 격렬해지며, 멤버들의 표정 연출 역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향해 치닫는다.
그리고.
[ 쿠웅! ]
모든 것이 폭발하는 후렴구.
분노와 배신감을 표출하며, 카메라와 객석을 잡아먹을 듯 매섭게 노려본다.
안무 역시 거칠어진다.
눈빛과 얼굴 표정에서부터 표출되는 뜨거운 분노가, 엄청난 몰입감과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3분 남짓.
엔 플라워는 온 몸으로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며 청중의 마음을 거칠게 휘저어댔다.
그렇게 무대가 끝나고.
“와아아아!”
현장에서, 유난히도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온다.
무대가 펼쳐지는 동안 잠잠하던 커뮤니티도 다시 뜨겁게 불타오른다.
[ 와아... 진짜 숨도 못 쉬고 봤음;;; ]
[ 뭐야?;;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가 있지? 지금까지 했던 것들과 분위기부터가 너무나도 다른데? ]
[ 다른 것보다, 곡의 흐름에 따라 감정의 표출 방식 역시 풍부하고 다양해서 좋았어. ]
[ 화면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눈물을 펑펑 쏟아낼 듯 글썽거리는데... 어우, 그 모습 보니 내가 괜히 미안해지더라;; ]
[ 누가 우리 애들한테 상처 준 거냐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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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좋고.”
프로듀서로서 현장뿐만 아니라 인터넷 반응을 실시간 체크하는 것은 기본!
다행스럽게도 내가 포인트를 잡은 부분을 관객들도 모두 알아주고 있었다.
엔 플라워 멤버들은 여느 때보다 열광적인 현장 분위기에 고무된 듯 보인다. 본인들도 느낀 것이다. 지금 처음으로 공개한 무대를, 관객들이 굉장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이어 토크가 시작된다.
본인들의 진행으로.
리더 주아가 마이크를 잡았다.
“미니 앨범 발매 일주일이 지났네요. 그 동안 쇼케이스를 준비하면서 인터넷 커뮤니티 반응을 확인해 보긴 했는데, 그래도 여러분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요. 우리 이번 앨범 어땠어요?”
[ 좋아요! ]
[ 최고야! ]
[ 대박이다!! ]
온갖 긍정적 외침이 터져 나온다.
당연하다.
지금 이 쇼케이스에 모인 청중 전원이 엔 플라워의 열혈 팬이었으니.
이어 멤버들은 스칼렛 러브 제작기를 들려주며 굉장히 자연스럽게 날 언급했다.
“사실 첫 가이드 버전도 굉장히 좋았는데, 더 욕심이 나서 우리가 막 이것저것 요구하고 관여했어요.”
그 과정을 참 재미있게 풀어낸다.
여기서 포인트는 자신들이 앨범 프로듀싱에 적극 관여했다는 것.
멤버들은 각자 어떤 부분을 중점으로 참여했는지, 그 과정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신나서 이야기한다. 듣는 팬들 또한 좋아하고, 기뻐하며 성장을 기특해한다.
새삼 부러운 감정이 들었다.
난 아직까지 내 팬들과 소통, 교감을 저 정도로 깊게 해보지는 못했으니까.
갑자기 팬들이 보고 싶다.
지금 어디에서,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날 얼마나 생각해주고 있을까?
유학 소식을 알리면... 굉장히 당황하겠지?
새로운 결심을 했다.
‘유학 가기 전에 소극장을 빌려 소소하게 팬 미팅이나 미니 콘서트를 한 번 해봐야겠다.’
그게 어렵다면 버스킹이라도 해야지.
나는 세 번째 트랙. Everyday 공연이 끝난 직후 잠깐 무대 위에 올랐다.
내가 주목 받을 자리가 아니었기에, 어떻게 곡을 주게 됐고, 미니 앨범 전체를 프로듀싱하게 됐으며 어떤 부분에 중점을 뒀는지 정도만 간략하게 설명했다.
사실 공황증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던 지라 다른 걸 할 정신도 없다.
으아, 여기 사람이 너무 많아!
빨리 끝내고 내려가고 싶어!
“엔 플라워 선배님들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앞으로 많이 사랑해주세요!”
그렇게 정리하고 빨리 퇴장하려는데....
“잠깐만요.”
“아니, 왜 이렇게 급해요?”
“누가 쫓아와요?”
다들 잽싸게 나를 붙잡는다.
리더, 주아가 불길한 미소를 짓더니 돌발 발언을 한다.
“여러분, 이대로 보내는 거 너무 아쉽지 않나요? 혹시 민 프로듀서와 우리 엔 플라워의 합동 무대가 궁금하지 않나요?”
뭐?
합동 무대?
누구랑?
설마, 나?!
당황한 나와 달리 관객들은 크게 호응한다.
“저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우리하고 같이 맨해튼 드리밍 같이 부르자고요."
“그걸 같이하자고요?”
“네! 연습 많이 했으니 우리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얘들아! 잘할 자신 있지?”
다들 힘차게 대답한다. 호응은 더 커진다.
나는 망연자실해서 중얼거렸다.
“제가 자신이 없는데요.”
터지는 웃음소리.
“음악 주세요!”
[ 와아아! ]
맨해튼 드리밍 전주가 울려 퍼진다.
힙합 특유의 제스처를 취하며 온 몸으로 그루브를 타는 엔 플라워 멤버들.
그런데 내 의사와 상관없이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내 입에서 터져 나오는 랩에 관객들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열광적으로 따라한다.
역시 떼창의 민족... 이 아니라 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미국에서 아이작과 하도 많은 공연을 다닌 덕에 음악만 나오면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그나저나... 다들 노래와 랩을 상당히 잘한다.
나름 열심히 준비한 티가 난다. 제스처도 좋고, 댄스 그룹이라 그루브감도 살아 있고.
그런데....
‘어째 본인들 음악보다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설마.
내 착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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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케이스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미리 예약해 놓은 한우전문점에서 뒤풀이를 했다.
끝날 무렵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다.
“이거 받아!”
“지난번에 지갑 하나로 퉁친 게 조금 미안해서 이번에는 각자 신경 써서 준비했어!”
“내 것도 받아!”
내 얼떨떨한 표정에 리더, 주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네 덕을 굉장히 많이 봤잖아. 초동 성적도 좋았고 쇼케이스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우리 나름의 보답이야.”
“아....”
감동이다.
이렇게 챙겨 줄줄은 몰랐는데....
이런 걸 바라고 열과 성을 다해 서포터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진심이 담긴 선물은 기분이 좋은 법이다.
내용물과 관계없이.
당장 풀어보고 싶었지만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집에 돌아와서 후다닥 씻고 방에서 선물을 개봉했다.
“와....”
처음부터 루이비통 남자 백팩이 나온다.
이어 등장한 벨트, 선글라스, 스니커즈, 향수, 시계... 하나 같이 고가의 물건들이다.
모두 착장을 하거나 손에 들고 인증 샷을 촬영한 뒤, 엔 플라워 멤버 개개인에게 전송했다.
[ 고마워요. ]
[ 이런 선물 처음인데... 정말 잘 쓸게요! ]
단톡방에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
[ 내일 학교에 착용하고 가서 인증샷 찍어 보내! ]
[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성의를 무시하는 것으로 알겠다! ]
다음 날. 식사를 마치고 진지하게 고민 했다.
이것들, 정말 착용하고 등교해야 하는 건가?
선생님하고 애들이 날 미친놈으로 볼 것 같은데... 어쩌지?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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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정신이 흘렀다.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엄마는 식당 문을 닫고 백설연 선생님 요리 연구실로 출근을 했다. 거기서 신 메뉴 개발을 함께 하고 업장 운영 노하우 등을 배우는 것이다.
아빠는 하던 모든 일을 그만뒀다. 당분간은 휴식을 취하며 어떤 일을 해야 즐겁고 보람차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해 보겠다고 하셨다.
나는 지희 어머니와 함께 업장 매물을 보러 돌아다녔다.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논현.
다른 매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강남역 2번 출구에서 굉장히 가깝다는 장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임대료가 시세보다 압도적으로 저렴하다.
건물주가 바로 지희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 분이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다음 날 엄마가 와서 보고 경악을 하더라.
심지어 인테리어 업체도 지인 찬스로 좋은 서비스를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계약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종합적으로 드는 비용이 적지 않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여력이 있다.
이것으로 집에서 내가 할 일은 대강 끝난 것 같다.
엔 플라워는 새 미니 앨범으로 승승장구하고 있고, 아이작 이스트의 맨해튼 드리밍은 아직도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레이지의 Don’t Touch Me 싱글 발매가 미뤄졌다. 팀킬은 피해야 한다나?
회사 입장에서야 당연한 판단이겠지만, 레이지 입장에서는 꽤나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수시로 내게 문자를 보내거나 영상 통화를 걸어서 엄청 투덜대더라.
겸사겸사,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한 것들을 올리며 뮤튜브 채널을 꾸준히 운영했다.
어느 새 구독자 수가 20만 명을 넘었다.
가장 인기 있는 동영상은 할렘 여행기 3부작.
이 시리즈는 각각 1000만 뷰를 돌파했고 지금도 꾸준히 상승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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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참 빠르다.
벌써 미국 유학일이 코앞에 다가왔으니.
이 시기, 이미 내 유학은 공식 발표됐다.
조용히 떠나고 싶었지만 팬들과 주변 지인들이 섭섭해 할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었다.
떠나기 이틀 전.
대학로 소극장에서 팬 미팅 겸 무료 공연을 열었다.
티켓은 선착순 배포였고, 내 데뷔곡 두 곡과 애창 곡들을 포함한 열다섯 곡을 라이브로 공연했다.
“미국으로 간다고 가수 활동 접는 게 아니에요. 힘이 닿는 대로 싱글만이라도 발매할 테니 기대해주세요. 배우, 프로듀서 활동도 응원 부탁드려요.”
마지막 날은 친구, 가족들과 조촐하게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는 문 라이트 멤버들과 함께 식사를 했는데, 모두에게 덕담 한 마디씩을 해준 뒤 지희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 내가 시킨 숙제 꾸준히 쌓아두고 있었지? 독후감, 시, 수필, 작사 이런 것들."
"응!"
"그 쌓인 습작들, 지금부터 블로그든 SNS든, 네 개인 공간 만든 뒤 그곳에 업로드 해. 춤, 노래 연습 영상도 꾸준히 올리고."
"민망한데...."
"시키는 대로 해."
그때 주세아가 물어온다.
"나도 할까?"
"아니, 넌 하지 마."
"왜?"
“지희는 이유가 있어서 시킨 거야. 넌 그럴 필요가 없어. 오히려 개인 정보를 최대한 닫아 걸고 신비주의 이미지를 지금부터 가져가는 게 좋지.”
“신비주의? 내가?”
어리둥절해하는 세아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넌 그쪽이 어울려. 평상시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미모와 분위기로 카리스마를 뿜어내다가, 이따금씩 반전 매력을 보여주는 것.”
난 빙긋 웃으며 말했다.
“텐 믹스 프로젝트 잘해. 미국에서 응원할게.”
“.......”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머뭇거리던 세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른 친구들은 안쓰러운 얼굴로 지켜본다.
...음?
저녁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특별한 대화가 있었던 아니지만,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다음 날.
마침내 미국에 유학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