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민피트의 화살 (1) >
약속 장소로 이동하면서 레이지에게 문자로 물었다.
[ 헤어졌어? ]
[ 아직은 아니야. ]
[ 그게 무슨 말이야? ]
[ 서로 시간을 갖고 생각 좀 해보기로 했어. ]
... 그거 사실상 헤어지자는 소리 아닌가?
[ 넌 어떻게 하고 싶어? ]
[ 이미 말했잖아. 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아. ]
[ 하지만 지금 더 올라갈 수 있는 이 기회도 놓치지 않겠다는 거지? ]
[ 바로 그거야. ]
한 마디로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다는 거다.
뭐, 안 될 건 없지.
난 그렇게 생각하지만 레이나는 생각이 조금 다른 모양이다.
실제로 연예인 커플이 헤어지는 많은 이유가 저거다.
서로 바빠서.
더욱이 레이나는 이미 같은 문제로 이별을 경험한 적이 몇 번 있는 장본인이다.
레이지가 만약 스쳐 지나간 남자들 중 한 명과 같았다면 바로 이별을 선택했겠지.
하지만 생각해 볼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는 것은...?
‘그녀도 레이지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뜻이지.’
깔끔한 이별이냐 관계 지속이냐.
갑자기 날 부른 것은 이 혼란스러운 선택에 대해 약간이라도 도움을 받고 싶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친구 좋다는 게 뭐야? 팍팍 밀어주자!’
호기롭게 약속 장소로 입성했다.
허드슨 리버 고층 타워 몰, 101층 레스토랑이었다.
왜, 레이나가 투자했다는 바로 거기.
“왔어?”
“어이구, 아침부터 술 좀 드셨어요?”
난 함께 있던 댄서 친구들에게 눈짓을 줬다. 이렇게 되도록 뭐하고 있었냐는 것이다. 친구들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래놓고 또 술을 마시고 있기에 한 마디 하려다가....“술맛이 너무 쓰다. 참 이상도 해라. 내가 즐겨 마시던 술인데....”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작하고 있는 걸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멀찍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종업원을 불러 안주거리를 주문한 뒤 맞은편에 앉고 말했다.
“지금 레이나 진짜 바보짓을 하고 있는 거 알아요?”
“내가...?”
“네. 레이나요. 생각해 볼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면서요. 왜 그랬어?”
“그거야....”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대답한다.
“그 사람이 워낙 바빠지면서 만날 시간도 줄어 들고, 내가 메시지나 통화를 걸어도 소흘해지는 것 같고....”
“누가 보면 본인은 활동 때문에 바쁜 적 없었던 사람인 줄 알겠네. 설마 나중에 레이지로부터 배신당할까봐 헤어지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생각할 시간 갖자, 이렇게 말한 거예요? 지금 그것 때문에 혼란스럽고 속상해서 이러는 거고?”
“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내가 나이가 몇 갠데....
“레이지는요. 정말 레이나 밖에 모르는 바보에요.”
“아니야. 나보다는 일과 성공을 더 쫓는 사람이야.”
“그게 아니라 처음으로 본인이 바래왔던 수준의 성공이 닥쳐오니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죠. 그리고 그 녀석이 이렇게 성공에 더 집착하게 된 이유가 뭔데요.”
“... 뭔데?”
“레이나 때문이잖아요.”
“나?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또 다시 울상을 짓는다.
... 술 취해서 그런가? 자꾸 평소와 다르게 귀여운 행동을 많이 하네.
아무튼.
“문제가 뭐냐면, 빌보드의 여왕이고 만인의 연인이자 슈퍼스타인 레이나에 비교하면 레이지는 사실상 일반인과 다름없는 처지였다는 거예요.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는 아니라도 어디 가서 레이나와 함께 다니기에 부족함 없을 정도의 위명은 갖추고 싶었다는 거죠.”
사실, 지금 누가 무슨 짓을 해도 레이나와 동등한 수준의 유명세를 갖출 수는 없다.
그녀는 빌보드 1위곡만 따지면 마이클 잭슨이나 비틀스보다도 많다. 그 어느 누가 이런 미친 기록에 근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레이나를 사랑하게 될수록, 레이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더 강해졌을 거예요. 사실 이런 건 레이지가 아직 어리고 진지한 연애 경험이 없다 보니 갖게 된 착각인데... 그럴 때 레이나가 바로 잡아줬어야 하거든요. 현명한 판단과 행동으로.”
“... 어떤 게 현명한 건데?”
“내조의 여왕이 되었어야죠!”
“내, 내조?”
“레이나에게는 아직 레이지가 경험해보지 못한 풍부한 활동 경험이 있어요. 매니저 노릇까지 할 필요는 없고, 그냥 같이 붙어 다니면서 곁에서 챙겨주고, 조언해주고, 응원해주고, 시간 나면 꽁냥 꽁냥 시간도 보내고... 그러다가 나중에 기회 되면 커플 음반 내서 같이 활동도 좀 해보고.”
마지막 말에 레이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커플 음반?!”
“네.”
“대중이 그런 걸 좋아해줄까?”
“좋아하죠. 두 사람은 무슨 아이돌 그룹 같은 게 아니라 음악 실력으로 인정받아서 성공한 케이스잖아요. 사랑하는 게 죄도 아니고, 지탄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안티 제외하면.”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미국은 물론 한국에도 커플 앨범을 내고 같이 활동하며 인기를 끄는 이들이 등장한다. 대중은 그런 이들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라틴 댄스 팝 느낌으로 둘이 같이 무대에서 섹시하게 노래 부르고, 랩 하면서 공연한다고 생각해봐요. 그림 좋다! 악상도 떠오르네! 이런 거요. 그대는 나의~ 세뇨리타~.”
문득 떠오른 노랫말과 가사를 흥얼거리며 가볍게 춤을 춰본다.
“비트는 라틴 팝 스타일로, 너무 빠르지는 않게. 쿵~치기 짝! 쿵! 치기 짝! 이렇게....”
“오오!”
“이거 좋다!”
댄서들은 내가 비트 박스로 내뱉는 리듬과 멜로디가 듣기 좋았던지, 가벼운 몸짓으로 호응한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레이나의 눈에 빛이 돌아온다.
“재미있겠다. 나 그거 해보고 싶어.”
“제가 더 좋은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뭐, 뭔데?”
난 슥 웃으며 말했다.
“빨리 결혼해버려요. 그러면 정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돼요.”
“겨, 결혼...?!”
“레이지처럼 잘 생기고 매력적인 것들은 방목해두면 여기저기서 노리고 가만 안 놔둬요. 머리 빈 계집애들이 레이지에게 치근덕대는 거 보고 싶어요?”
“아니! 보기 싫어!”
“그러면서 무슨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자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빨리 결혼해서 침 발라 놔야지! 가정이 생기고,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고 생각해봐요. 두 사람이 더 이상 방황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나의 가정이 생긴 거니까요!”
“.......”
“물론 시작은 어렵겠지만 그거야 누구나 겪는 일이죠. 자, 어때요?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해야 할 일이 미친 듯이 많아진 것 같은 기분이죠? 지금까지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제 말을 듣고 나니 그런 기분이 싹 사라지죠?”
“... 맞아. 머리가 개운해졌어.”
난 앞에 있는 술잔을 빼앗아 댄서들에게 넘겨줬다. 그녀는 내 행동에 담긴 뜻을 기가 막히게 눈치 채고 대신 술잔을 비워 버렸다.
“레이지를 내조해줘요. 스타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서포터 해줘요. 그래야 해요. 왜냐면 두 사람은 연인이고, 더 나아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룰 사람들이니까요.”
난 빙긋 웃었다.
“가족이 서로의 일을 온 힘을 다해 돕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대화를 마치고 나오며 레이지에게 짧게 말했다.
“레이나에게 청혼해.”
[ 으, 으응? ]
“거창할 건 필요 없어. 청혼 반지 준비하고, 근사한 레스토랑 하나 빌려서 식사하다가 깜짝 이벤트로 피아노 연주해주고, 그 자리에서 청혼하면 되는 거야.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반지를 내밀고 이렇게 말하는 거지. 나하고 결혼해주겠어요?”
[ 가, 갑자기...? ]
“시끄러워. 내 말 들어!”
[ ........ ]
“나 지금부터 커플 앨범 준비한다. 이번 주 안으로 청혼 끝내고 내게 말해. 내가 곡은 물론 안무, 컨셉까지 모두 완벽하게 짜서 결혼 축하 선물로 건네 줄 테니까.”
[ 어, 너,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리고 이번 주는 중요한 일정들이.... ]
“레이나하고 결혼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떠나보낼 거야?”
[ .......! ]
“내가 지금 쓸데없이 급발진 하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지금이 너희 두 사람 관계에 굉장히 중요한 상황이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날 믿고, 최대한 빨리 내가 말한 대로 이벤트 준비해서 청혼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알아서 진행할 테니까.”
[ ....... ]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지금이 기회야. 너 이거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
그렇게 통화를 마친 뒤 하늘을 바라본다.
“아, 나도 결혼하고 싶다!”
그날 밤. 레이지가 연락을 해왔다.
이번 주 일정을 통으로 미뤄버렸으니 자기 좀 도와달라고.
냅다 승낙하고 빠르게 일을 진행했다.
맨해튼 유명한 보석상에서 인기 있는 청혼 반지를 예약하고, 오늘 그녀와 식사했던 타워몰 101층 레스토랑 측에 몰래 연락해 이틀 후 저녁 시간대에 전세를 내겠다고 예약했다. 이외에도 테일러 샵과 바버샵 등을 물색해 필요한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다음 날 오전부터 레이지와 만나 예약한 장소들을 돌아다녔다. 테일러 샵에서 최대한 빨리 구할 수 있는 정장을 구매했고, 바버 샵에서 스타일을 깔끔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우리 집으로 데려와 간단히 밥을 먹이고 피아노 앞에 앉아 말했다.
“이 노래 알지?”
건반을 연주한다.
잔잔한 구성으로 연주되는 달콤한 화음의 연주곡이었다.
“이, 이게 뭐지?”
“........”
어이가 없어서 연주를 멈추고 타박했다.
“이거 레이나가 2집 앨범에 수록된 잖아!”
“.......?”
그래도 모르는 눈치.
답답해서 음악을 찾아 들려준 뒤 말했다.
“좋아하는 여자 음악도 모르고 있으면 어떻게 해? 모든 트랙을 다외우지는 못해도 인기 있었던 곡들은 알고 있어야지!”
“... 넌 설마 레이나가 지금까지 발표한 곡을 다 외우고 있어?”
“원래 나도 몰랐는데, 프로듀서 하기로 계약 하고부터 미친 듯이 공부하고 외웠지. 성향을 파악해야 하니까.”
질린 얼굴로 날 바라보는 레이지를 다시 한 번 타박했다.
“야, 이 정도 정성은 있어야지! 안 되겠다. 너 이번 달까지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레이나 음악 모두 외워. 그러고 나한테 검사 받아. 알았어?”
“으응....”
“기본이 안 되어 있네. 너 앞으로 나한테 배울 거 많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Marry you를 연주한다.
“이게 무슨 노래냐면, 레이나가 결혼을 앞둔 친한 친구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만들어서 발표한 노래야. 그, 왜 있잖아. 항상 같이 다니는 댄스 친구들 중 한 명. 비키!”
“아, 그래. 기억 나!”
“이게 그 친구 부부에게 선물한 노래야. 그리고 레이나가 이 곡과 관련해서 했던 인터뷰 내용이 있어. 언젠가는 본인이 이 노래로 연인에게 청혼을 받고 싶다는 거.”
“정말?”
자식이 증거를 보여줘야 믿는다.
“넌 정말 굉장하다! 이런 것까지 조사를 끝내놨다니...!”
“아무튼,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청혼 이벤트가 시작되는 거야. 세팅은 내가 미리 다 해놓을 테니까 나한테 와서 마이크 받고 앞에서 노래를 불러줘. 1절 끝나면 잔잔하게 BGM 모드로 연주를 바꿀 테니 그때 청혼해. 받아주면 2절을 이어서 부르는 거야. 오케이?”
“안 받아주면?”“그럴 수가 없어. 이건 이미 짜고 치는 포커 같은 거라서. 내가 밑작업 완벽하게 끝내놨다고 했잖아!”
“마, 맞아. 그랬어!
“믿고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러면 넌 행복해질 수 있어. 오케이?”
“오케이!”
내 완벽한 계획에 레이지도 잔뜩 흥분한 기색이다.
“바로 레이나에게 연락해. 내일 저녁 몇 시까지 어디서 식사 좀 하자고.”
“그 식사 장소는...?”
“레이나 레스토랑. 아까 내일 저녁 시간대에 전세 낸 거 확인시켜 줬잖아.”
“오케이.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