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민피트의 화살 (2) >
‘떨려.’
드레스를 차려입은 레이나는 몇 번이고 전면 거울 앞에서 본인의 모습을 확인했다.
오랜 친구이자 전속 댄서인 비키가 옆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최고야. 내가 지금까지 본 레이나 중 가장 예쁘고 우아한 모습이야.”
“정말?”
“물론이지. 내 말 못 믿어? 이 모습 보면 레이지도 정신 차리지 못할 걸?”
“... 그럴까?”
마침내 연락이 왔다.
[ 집 앞에 도착했어. 지금 나오면 돼! ]
‘드디어...!’
오늘이 심상치 않은 날이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민이 그렇게 눈치를 줬으니까.’
그래서 굳이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은 것이다.
레이나는 결의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가자!”
비키가 그랬던가? 자신이 한껏 차려입은 모습을 보면 레이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거라고.
“.......!”
딱 절반 맞았다.
깔끔한 블랙 수트를 차려입고, 헤어스타일까지 단장한 레이지의 모습에 자신 역시 넋을 잃었으니까.
“너무 예뻐. 여신 같아.”
“너는... 왕자님 같아.”
두 사람은 검은색 고급 세단 뒷좌석에 함께 탑승했다. 레이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운전은 누가...?”
“바로 나야.”
친구를 위해 정장을 차려 입고 깔끔하게 멋을 낸 사이먼 블랙이었다.
“자, 이동합니다.”
오늘 그는 떠그라이프의 화신이 아닌 친구를 위한 서포터이자 운전기사일 뿐.
민이 몇 번이나 강조한 역할을, 그는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렇게 입이 가벼운 그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심지어 뒷좌석에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안전 주행에 전념한 것이다.
타워 몰에 도착해서 101동 레스토랑에 손잡고 올라갈 때까지, 레이지와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수줍은 미소를 교환할 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최선을 다해 두 분을 모시겠습니다.”
근사한 미소의 중년 지배인이 텅 빈 레스토랑에서 두 사람을 맞아준다.
넓고 근사한 레스토랑에 준비된 좌석은 중앙에 위치한 단 하나 뿐.
레이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주 작정을 하고 준비하지 않았나?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한다.
“곧 최선을 다해 준비한 요리를 가져다 드릴 테니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기다려 주십시오.”
지배인의 접대는 완벽했다.
준비된 식전 와인을 부딪치며 기분 좋게 목을 축이고 대화를 시작한다.
“이거... 준비하느라 힘들었겠다.
“전혀. 오히려 즐겁고 행복했어. 아, 내가 이럴 때 쓰려고 그 동안 일해서 돈을 벌었 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그래?”
“그 동안 너와 사귀면서 너무 이기적인 생각으로 궁상맞은 시간들만 보냈던 것 같아. 반성했어. 앞으로는 널 위해 살 거야.”
“......!”
그 한 마디로 충분했다.
레이나는 오늘 준비된 이벤트의 끝을 본 사람처럼 펑펑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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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계획을 앞당길 필요성을 느꼈다.
이거 지금 나가서 일을 진행해야 할 것 같은데?
지배인에게 말해서 요리 나오는 시간을 늦춰 달라고 부탁한 뒤 조심스레 피아노 쪽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내가 먼저 도착해서 음향 세팅과 리허설까지 완벽하게 끝낸 상황.
지배인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준다.
잠시 후, 매장에 부드럽게 깔리던 음악이 멈췄다.
그리고 곧이어 연주를 시작했다.
Marry you.
레이나 정규 2집에 수록된 히든 트랙.
레이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스탠드에 장착되어 있던 무선 마이크를 뽑아 들고, 나하고 시선을 교환한다.
내가 신호를 주는 순간.
“......!”
노래가 시작된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노래가 매장 구석구석 울려 퍼진다.
레이지는 레이나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노래를 부른다.
레이나는 화장이 엉망이 된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펑펑 울고 있었다.
1절 후렴이 끝난 순간 나는 연주 패턴을 바꿔, 잔잔한 BGM 타입으로 가볍게 깔아준다. 레이지는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준비한 반지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
“나와 결혼해줄래?”
이벤트는 완벽했다.
계획한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모습에 희열이 차올랐다.
이 맛에 공연, 이벤트 기획을 하는 거구나!
나 어쩌면 이 분야에 재능이 있을 지도...?
청혼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 나왔다.
아, 나오기 전에 오늘 이벤트에 협조해 준 지배인을 비롯한 쉐프와 직원들 일동에게 짭짤한 수고비를 지급했다.
사이먼이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벌써 끝났어? 어떻게 됐어?”
말없이 엄지를 치켜 들었다.
“좋아! 잘했어! 하하!”
녀석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난 현장에서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줬고 흥미진진하게 듣던 녀석이 입을 다시며 말한다.
“나도 결혼하고 싶다.”
“넌 안 돼.”
“뭐? 어째서?!”
“사람이 너무 가벼워. 돈 아까운 줄 모르고 흥청망청 쓰고 허세가 너무 심해. 관종끼도 다분하고. 넌 이것부터 고쳐야 해.”
“하, 하지만 내 캐릭터고 상징인데... 그게 바로 나의 힙합이라고!”
“어디서 빌보드 1위도 못해 본 게 감히 누구 앞에서 큰 소리를 쳐?”
“.......”
하, 내가 설마 힙합 음악으로 흑인 랩 스타에게 큰 소리 칠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너도 레이지처럼 되고 싶지?”
“으, 으응.”
“내 말 잘 들으면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어.”
“저, 정말?”
반짝이는 눈동자.
“그럼. 그런데 네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넌 진정한 사랑이나 명예 같은 것보다 허세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잖아.”
“내가? 나 안 그래! 허세는 무슨...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녀석이 황급하게 반박한다.
“나도 레이나처럼 멋진 여자 만나서 결혼하고 가정 꾸리며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멋지고 믿음직스러운 가장이 바로 내 꿈이란 말이야!”
“그런데 너 지금 그런 상황으로는 절대 그런 거 못해. 그냥 네 돈만 보고 몰려오는 여자들이 입 바른 소리 해주면 정신 못 차려서 막 퍼주고....”
“.......”
“그렇게 살다가 초라하게 가는 게 지금 네 앞에 준비된 운명이야.”
농담이 아니라, 이전 삶에서 사이먼 블랙은 화려하게 살다가 급속도로 재산을 탕진, 파산 위기에 까지 몰리게 된다.
지금 보면 애가 참 순수하고 괜찮은데, 인생에 목적이 없으니까 방황하고 있는 거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잭, 레드 트라이브로 유명세를 타게 될 그 녀석은 훨씬 낫지.
또라이 기질은 누구보다 강하지만 힙합과 사업으로 성공해서 거물이 되겠다는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지.
물론 그 특유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주체하지 못해 크고 작은 사고를 수도 없이 치긴 하는데... 잘만하면 그것도 내 선에서 어느 정도는 컨트롤이 가능할 것 같다.
아무튼 우선은 사이먼 블랙, 이 녀석부터 정신 개조를 시킬 필요가 있다.
“이번에 내가 하는 거 봤지? 너도 내 조언을 잘 따르면 레이지처럼 인생에 진정한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가 있어.”
“........”
표정이 굉장히 복잡해 보이지만... 이미 결론은 나온 것 같다.
난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앞으로 내 말 잘 좀 들어.”
마지막 코스는 뉴욕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이다.
[ 식사 마치고 나가는 중이야. ]
레이지의 문자를 받고 사이먼 블랙에게 급히 말했다.
“난 여기서 빠질 테니까 마지막까지 역할 수행 좀 완벽히 해줘. 알았지?”
“걱정 마.”
“레이지 내릴 때 이 가방 좀 건네줘.”
“뭐 들어 있는데?”
“내일 편하게 갈아입을 수 있는 옷하고 신발. 계속 저 꼴로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잖아.”
“... 넌 진짜 준비성이 철저하구나.”
묘한 표정의 사이먼 블랙에게 한 마디 했다.
“너도 이렇게 좀 하고 살아. 인생이 달라져.”
“.......”
“내일 오후에 연락해. 오늘 수고했으니 한인 타운에서 가서 기가 막히게 맛있는 고기 먹여줄 테니까.”
“알았어.”
재빨리 롤스로이스에서 빠져 나와 먼 곳에서 숨어 지켜본다.
레이지, 레이나 커플이 세상 행복한 얼굴로 걸어 나와 함께 차량에 탑승하는 광경이 보인다. 그것까지 확인하고 난 조용히 건물을 빠져 나왔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난 콜택시를 타고 집까지 이동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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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 레이지 커플. 혼인 신고 확인! ]
[ 스타 부부 탄생? 레이나와의 레이지 커플의 두근두근 결혼 초읽기! ]
미국 전역에 두 커플의 결혼에 대해 관심이 모였다.
내 조언대로 레이나와 레이지는 신속하게 혼인 신고와 결혼식 준비를 이어갔다.
봐. 이렇게 쉽고 간단한 일은 뭐가 어렵다고 끙끙 대며 고민하는 건지....
난 약속했던 결혼 선물을 위해 라틴 댄스 팝 <세뇨리타>를 만드는 중이었다.
대부분 음악이 그렇지만, 라틴 댄스 팝은 특히 드럼 질감이 굉장히 중요하다.그 중에서도 킥 비트!
초 저역대. 가슴 속 아주 깊은 곳부터 울릴 수 있는 그런 사운드를 만들겠다고 며칠 동안 개고생을 했다.
그래도 드럼만 완성하면 나머지는 쉽게 이어갈 수 있다. 미래에 유행하는 라틴 팝 트렌드가 내 머릿속에 모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표절이 아니라 그 트렌드를 이용해서 나만의 곡을 만들겠다는 것이니 양심에 가책 받을 일도 없다.
인트로나 전주 따위 없이 라틴스러운 화려한 기타 선율과 피아노 리듬만으로 노래를 시작한다.
레이나의 짙고 매혹적인 R&B 창법이 노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려줄 것이다.
이후 레이지의 그루브한 랩과 함께 레게톤 비트가 삽입된다.
퉁~ 타둥타! 퉁~타둥타!
BPM은 그렇게 빠르지 않지만 드럼의 어택감이 워낙 강렬하고 일단 레게톤 리듬 자체가 덩실덩실 춤추게 만드는데 최적화 되어 있다.
여기에 미래 트렌드를 꿰뚫고 있는 내 센스가 곁들여지면 이건 사실상 실패하기 힘든 조합이지!
세뇨리타는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 처녀를 가리키는 단어다.
사랑에 갈등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하는 레이나의 모습을 순수하게 녹여냈다. 레이지가 랩으로 그녀를 설득하는 그림인 것이다.
순수한 아가씨.
쓸데없는 고민 따위 하지 마.
뜨거운 사랑만 있으면 돼.
당신의 태양이 되어줄게.
언제나 뜨거운 사랑으로 당신을 지켜줄게.
내 이름을 불러줘 아가씨.
난 당신 곁에 있을 거야.
항상 춤추며 노래를 부를 거야.
뭐... 대략 이런 내용이다.
이제 안무를 짜보자.
처음에는 화려하고 우아한 시퀀스로 반주와 보컬의 색채를 극대화시킨다.
레이나가 홀로 솔로로 춤을 춘다.
그러다가 랩과 함께 신나는 레게톤이 울려 퍼지면 둘이 관능적인 커플 댄스를 추는 것이다.
관능적인 바차타 댄스를 베이스로, 화려해 보이면서도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안무를 만들었다.
원래 레게톤 장르 음악과 따라 붙는 춤은 페레오라고...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커플 댄스가 있는데 난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섹시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페레오는 너무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래서 바차타를 베이스로, 관능미를 부각시키되, 조금만 연습하면 누구나 손쉽게 따라할 수 있는 구성으로 안무를 짠 것이다.
그렇게 라틴 댄스 팝 세뇨리타의 가이드와 안무 영상이 완성됐다.
일주일 동안 잠자는 시간 까지 아껴가며 미친 듯이 작업한 탓에 피곤해 죽을 지경이다.
곡과 안무 영상 원본을 레이나, 레이지 커플에게 전송한 뒤 그대로 잠들었다.
학교고 나발이고... 나는 잠 좀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