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꿈의 노래 (2) >
“.......”
엔 플라워의 일본 시장 진출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영감님이 대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지난 밤 또 한 뭉텅이의 선물을 안겨주고 떠나간 것이다.
“학교 어떻게 하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은 영감이 우선이다.’
급히 학교에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하고,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아, 영상 켜놔야지.”
대표님이 좋은 팁을 던져주고 갔다.
그렇게 아무 대책 없이 무아지경에 빠져 곡을 만들면 나중에 놓치는 부분이 많을 테니 영상 촬영을 해놓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곡이 유명해지거나 그러면 뮤튜브 콘텐츠로 만들어 써먹을 수도 있고.”
그러고 보니 뮤튜브 쉰지 너무 오래된 것 같다.
슬슬 브이로그라도 하나 올려야 할 것 같다.
‘팬 관리에도 너무 소흘했던 것 같고, 텐 믹스랑 국내 시장도....’
생각해보니 이런 무심한 놈이 또 있을까 싶다.
심지어 집안 문제도 크게 신경을 못 쓰고 있었잖아?!
... 그래도 그건 나중에.
“지금은 이 영감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야.”
잔잔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며, 꿈에서 봤던 또 다른 광경을 내레이션으로 읆조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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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스스로가 곡을 쓰는데 재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끈기도 없었다. 노래 부르고, 춤추고, 연기하는 건 잘했지만 이건 타고난 것이다.
그냥 쉽게 말하면, 노력하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 청년이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곡 하나를 완성하기에 위해 몰입하고 있었다.
금발 머리, 누구보다도 환한 미소를 지닌 햇살 같은 그녀를 떠올리며!
틈이 날 때마다 곡 작업에 매달렸다.
짐을 나르고, 호프집과 서빙과 설거지를 하고. 틈틈이 극단에 조연으로 출연을 하는 바쁜 나날 속에서도.
그렇게까지 한 것은 햇살 같은 그녀에게 좋은 곡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미모와 성품에 반한 수많은 남자들이 선물 공세를 했지만, 그녀는 그 어떤 것도 받아주지 않았다.
남자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오로지 춤과 노래.
그것에 관심 있고 그것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녀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선물하면 분명 마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마침내 힘들게 완성한 곡을 선물했다.
극단의 경쟁자들은 마구 비웃었다.
심지어 곡 쓰는 법을 가르쳐줬던 극단의 작곡가조차도.
실제로 곡은 형편없어 보였다.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아, 내가 왜 안하던 짓을 했을까?
좌절감에 도망쳐 버리고 싶었던 그때.
“.......!”
홀로 조용히 악보를 보던 그녀가,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노래를 고친 거야!’
그 짧은 순간에, 곡을 모두 파악하고 단점을 고쳐 근사하고 멋진 노래로 바꿔 버린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바로 그녀의 노래 소리.
그것이 곡을 더욱 아름답게 빛내주고 있었다.
사실 이 곡은 그녀와 단 한 번이라도 함께 부르고 싶어 만들었던 커플 곡이었다.
좌절감이 사라지고 생소한 감정이 밀려온다.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희열감!
그 순간 주변 상황을 모두 잊은 사내는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라보기만 했어요.
그저 구경꾼처럼.
상상하기만 했어요.
마치 눈 먼 장님과도 같았죠.
기다리기만 했어요.
아이처럼.
그저 바랄 뿐이었죠.
당신이 다가와 주기만을.
이 순간을 기다려왔어요.
서로 마주보고.
함께 노래하는.
바로 이 순간을.
마침내 당신이 보여!
안개가 걷히고.
당신이 다가왔죠.
기다리던 순간이 왔어!
환하게 웃어줘요.
노래를 불러줘요.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함께 있겠다고 약속해줘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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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환상적인 듀엣곡이다.
내가 만들었다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이 곡이 완성된 순간.
저 유명한 디즈니에서 어머나! 소리치며 돈을 싸들고 달려올 것 같은... 그 정도로 완성도가 있는 음악이다.
감동도 잠시.
“이게 아마 목소리를 잃고 과거를 후회하던 노인의 젊은 시절이겠지?”
그리고 여성은....
‘남자의 표현대로 햇살만큼 환하고 상냥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이었어.’
어설픈 글, 그림 실력으로 내가 본 모든 풍경, 그리고 인물들을 묘사한다.
어째 곡 만드는 것보다 이게 더 오래 걸리네.
시대 배경은 아마도....
“1980년대, 극장산업이 침체기에 접어들던 시기의 브로드웨이.”
첫 번째 꿈에서 봤던 극장은 낡고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 시기 브로드웨이는 극장은 간신히 명맥만 유지되었고, 극장이 허물어지며 성인클럽 같은 음란 퇴폐 업소가 마구 들어오고 있었다.
시대상에 더해, ‘어떠한 연유’로 완전히 무너져 버린 극장가 홀로 서서, 자신의 과거 실수를 후회하며 탄식하는 노인의 모습이라면... 얼추 이야기와 설정 배경이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이 같은 글과 그림, 내용, 자료 등을 모두 정리한 뒤 편집한 영상, 음원과 함께 두 번째 메일을 보냈다.
헨리 윌리엄스 작곡가님과 올리비아 퀸 작가님께.
아직 어떠한 답변은 없지만... 심지어 내 메일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은 보내본다.
현재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저런 생소한 뮤지컬 방식의 작업을 완성할 수가 없다.
난 독학으로 미디를 시작한 대중음악 작곡가니까.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한 게 아니니... 이게 참 이럴 때 아쉽다.
음악 공부에 대한 갈망은 내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직면하게 되었을 때 더더욱 커진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어느 새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집에 먹을 게 다 떨어졌는데... 그냥 라면 끊여서 햇반 말아 김치랑 먹어야겠군.
지희가 들어온 이후부터의 텐 믹스 분량을 보지 못했다.
영상 시청 세팅을 끝마쳤고 이제 라면만 가져오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 뭐하고 있었어? ]
놀랍게도 레이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 방금 식사 마치고 첫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 메뉴가 뭐야? ]
“라면하고 김치요.”
[ ........ ]
“왜요?”
[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사줄 테니까 나와. 마침 할 이야기도 있고. ]
그렇게 전화 통화를 마치고 맛있는 끊은 라면을 바라봤다.
버릴 수는 없으니... 빨리 후루룩 먹고 나가야겠군!
손님이 많은 레스토랑에 레이나가 구석진 창가 자리에 홀로 앉아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얼핏 보면 레이나인지도 모르겠다. 저 작은 머리에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써 버리니 얼굴 절반이 가려져 버려서.
그러고 보니 옷도 어디서 많이 본 청바지에 해골 프린팅 티셔츠... 평상시 입던 복장이 아니다.
맞은편에 앉으며 인사 차원에서 물었다.
“레이지 집에 있다가 나온 거예요?”
“.......!?”
깜짝 놀라는 그녀.
“어, 어떻게 알았어?”
“그 티셔츠 레이지 집에 있던 거잖아요. 애가 엄청 아끼던 건데.”
“아....”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혀를 차며 말한다.
“서로에게 열정을 불태우는 건 참 좋은 일이긴 한데, 낮과 밤 좀 가리고 먹을 것도 챙겨 먹으면서 좀 해요. 피골이 상접해지려고 하네.”
“... 정말 그런 게 보여?”
“가까이에서 보니 굉장히 잘 보여요. 그런데 계속 보다보니 병약미도 매력이 있네요.”
곧 스테이크와 감자튀김, 샐러드 같은 것들이 푸짐하게도 나왔다. 미리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잘 먹을게요!”
라면도 좋지만, 스테이크에 비할 바는 아니지!
맛있게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만 음식을 먹고 있었다.
“안 먹어요?”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먹어. 보기 좋네.”
결국 그 많은 음식을 나 혼자 모두 해치워 버렸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와 디저트를 가볍게 즐기며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요즘 어때요?”
“조금 정신없긴 하지만 아주 행복해! 나 요즘 진지하게 레이지 매니저로 전직할까 고민 중이라니까?”
처음에 자신이 함께 다니며 조력을 해주겠다는 제안에 레이지가 놀랐다고 한다.
“정말 할 수 있겠냐고, 자존심 상하거나 힘들어서 나중에 뭐라고 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그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보란 듯 해내고 있는 중이지. 오히려 내가 너무 열심히 잘 하니까 당황하는 눈치더라.”
“그래도 솔직히 힘들긴 하죠?”
“보통 일이 아니더라. 그래서 새삼 내 스텝들을 다시 보게 됐어. 요즘 더 잘해주려고 노력 중이야. 회사하고 상의해서 조금이라도 월급을 더 올려주려고 이야기 중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내 제안이 좋은 변화로 작용한 모양이다.
그녀는 날 지그시 보며 말했다.
“그래서 너한테 참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이런 세상을 모르고 스스로 만든 불행에 갇혀 살았을 테니까.”
민망해서 괜히 시선을 피하며 물을 마셨다.
그녀가 소리내서 유쾌하게 웃는다.
“그리고 나, 너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눈빛이 호기심으로 빛난다.
“세뇨리타 안무. 직접 만든 거야?”
“네. 그런데요?”
“와, 정말이었구나. 나 그 영상 보면서 정말 놀랐어. 음악은 말할 것도 없고, 일단 춤 솜씨가 굉장히 훌륭하더라고. 레이지 뿐만 아니라 우리 댄서들, 그리고 레이블 관계자들도 모두 다 같이 감상하면서 놀라워하더라고.”
“그랬어요? 어쨌든 음악하고 안무가 나쁘지 않았다는 거죠? 레이지 반응은 어땠어요?”
“굉장히 좋다고, 역시 너라고 막 칭찬을 하던데.”
“전 사실 다른 것보다 레이지 반응이 걱정이었어요. 힙합 하는 애한테 뜬금없이 라틴 댄스 뮤직에 춤까지 시키려고 하니 반발하지 않을까 싶어서.”
“거부감보다는 오히려 의욕을 드러내던데?”
“그래요? 다행이네요.”
“아무튼 내 질문에 빨리 대답 좀 해 봐. 어떻게 그렇게 춤을 잘 추고 안무도 잘 만들어? 전문적으로 배운 거야? 우리 댄서들이 그렇게 감탄하며 놀라는 모습은 정말 처음 봤거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날 향한 시선이 굉장히 반짝거린다.
“제가 원래 곡 만들고 노래 부르는 것보다 춤추는 걸 더 잘해요.”그러면서 몇 가지 영상을 보여줬다.
대표님과 함께 출연했던 <유정연의 슈퍼스타> 영상에서 세계 최고 비보이들의 고난이도 퍼포먼스를 한 번 보고 그대로 재현하는 내용이었다.
놀랍게도 이 영상 조회 수가 벌써 천만 회를 넘겼더라.“나 이 영상 링크 좀 보내줘!”
“왜요?”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이걸 왜 보여줘요?”
“자랑할 거야. 지금 굉장히 핫한 작곡가인 민이 춤 실력도 이렇게 굉장하다는 것을 알면 다들 놀라서 자빠질 거야!”
이제 보니 우리 검은 여왕께서는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정말 친해졌다고 생각하니 이런 모습도 허물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내심 기분은 좋았다.
“그건 그렇고 이제 본론을 꺼내야겠지?”한순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장난꾸러기 소녀에서 다시 근엄하고 카리스마 있는 여왕으로.
그리고 이어진 말은.
“내 차기작의 총괄 프로듀서가 되어줘.”
내 심장을 미친 듯 뛰게 만들었다.
“춤, 노래, 패션... 모두 한 번 맡겨볼 테니 네 마음대로 날 디자인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