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꿈의 노래 (4) >
꿈이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난 모든 상황을 기억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남자와 여인은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도 열렬한 사랑을 시작했다.
참 재미 있는게, 어느 새 여자의 얼굴이 우리 샬럿 왓슨 양의 이목구비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넘어오기 직전. 여배우로서 진정한 전성기가 시작된... 세계 최고의 미녀라는 찬사와, 아역 배우의 저주를 이겨낸 단 한 명의 주인공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을 때의 그녀였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아직 누군지 모르겠다.
이것도 적임자를 발견한 순간 바뀌려나?
두 남녀는 소소한 것에서도 큰 사랑을 느꼈다.
도넛과 커피를 나눠 마실 때도, 노래를 부르다가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도.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만큼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롯이 자신에게 용기를 내서 다가와 준 남자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남자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다.
위기는 속해 있던 극장이 경영상 어려움을 겪게 되며 시작되었다. 그녀를 찾아주는 곳은 많았지만, 남자를 찾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함께 극단에 속해 노래 부르고 싶어 했다.
이런 생각으로 좋은 제안을 거절하는 그녀를, 남자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꿈도 사랑도 좋지만, 일단 현실적인문제도 고려해야 했다.
그녀는 스타가 될 수 있는 인재였다. 지린내, 바퀴벌레, 쥐가 공존하는 낡고 더러운 집에서 언제라도 벗어날 수 있는 처지였다.
세상을 비춰야 하는 태양이, 자신 같은 작은 먹구름 한 조각 때문에 그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이것은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도 한몫했다.
현명하게 생각해.
무엇이 그녀를 위한 선택일까?
너는 새장이야.
그녀라는 새를 가두고 있지.
날아오르지 못하게.
자유롭지 못하게.
목소리도 막아 버렸어.
세상으로부터 단절시켰지.
그녀의 얼굴 봐.
행복해보여?
네가 사랑하던 그 모습이야?
마치 구름에 가려진 태양같이.
빛을 잃어 버렸어.
현명하게 생각해.
무엇이 옮은 선택인지.
넌 이기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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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열 받네.”
아직 비행기 안이었다.
창 너머, 구름만이 가득한 세상이 무척 어두웠다.
“지들이 뭔데 헤어지라 마라야?”
짜증나는 건 바로 남자 주인공의 행태였다.
그걸 또 진지하게 듣고 고민하고 있지 않나?
자신이 그녀의 가능성을 막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책하는 것이다.
“너무 병신 같은데....”
이전 삶을 생각하면 참....
“왜 이렇게 공감이 되냐?”
사람 미치게 하네 정말.
나는 그렇게 툴툴 대며 노트북을 펼쳤다.
스케치한 곡과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고도 한 시간이 남았다.
떠나오기 전. 샬럿 왓슨과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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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있잖아. 실은....”
서, 설마...?!
여기까지, 정황을 파악해보면 고백하려고 각을 잡고 있는 것 같지?
그래서 실은 나도 기대했다.
이전 삶에서 날 열병에 앓게 만들었던. 만인의 연인이자 최고의 미녀 여배우인 그녀가 설마 고백을...?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가수가 꿈이었어.”
그 다음부터는 짜게 식은 얼굴로 이야기를 들었다.
피아노와 춤도 배웠고, 짧았지만 합창, 밴드부에서 활동도 해봤고....
솔직히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더라.
아니, 분명 고백하는 분위기였잖아?
그런데 엉뚱한 소리를 해서 사람 김빠지게 만드는 거야?!
아무튼 핵심은 간단했다.
“넌 천재 프로듀서잖아. 노래와 춤 솜씨고 굉장하고... 혹시 날 트레이닝 시켜 줄 수 있을까?”
응 싫어. 돌아가.
차마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으니 뭐....
“그, 그냥 무료로 해달라는 건 아니야! 수강료는 달라는 대로 줄게!”
“친구 사이에 수강료는 개뿔... 어차피 나도 너에게 제안할 게 있었거든?”
“응?”
“일단 들어봐. 내가 사실 이번에 무슨 일 때문에 왔냐면....”
헨리 윌리엄스와 올리비아 퀸.
두 명의 거장과 비밀리에 추진 중인 뮤지컬 영화 프로젝트에 대해 들려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작한 두 편의 영상도 보여줬다.
춤도 추고 내레이션도 하고 피아노 치며 노래도 부르고.
“어때?”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반문했다.
“이, 이거... 설마 나한테 같이 하자고 제안하는 거야?”
“응.”
“여, 여 주인공?”
“맞아.”
“왜, 왜?”
거 궁금한 것도 많다.
하지만 지금은 캐스팅을 하고 있는 상황이니,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사실 여기 왔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거든?”
“그런데...?”
“이번에 너희랑 놀고, 지금 이렇게 대화면서 갖게 된 생각이 있어.”
이 분위기에 이런 말을 하면 무슨 내가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은 분위기지만... 설마 오해는 안하겠지?
난 애써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 우리 샬럿 왓슨 양은 참 햇살처럼 밝고 따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멋진 여자구나!”
“.......!”
그녀의 얼굴이 급격히 빨개진다.
그 변화가 왠지 재미있게 느껴져 칭찬을 더 쏟아냈다.
“아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완전히 피지 않은 꽃임에도 외모가 참 아름답고, 기품과 우아함이 느껴지지.”
“......!”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참 좋아. 이대로 성장하면 전 세계 이름을 떨치는 미녀 여배우로 성장할 거야. 라고 생각하다 보니 어? 꿈 속 여자 주인공 하고 이미지가 비슷한데? 라고 생각하게 된 거야.”
정처 없이 방황하는 눈동자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두 손.
그녀는 부끄럽고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여자 스타의 솔직한 모습을 바로 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특권인 것 같다.
난 빙긋 웃으며 물었다.
“샬럿 왓슨 양은 어떻게 생각해?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원하는 음악 트레이닝, 모두 시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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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면 샬롯 왓슨은 그 자라에서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요청하더라.
“나 하게 해줘! 이거 꼭 하고 싶어!”
이로서 나는 두 개의 거대한 패를 쥐게 됐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서도 통할 아이돌 주세아.
노아 시리즈를 시작으로, 전 세계 영화계에 찬란한 미모와 재능을 떨치게 될 샬럿 왓슨.
‘주세아는 소속사였던 KM의 역량 부족, 샬럿 왓슨은 작품 보는 눈이 없고 운도 없어서 꽃을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각자의 분야에 본인의 이름을 깊숙이 각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미래를 알고, 이제는 실력과 인맥도 어느 정도 갖춘 내가 작정하고 프로듀싱하면 어떻게 될까?
‘주세아와 샬럿 왓슨이라, 엄청난 보물을 손에 넣은 기분이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미소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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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자마자 블랙 로즈 대표 집무실로 이동했다.
아이작과 킴벌리 부부가 호출했기 때문이다.
“넌 무슨 일을 런던 시내 관광지 돌아다니면서 하냐?”
아이작의 추궁에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시선 피하지 말고 똑바로 쳐다 봐. 그리고 솔직히 말해. 대체 학교까지 빼먹고 영국 여행을 다녀온 이유가 뭐야?”
난 몰랐는데, 내가 다니엘, 샬럿 두 사람과 함께 런던 관광지를 돌아다녔던 것이 꽤나 화제가 됐다는 모양이다.
[ 노아 삼총사 런던 출몰! ]
이런 식으로 기사도 나오고 SNS 실시간 트렌드에도 뜨고... 아무튼 엄청 화제가 됐다는 모양이다.
... 아직 스타가 아니라서 마음 놓고 돌아다녔는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거짓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정확히 어떤 일 때문에 영국에 건너간 건지, 그리고 런던에서 왜 그 아이들하고 만나서 돌아다녔던 건지!”
아이작과 킴벌리는 미국에서 내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실제로 자식처럼 애정을 갖고 대해주고 있으니 이런 추궁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난 솔직하게 그간 모든 일들을 털어놨다.
사실 아이작과 킴벌리 부부는 내가 정확히 어떤 업무 때문에 넘어간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올리비아 퀸이 퍼스트 클래스로 티켓을 끊어줬다니 노아 시리즈 출연 문제 정도로만 생각했겠지.
그래서 믿고 보내줬더니 런던에서 신나게 놀았다는 목격담만 가득하지 않나?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주고받은 이메일 내용과 자료까지 보여주고, 현지에서 주고받으며 다시 정리한 문서들까지 공개하고서야 납득시킬 수 있었다.
자, 그리고 여기서 살짝 살이 보태진다.
“마침 샬럿 왓슨을 여주인공 시키면 어떨까, 고민 중이었거든요. 그래서 온 김에 가까이에 두고 상세히 관찰해보자 싶어서... 결국 캐스팅까지 완료했어요.”
“.......”
“.......”
아이작, 킴벌리 부부는 얼떨떨한 반응이었다.
이해가 된다.
단순히 노아 출연 문제가 아니라, 규모가 상상을 아득히 벗어난 수준이었으니....
“그러니까... 놀러 간 게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었다는 거지?”
“증거 보여드렸잖아요. 설마 못 믿으시는 건...?”
“아니야! 믿지. 믿어. 믿어야지.”
부부는 민망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이작이 헛기침을 터트리고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그것도 모르고... 너를 조금 더 믿었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전 오히려 두 분이 다그쳐줘서 고마웠는데요.”
“어째서?”
난 최대한 밝고 순수한 미소로 말했다.
“그만큼 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저 솔직히 크게 감동했어요.”
“......!”
감동으로 일렁이는 표정들.
나... 굉장히 뻔뻔한 것 같지?
아, 찔린다.
이후로는 뮤지컬 이야기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아이작, 킴벌리 부부가 엔터 업계 종사자들이고 심지어 브로드웨이 근처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다보니 뮤지컬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화 중 아이작이 이런 말을 했다.
“생각해봤는데, 그거 배경이 1980년대 침체기의 브로드웨이라면서?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잖아?”
“그렇...죠?”
“여자 주인공이 샬럿 왓슨이라면 남자 주인공은 네가 해도 되지 않을까? 한인 이민자 가정 설정이든 아니면 꿈을 갖고 그 시대에 미국 브로드웨이로 넘어 온 사람이든... 어느 쪽이든 특색 있는 작품이 될 것 같긴 한데?”
“....오?”
“물론 지금은 어렵겠지. 너무 어리니까. 왓슨 양도 그렇고. 하지만 당장 만들어서 뭘 어떻게 해보려는 작품이 아니라 멀리 보고 만드는 거잖아. 그때쯤 되면 나름 연기 내공도 쌓여 있을 테고, 괜찮은 생각 아니야?”
샬럿 왓슨이 여자 주인공.
내가... 남자 주인공?
이민자 가정, 혹은 꿈을 갖고 무일푼으로 진출한 외국인으로 그 시대 브로드웨이 상황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라....
... 오호라?
난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이작, 혹시 천재 아니에요?”
이에 대해 아이작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난 오히려 너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을 생각을 한 번 도 못해봤다는 게 더 놀랍군. 이 정도면 제작자 마인드도 좀 지나친 것 같은데 말이지.”
이 대화 덕분일까?
[ 우리... 헤어져요. ]
그날 밤 꿈에서.
여자 친구에게 찐따 등신 같은 말을 건네는 남자 주인공의 얼굴은 20대 중.후반 때의 나로 바뀌어 있었다.
... 왜 하필이면 이런 병신 같은 타이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