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꿈의 노래 (7) >
두 커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간을 내줬다.
최근에는 커플이 함께 방송과 행사를 다니고 있었는데도 기꺼이 일정을 빼준 것이다.
블랙 로즈 사옥에 위치한 녹음실에서 만남을 가졌다.
“먼저 노래부터 들어봅시다.”
악보를 건네주고 본인 스스로가 녹음은 가이드를 틀었다.
아름다운 피아노 반주로 시작되는 듀엣 곡에 두 사람은 금방 몰입했다. 뭐가 그리 로맨틱했는지 꼭 붙어 앉아서 손잡고 뽀뽀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노래가 끝나자 레이나가 굉장히 밝은 얼굴로 물었다.
“제목이 뭐야?”
“Beautiful World. 나쁘지 않았죠?”
“그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아름답고 환상적이야!”
그러더니 무서운 소리를 한다.
“이거 우리 곡이지?”
레이지도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난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니요. 이거 저하고 샬롯 왓슨이 부를 곡이에요.”
어리둥절해하는 두 사람에게 비밀리에 진행 중인 <1980 브로드웨이>에 대해 설명해줬다.
이야기를 듣고 난 레이나가 손뼉을 친다.
“멋지다! 혹시 배역 좋은 거 있으면 나에게도 주면 안 될까? 나 예전부터 뮤지컬 영화 출연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
“갑자기 뮤지컬 출연이 하고 싶다고요?”
“일단 작품이 굉장히 멋있어. 노래도 좋고. 무엇보다도 작곡가, 작가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 굉장히 유명한 사람들이잖아!”
그녀는 우리 세 사람도 가지지 못한 확신을 보여줬다.
“이 정도 구성이라면 무조건 성공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제작 전에 빨리 발을 걸치려고 하는 거지!”
“아하....”
굉장히 좋게 평가해주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레이나가 누군가?
바로 빌보드의 여왕 아닌가?
검은 여왕이라는 별명도 있고... 한 마디로 작품 고르는 촉이 특출나다. 그녀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아무리 우리 작품이 뭔가 되긴 되려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연기라... 그녀가 과연 가능할까?’
그래도 그녀 정도의 인지도와 유명세.
노래, 춤 실력과 엄청난 끼를 고려해본다면....
‘신의 한수가 될 수도 있지.’
무엇보다도 그녀를 추종하는 흑인 팬들을 대거 유입시킬 수도 있을 테니까.
“나중에 배역 나오면 제일 먼저 오디션 제일 줄게요.”
“어? 나 오디션 보는 거야?”
“그래도 연기력 검증은 해야죠. 무엇보다도 저 혼자 만들고 있는 작품이 아니라 다른 두 분에게서도 동의를 얻어야 해요. 가장 좋은 수단은 오디션이죠.”
“좋아!”
그녀는 순순히 수락했다.
참고로 한국과 달리 할리우드에서는 이미 검증된 톱 배우라도 본인이 제작까지 도맡는 게 아닌 이상에야 오디션을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이지가 물었다.
“가이드를 하려는 게 주연 배우인 너희 두 사람이 교보재로 삼고 연습을 하기 위함이라고 했지?”
“응. 그랬지.”
“그러면 만든 곡 중에서 연습이 필요한 곡은 모두 들려줘 봐. 오늘 모조리 녹음하자.”
“어? 그래도 돼?”
“너는 그래도 돼.”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레이지와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나.
레이지 저 바보가 이렇게 기습적으로 엄청난 감격을 안겨줄 줄이야!
너는 그래도 된다니...!
그 자리에서 헨리 윌리엄스 작곡가님이 편곡을 마친 세 개의 트랙리스트를 들려줬다.
천재 뮤지션 아니랄까봐.
한두 번 듣고 바로 곡의 진위까지 꿰뚫어 버리더라.
악보를 보고, 몇 번 음과 대화를 주고받던 두 커플이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을 때.
“좋아. 준비 끝.”
“첫 번째 트랙부터 녹음해보자고.”
그리고 그렇게 녹음이 시작되었을 때.
‘...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빌보드 가수라는 건가?’
나는 새삼, 뮤지션으로서 적잖은 격차를 느끼고 전율했다.
특별한 연습이나 코칭 따위는 필요 없었다.
두 천재 뮤지션은 내가 어떤 의도로 이 곡을 만들었는지 잘 알고, 그 이상으로 소화해주고 있었으니까.
갑자기 뜬금없는 고민이 생겼다.
이거... 나하고 샬롯 왓슨이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 두 사람에게 맡기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노력한다고 저 피지컬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가장 놀란 것은 레이지의 보컬 실력이다.
레이지가 래퍼이긴 하지만, 보컬리스트로서도 타고난 천재라는 사실을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게 흑인 음악도 아니고 백인 팝 음악에 가까운 뮤지컬 넘버인데... 이것까지도 완벽히 소화해낼 줄은 몰랐다.
레이나는 뭐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고.
[ 어때? ]
[ 마음에 들어? ]
기존 세 개의 트랙에 더해 오늘 모임의 목적이었던 Beautiful World 녹음까지 끝마쳤을 때.
[ 짝짝짝! ]
벅차오르는 감동을 참을 수 없었다.
힘껏 박수를 치는데 이상하게 눈앞이 뿌옇다.
이거 정말 내가 부르는 게 맞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난 저 정도로 부를 자신이 없는데....
이런 내 고민을 들은 레이지가 한 마디했다.
“굳이 내 보컬을 따라하려고 하지 마. 넌 너만의 색이 있어.”
“정말? 어떤 색인데?”
“음, 일단은 굉장히 맑고 투명해.”
“그건 너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거잖아. 다른 장점 없어?”
“어, 어어....”
“없구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 나 이미 상처 받았어.”
“.......”
그냥 농담이었는데 자식이 괜히 눈치를 본다.
미안하게....
피식 웃으며 툭 어깨를 치고 말았다.
“노래 한 번 더 부를 수 있어?”
“응? 왜?”
“세뇨리타 녹음하자. 목 풀렸지?”
이 커플은 노래만 잘 부르는 게 아니다.
강철 성대를 가지고 있다.
“세뇨리타 프로듀싱 시작하는 거야?”
“언제까지고 계속 이 뮤지컬 하나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잖아. 오늘 녹음 끝내고 저녁에 시간 되면 댄스 레슨도 좀 하자고.”
“OK!”
“해보자!”
두 사람이 갑자기 기세가 살아났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지만,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세뇨리타 시작이 아닌가?
예상대로 녹음은 길게 가지 않았다.
각자 파트 노래 한 두 번 불렀을 뿐인데 끝나더라.
심지어 내가 부탁한 가이드 녹음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끝났다.
그 곡들은 오늘 처음 들었고, 세뇨리타는 진작 받아 본인들끼리 합을 많이 맞춰 봤기 때문이리라.
천재가 노력까지 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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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님, 작가님께 가이드 녹음과 믹싱까지 끝마친 네 개의 트랙을 공유했다.
마지막, Beautiful World와 함께 완성한 시나리오도 모두 정리해서!
기대했고 우려했던 반응이 모두 날아왔다.
[ 생각지도 못했던 훌륭한 퀄리티야! ]
[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민 군의 녹음 샘플도 좋았지만.. 확실히 세계적인 가수들의 노래는 디테일과 깊이감 부터가 다르군요! ]
여기까지는 기대했던 칭찬.
우려했던 반응은....
[ 듣다가 생각난 건데, 그냥 주연을 두 사람으로 올리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지 않아? ]
[ 저도 그 생각했어요. 당시 시대상을 생각하면 메인 스트림에서 아시아인 못지않게 흑인들도 꽤나 차별을 받았으니 그런 시대상을 고려해서 각본을 수정한다면.... ]
“에헤이! 그런 비슷한 컨셉의 내용 중에 이미 굉장히 성공한 전설적인 작품이 있잖아요! 드림걸즈 모르세요?”
나는 나름 타당한 이유를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 으하하하! ]
[ 호호호! ]
두 분은 웃기 바쁘시다.
[ 그냥 장난 한 번 쳐본 거야. 이제 와서 계획을 모두 엎을 수는 없지. 안 그렇소? ]
[ 작곡가님 말이 맞아요. 그리고 흑인들의 애환을 다룬 작품은 이미 너무 많아서 이제 와서는 특별할 것도 없죠. 그것보다는 차라리 아시아 계 이민자, 혹은 유학생의 고충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흥미로워요. 센세이션 하기도 하죠. ]
“그렇죠? 하하하!”
한편으로는 두 분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실제 지금 거론되는 것과 비슷한 주제, 내용의 영화가 먼 훗날 전 세계 시상식을 휩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여기서 거론될 내용이 아니니 패스~!
“아, 그리고 이건 레이나의 부탁인데....”
좋은 배역이 있으면 조연이라도 상관없으니 오디션 기회를 달라고 했던 그녀의 말을 전달했다. 두 분은 흔쾌히 수락했다.
[ 좋은 생각이야. ]
[ 워낙 재주가 특출난 아티스트들이고 인기도 굉장하니 추진해 볼 가치는 있다고 보네요. ]
확실히 두 분이 꽉 막힌 사람들은 아니다.
하긴, 그런 사람들이라면 나이가 어리다 못해 미성년자인 나하고 이런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겠지.작곡가님이 장난끼 가득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 이제 와서 자네를 빼고 무언가 진행할 생각 없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
“저 걱정 같은 거 한 적 없는데요?”
이 말은 그냥 하지 말 걸 그랬다.
두 분이 또 한 번 폭소가 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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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거구의 한 백인 사내가 남자 주인공을 찾아와 겁박한다.
[ 그녀와 헤어지는 게 어때? ]
남자는 황당했다.
대체 누군데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단 말인가?
[ 내 이름은 존. 그녀의 신인 시절부터 활동을 서포터해 왔던 매니저야. ]
그 순간 남자는 속으로 탄식하며 생각했다.
‘결국 올게 왔구나.’
하지만 이미 약속하지 않았던가?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 헤어지지 말자고.
[ 그럴 수 없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절대 헤어지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습니다. ]
[ 지금 그녀는 여러 회사와 많은 계약이 걸려 있는 상태야. 팬도 굉장히 많지.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아시안과의 열애설이라니... 참담한 사태가 벌어질 거야. 감당할 수 있겠나? ]
이미 예상했던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치명적이기도 했다.
섣불리 대답을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에게, 매니저 존이 기회다 싶어 겁박을 시작한다.
[ 자네가 아직 이 바닥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인데, 올라가는 건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야. 자네와의 열애설이 퍼지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나? 그녀에게 호의적이던 여론의 시선이 한순간에 악화되겠지? ]
[ ........ ]
[ 다시 무명 시절로 리턴하고 끝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그야말로 재앙이 몰아칠 거라고. 그런 상황 속에서 자네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틀린 지적은 아니다.
[ ....... ]
좌절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 매니저 존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서운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 놓았다.
[ 존이 그런 소리를 했다고요? 미쳐도 제대로 미쳤군요!! ]
그녀는 즉시 존을 불렀고 사실 관계를 확인했다.
[ 당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
존은 순순히 시인했다.
그러면서도 한 치의 위축됨 없이, 오히려 당당하게 반문했다.
[ 그래서 어쩔 겁니까? 이 사실을 매니지먼트에 알리기라도 할 겁니까? ]
[ 그야 당연히...! ]
[ 어떻게 말할 거죠? 저 아시안과의 뜨거운 열애를 방해했다고? ]
[ .......! ]
[ 사랑은 참 아름다운 단어죠. 저는 그 자체를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대상이 저 아시안이라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온갖 더럽고 지저분한 루머가 퍼져 나갈 거라고요. ]
매니저 존은 남자의 눈을 직시하고 말한다.
[ 이 땅에서 아시안은 환영 받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그 사실은 누구보다도 당신 스스로가 잘 알고 있겠죠? ]
무거운 침묵이 맴돈다.
매니저 존은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 당신처럼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젊은 미녀 여배우에게는 굉장히 치명적인 일이 될 겁니다. 모든 것을 잃게 될 거라고요. 전 그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당신을 위한, 당신의 매니저니까요. ]
[ ...... ]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헤어져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제 말을 들어요. 제가... 아니, 오직 저만이 당신을 더 높은 곳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줄 수 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