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또 다른 떡밥 투척 (1) >
마침내 입질이 왔다!
옷을 챙겨 입고 룰루랄라 외출하는데 발걸음이 가볍다.
'엄청 절망했겠지?'
음, 남의 불행을 좋아하면 안 되지만, 일이 계획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흥을 참을 수 없었다.
곧 있으면 제이미는 내 것이 된다!
... 아니, 그러니까 내 아티스트가 된다는 거지!
만남의 장소는 블랙 로즈 레이블 사옥 내부에 있는 카페테리아였다.
아주 혹시라도 이상한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정했다. 마침 KM 엔터테인먼트 현지 법인 사옥 위치가 그리 멀지도 않으니 적절했다.
"민아!"
"선배님!"
홀로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제이미가 나를 크게 반긴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확실히 고생한 기색이 얼굴에서 많이 드러난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굉장히 힘들었나봐요."
"뭐, 그럭저럭... 그나저나 넌 괜히 거리감 느껴지게 선배님이 뭐니? 누나라고 불러. 예전에 그렇게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랬던가요? 그러면 지금부터 누나라고 부를게요."
오면서 준비한 치킨, 떡볶이, 김밥 등의 한국 음식들을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와! 진짜 먹고 싶었는데...!"
"회사에서 못 먹게 해요?"
"응."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히 제이미한테... 그게 말이 돼요?"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무장하자고 해서 그렇게 하자고 했지 뭐."
"그것도 적당히 해야죠. 혈색도 안 좋고... 톡 치면 부러지겠네."
"그렇게 보여?"
"네! 보자마자 안쓰러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빨리 먹어요. 내가 보기에는 살 좀 쪄야 돼!"
먹다가 목이 메는지 울먹거리는 그녀에게 콜라를 권했다.
"콜라 살 쪄서 잘 안 먹는데...."
"살 좀 쪄야 한다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관리해봐야 스트레스가 심하면 아무 소용없어요. 오늘은 마음껏 먹으면서 좀 풀어요."
"그래. 그러자."
먹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진 모양이다.
혈색도 돌아온 것 같고.
표정이 풀어진 그녀를 보고 턱을 괸 채 말했다.
"예전에도 말씀 드린 것 같은데, 미국 진출에 어려움을 겪는 건 누나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회사가 전략을 잘 못 짜서 그런 거죠."
"... 그럴까?"
자신감이 굉장히 떨어진 것 같다.
"냉정히 말하면 전 KM의 과욕과 무책임함이 이런 참사를 일으켰다고 봐요."
그리고 물었다.
"지금 김만수 회장 한국에 있죠?"
"응."
"KM 본사 내부 사정이 꽤나 복잡한 것 같던데... 그것도 문제지만 내부적으로 미국 진출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 그거 수습하느라 정신 없을 거예요. 그 시점에서 미국 진출 계획은 틀어진 거죠."
제이미가 묘한 눈으로 묻는다.
"넌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블랙 로즈, JJ 엔터테인먼트 대표님들하고 워낙 친하게 지내면서 프로듀서로 이것저것 얽히는 일이 많아지니까 자연히 터득하게 된 것 뿐이에요."
"그렇구나."
제이미는 처연한 얼굴로 자책한다.
"나하고는 다르네. 난 아직도 시키는 거 말고는 잘 못하는데."
"분야가 다른 거죠. 누나는 가수. 전 프로듀서. 각자 영역이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니 조금 위로가 되긴 하네."
애써 웃는 모습에 왠지 한숨이 나온다.
누구보다도 빛났던 별의 추락이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착잡했다.
"우리 대표님도 예전에 그러더니, 한국 대형 기획사 대표들은 왜 이렇게 미국 시장에 큰 환상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게 워낙 크니까 그러는 게 아닐까? 당장 너만 봐도 국내 위상이 떠나기 전과 비교하면 몰라보게 달라졌는데...."
"제 위상이 어떤데요?"
"맨해튼 드리밍 때는 운이 정말 좋았고 아이작 이스트에 블랙 로즈 조합이라 가능했다는 말이 많았는데...."
음, 맞는 말이군!
"바로 이어서 레이지가 1위를 찍은 이후부터는 그냥 재능이 차원이 달라서 그런 거라고. 진짜 천재가 맞다며 톱 프로듀서로 인식되는 상황이야."
"톱이라도. 당치도 않네요. 당장 제 주위만 해도 히트곡만 수십 곡이 넘는 대표님도 계신데...."
"지금 거론된 너희 대표님이 방송에 나와서 했던 말이 그거야. 김민은 이미 자신의 역량을 뛰어 넘은지 오래라며...."
"그 분이 원래 주접이 좀 심해요. 어쩌다가 빌보드에서 반짝 좋은 성적 올리는 것 보다는 대표님 같은 분들처럼 롱런하는 게 훨씬 힘들죠."
그래서 이 업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보면 누나야 말로 진정 강한 사람인 거죠."
"내가?"
"남녀 통틀어 아시아 최고의 솔로 가수. 이러면 딱 튀어나오는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제이미잖아요."
"아...."
"혹시 이번 텐 믹스 마지막 편에서 주세아 무대 봤어요?"
"아, 그 친구 내 무대 커버했더라. 잘하던데?"
"잘하긴 하는데 거기서 또 한 번 역량 차이가 느껴지더라고요. 그 무대. 누나가 데뷔하고 얼마 안 되서 발표했던 음악이었잖아요."
"그랬지. 두 번째 앨범 타이틀곡이었으니까."
"주세아가 아직 연습생 신분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 받고 있는 앤데... 누나랑 비교하니 확실히 수준 차이가 좀 나긴 하더라고요."
"그래? 내가 보기에는 나 못지않게 잘하던데...."
"에이. 전혀 아니에요!"
"아닌데...."
부정하면서도 내심 기분은 좋았던지 실실 새어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자존감 회복 작전이 꽤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한결 부담이 가신 얼굴로 물었다.
"나 이제 어쩌지? 다 때려 치고 한국에 돌아가? 아니면... 조금 더 해볼까? 어쨌든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가면 아쉽잖아."
"더 해보시겠다고요? 어떻게요?"
"뭐... 소속사에서 말해서 새로운 곡과 안무를 받는 것도 있고...."
슬쩍 찔러본다.
"아니면 네가 도와주는 방법도 있을 것 같고?""
안될 걸 알면서도 워낙 절박하니 찔러 본 모양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아요."
"역시 그렇지? 소속사도 다르고...."
"그게 아니라 제가 곧 뉴욕을 떠나야 하거든요."
"응? 왜?"
"저 런던으로 전학가요."
"........"
잠시 내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던 그녀가 크게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전학?!"
"노아 촬영 일정이 잡혔는데 그게 영국이라... 아, 이거 오프 더 레코드인거 아시죠?"
"내가 바보도 아니고... 아니, 그나저나 미국 유학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전학이야?"
"그러게요. 그래서 저도 지금 주변 정리한다고 정신 하나도 없어요."
"그렇구나. 그러면 진짜 다른 일을 할 수가 없겠네."
그러더니 슬쩍 질문 내용을 바꾼다.
"그러면 전학 가서 정착 끝나면 나중에라도 도와줄 수 있어?"
"드릴 수는 있는데 좀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얼마나?"
이제부터 시작이다.
난 진지한 얼굴로 계산해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꽤 많이? 일단 같은 소속사도 아니고 협업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가장 급한 게 레이나 프로듀싱이고...."
"레이나? 너 레이나도 프로듀싱해?"
"몰랐어요? 아, 아직 외부에 공개를 안 한 건가? 아무튼 제가 레이나 다음 앨범 프로듀서예요. 이미 진행 중이고."
"아...."
"블랙 로즈에 몇 곡 더 주기로 했고, 영화 노아 OST 작업을 헨리 윌리엄스 작곡가님이랑 공동 작업하기로 했고, 엔 플라워 일본 진출 싱글도 만들어야 하고, 에버 가든 후속 싱글도 준비해야 하고...."
난 싱긋 웃으며 반문했다.
"이거 다 끝나고 여유가 생기면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기다릴 수 있겠어요?"
쉽게 말해 몇 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근데 예약을 해두셔도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일단 저는 제 아티스트 케어가 우선이라서요."
이 부분이 중요하다.
도와줄 수는 있지만 나에게는 내 아티스트가 우선이다.
돌려 말하자면.
'정말 제대로 도움을 받고 싶다면 내 아티스트가 되라는 거지.'
그래도 소소한 맛보기는 필요하겠지?
왜, 마트에서도 시식 코너 같은 게 있잖아? 미래에 OTT 서비스도 한 달, 혹은 세 달 무료 이용 후 유료 전환으로 가입자를 창출하기도 하고.
'내 아티스트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맛만 보여줘야지.'
난 침울해진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좋은 자리 소개해 줄 테니, 내일 공연 한 번 해볼래요?"
뉴욕 재즈 클럽은 아이작이, 힙합 클럽은 떠그 3인방이 꽉 잡고 있다.
거기서 뭐 절대적인 패권을 부린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업계에서 '통' 대접을 받는다는 뜻이다.
연차도 쌓였고 무엇보다도 고정 팬이 굉장히 많아 티켓 파워가 정말 어마 무시한 녀석들이거든. 이런 녀석들이니 차후 메인 스트림에 진출해서 빅 스타로 성장한 것이다.
때문에 녀석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연장 규모도 상당하다. 또한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거나, 동업 중인 곳도 상당하고.
중요한 건 바로 그 맨해튼 공연장들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다.
밑바닥에 있는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공연장도 있고, 그 바닥 최고들이 모이는 준 메이저 급 클럽들도 있다.
나야 워낙 친한 친구니까 하찮은 떠그 취급 하는 거지, 알고 보면 입지전적인 녀석들인 것이다.
제이미에게 사이먼 블랙과 잭을 소개해줬다.
"이쪽은 제이미. 한국 톱 뮤지션이고 나하고 개인적으로 친한 누나야. 누나, 이쪽은 사이먼 블랙과 레드 트라이브. 제 형제 같은 녀석들이에요."
오늘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형제 대우 해준다.
참고로 이번에는 그녀의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도 동행했다. 정식으로 소개 받아 공연을 하러 가는 자리니까.
제이미 일행은 생각이상으로 거대한 공연장 규모에 한 번 놀랐고 이어 출연진에 놀랐다.
뉴욕에서 활동했다면 이름 한 두 번은 들어봤을 유명 뮤지션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 심지어 그 중에는 메이저에서 활약하고 있는 스타급 뮤지션도 존재했다.
그리고 이곳은 흑인 음악 전용 클럽,
한 마디로 말해 신생 회사인 KM 미국 법인 따위는 발도 못 붙일 공연장이라는 거다.
"여기는 사이먼 블랙 이 친구가 소유하고 있는 곳이에요. 여기 말고 다른 곳도 많은데 오늘은 일단 여기에서 몇 곡 부르도록 하죠."
그녀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내, 내가 이런 곳에서 갑자기 공연해도 되는 거야?"
"안 될 이유가 뭐 있어요? 누나 어딜 가도 안 꿀린다니까요? 자신감 가져요."
"으응...."
안절부절못하던 그녀가 물었다.
"나 여기서 몇 곡 부르면 되는 거야?"
대답 대신 사이먼 블랙을 바라봤다.
녀석이 여기 책임자니까.
휴대폰으로 공연 일정표를 살피던 녀석이 말했다.
"편하게 네 다섯곡 정도 부르면 될 것 같군"
"그렇다네요."
"그, 그렇구나. 기회를 많이 주네."
"이번 미국 진출 곡에 더해서 함께 즐길 수 있는... 약간이라도 흑인 음악 감성이 묻어 있는 음악 위주로 선곡해보죠. MR은 다 준비되어 있죠?"
"응! 혹시 모르니까 다 챙겨왔어!"
"잘 했어요."
선곡을 도와주고, 혼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준뒤 사이먼과 잭에게 가서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우리 사이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맞아. 형제잖아!"
"암. 우리는 형제지!"
... 이 자식들.
내가 아까 형제 같은 녀석들이라고 소개했던 대목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이것으로 나는 이 떠그 라이프들과 세트 메뉴가 되어 버린 셈이다.
싱글 벙글 웃고 있던 사이먼 블랙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아, 너 혹시 베카 J라고 알고 있어?"
"어? 당연히 알지!"
베카 J는 멕시코 계 미국인으로, 비주얼과 음악성이 굉장히 훌륭해서 지금도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다 3년 후인 2017년.
가수 활동에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때 발매하게 되는 라틴 팝 뮤직이 초대박을 치고 뮤직 비디오도 30억 뷰 이상을 기록하며 특급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된다.
대중에는 라틴 팝 뮤지션으로 알려지지만, 사실 그녀는 흑인 음악 쪽으로도 조예가 깊어서 마니아들 사이에 굉장히 인정을 받았다.
사이먼 블랙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가 오늘 공연 메인이야."
"오오...!"
"나하고 굉장히 친하거든. 잠시 후 도착할 텐데 그때 소개해줄게. 너하고도 좋은 친구가 될 거야."
그 넓은 공연장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정말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하여튼 미국 공연 문화는 정말 굉장한 것 같다.
누가 엔터테인먼트 왕국 아니랄까봐.....
"제가 홍보용 사진, 영상 촬영 같은 거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마음껏 실력 보여줘요."
"응! 열심히 할게!"
"여기가 무조건 흑인 음악만 공연하는 곳은 아니라서... 처음에는 좀 낯설어 해도 비트가 워낙 익숙하니 금방 몰입하며 즐길 거예요 그러니 자신감을 갖고 무대를 찢어 버리겠다는 각오로 올라가요. 알았죠?"
그녀의 무대가 다가올 때까지, 난 옆에 붙어서 계속 자신감을 불어 넣어줬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다가왔다.
난 큰 소리로 외쳤다
"제이미 화이팅!"
"잘하고 올게!"
한국 최고의 솔로 여자 가수 제이미가 출격!
무대를 잠시 지켜보다가 관객들이 반응을 보이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심하고 자리를 떠났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특별한 만남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2층, 공연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VIP룸에 사이먼 블랙과 잭, 그리고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히스패닉 계열, 검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미녀가 있었다.
베카 J.
지금도 유명하지만 3년후 에는 훨씬 유명해질 존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사이먼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고 맨해튼 드리밍과 Don’t Touch Me! 두 곡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외모에서 풍기는 매력만큼이나, 성격도 굉장히 상큼발랄하다. 크고 맑은 눈망울이 굉장히 초롱초롱 빛나는 것 같았다.
"저 역시 당신의 팬이에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워요."
이 순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 미래의 슈퍼스타도... 내 아티스트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