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대본 리딩 >
발표회가 끝나고 승합차에 탑승하자마자 애들이 벌컥 화를 냈다.
노아... 아니 다니엘이 시작이었다.
“아니, 그 기자 대체 뭐야? 누가 봐도 인종 차별하는 거잖아? 그런데 아닌 척, 그저 원작 팬인 척 가장하고 가증스럽게...!”
“진짜 재수 없어! 그냥 척 보면 왜 이드라실로 뽑혔는지 알 수 있잖아? 민이는 누가 봐도 요정인데 말이야!”
“맞아! 민이가 아니면 누가 요정 역할을 할 수 있겠어? 아무도 못하지!”
저기, 얘들아.
나 변호하면서 화내주는 건 고마운데 요정이니 뭐니... 내가 좀 민망하거든?
올리비아 퀸 작가님도 한껏 인상을 쓴 채 한 마디 하신다.
“당시 현장에서 너무 깜짝 놀라서 아무 반박도 못한 게 화나고 억울하네. 자기가 뭐라고 원작자인 내 결정과 안목을 무시하고 말이야. 저건 팬이 아니라 단순한 악플러일 뿐이야!”
그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감독님마저도.
나는 찡한 감정에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다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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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실사화 영화 캐스팅 발표회는 큰 이슈가 되었다.
원작 소설이 세계적으로 인기가 굉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사 전문과 발표회 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자 완전 다른 이유로 들끊었다.
현장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팬의 순수성을 가장한 인종차별성 질문이 문제였다.
[ 이드라실이 왜 동양인이냐니, 그러면 반대로 묻고 싶군. 왜 백인이어야 하는데? ]
┗ 경력에 대한 질문도 웃기네. 지금 저 자리에 있는 세 명 모두 연기 경험 전무한 미성년자들이잖아?
┗ 내가 보기에는 기자도 기자 경험이 없어 보이는데....
┗ 나는 동양인도 아니고, 영국 런던 출신 백인인데 기자 질문에 굉장히 불쾌감을 느꼈어. 저건 인종차별성 발언이야.
순식간에 기자의 신상 내역이 까발려졌다.
과거에도 비슷한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전적 또한 공개됐다.
이에 해당 언론사와 기자의 공식 계정은 무차별 폭격을 당했다.
[ 인종 차별이나 하는 기자는 보고 싶지 않다. ]
[ 그 질문이 노아의 수많은 팬을 욕 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 해봤나보지? ]
[ 너 같은 건 언론인이 될 자격이 없어. ]
사실 이 같은 반발 여론이 크게 힘을 얻은 것은 질문에 대한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의 적절한 대응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자리에서 깜짝 공개한 여러 장의 컨셉 샷과 오디션 영상이 누가 봐도 훌륭했던 것이다.
[ 컨셉 샷 처음 보고 소리 질렀어. 어? 이드라실이다! 세상에, 내가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라고! ]
[ 어디서 연기자가 아니라 진짜 요정을 데려와 버렸네;; ]
[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거 맞아? 지금 오디션 영상 돌려보고 있는데... 이건 그냥 이드라실 그 자체인데? ]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이 자신 있게 공개한 이유가 있었다!
컨셉 이미지는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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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전해진 소식에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화장품 광고요?”
[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메이저 화장품 회사에서도 널 광고 모델로 쓰게 해달라고 난리 났어! ]
나에게 화장품 CF 제안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전 남잔데요?”
[ 남자는 화장 안하냐? ]
“그래도.. 보통 남자가 화장품 광고는 잘 안하지 않나요?”
[ 그렇긴 한데 이번에 공개된 컨셉 이미지 비주얼이 그만큼 충격적일 정도로 뛰어나다는 거지. ]
“.......”
[ 내가 오늘날까지 수없이 많은 미녀들을 봐왔는데....]
“아냐.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그 말 하지 말아요. 대표님 입으로 듣고 싶지 않아!”
[ 들어 인마! 네가 제일.... ]
“듣기 싫다니까요? 에붸붸뷉...!”
필사적인 저항이 효과가 있었다.
[ 됐다. 아무튼 기자회견 이후 너에 대한 관심이 장난 아니야. 인기도 굉장히 많고, 다는 아니더라도 몇 개는 촬영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제시한 조건도 굉장히 좋아. ]
“그 정도예요?”
[ 응. 그 정도야. ]
“가장 좋은 제안이 어느 정도 수준인데요?”
[ 그게.... ]
금액을 듣는 순간 고민이 사라졌다.
“진행하죠!”
[ 네가 생각해도 그래야 할 것 같지? ]
“무조건 가야죠! 앞으로 화장품도 그쪽만 써야겠다. 지금 가지고 있는 거 싹 버려야지.”
기분 좋게 전화 통화를 마치고 돌아보니 다니엘과 샬럿이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같이 연기 트레이닝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지금까지 내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지.
... 민망하네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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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 동안 휴식! 바닥에 주저앉으면 퍼져 버리니까 스트레칭하고 있어. 화장실 다녀올 사람 다녀오고!”
데뷔를 앞두고 있는 에버가든의 전용 연습실.
“으아아~ 죽을 것 같아.”
“온 몸이 갈려나가는 기분이야.”
트레이너의 외침에 반지희를 포함한 네 명의 소녀들은 비틀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연습실에 남은 단 한 명의 소녀, 주세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지?’
연습실 한쪽에 놓인 하얀색 크로스백을 열어 휴대폰을 꺼내 든다. 그리고 근래에 저장한 사진을 띄웠다.
“멋있어.”
최근 국내에서도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이드라실 컨셉 샷이었다.
몇 장 안 되는 사진을 반복해서 넘겨보는 주세아의 얼굴이 흐뭇한 미소로 가득하다.
“예뻐.”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해서 돌려본 오디션 영상도 감상한다.
아아, 치유되는 것 같....
“흐음.”
“.......!”
등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주세아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어느 새 반지희가 다가와 어깨 너머로 휴대폰을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세아의 새하얀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다.
“너 요즘 시간만 나면 그 사진이랑 영상만 보고 있더라? 왜, 아예 김민 공식 팬 카페도 가입하지 그래?”
“.......”
묘한 침묵에 반지희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가입 했어?”
“이거 고화질 버전... 팬 카페에서 받은 거야.”
“아하.”
이미 가입했구나.
친구가 보던 오디션 영상을 재생해 본 반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화질이네. 팬 카페 사람들은 이런 걸 용케도 구했다.”
“민이가 직접 올렸어.”
“지, 직접?”
“사진도 같이.”
“와, 개 진짜 웃긴다. 내가 좀 보내달라고 했을 때는 알아서 찾아보라는 식으로 말하더니.”
“........”
무심코 중얼거리던 반지희는 친구의 서늘한 눈빛에 깜짝 놀라 해명했다.
“야! 너 주려고 그랬던 거야! 내가 네 성격 뻔히 아니까. 너 그런 거 달라는 말도 잘 못하잖아!”
“........”
믿는 눈치가 아니다.
오히려 더 의심이 짙어지는 게 보인다.
“이게 의심할 걸 해야지... 야! 내가 톡 보여줄까? 어?”
결국 채팅 내역까지 확인해 준 뒤에야 결백을 증명할 수 있었다.
“미안. 그리고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그건 됐고.”
반지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레 속삭인다.
“너 김민이 그렇게 좋으면 고백해버려.”
“.......!”
또 다시 화들짝 놀라는 주세아.
마치 금기어를 듣기라도 한 듣한 모습이다.
“으이그, 이 답답아. 너 그러다가 빼앗긴다.”
“... 누구한테?”
“누구긴, 샬럿 왓슨! 김민이랑 같이 영화 출연하는 여자애!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만.”
“......!”
순간 주세아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린다.
“치, 친구... 아닐까?”
“지금은 그렇겠지.”
“지금은...?”
“내가 보기에는 그 샬럿 왓슨이라는 애가 김민 좋아해. 백퍼센트!”이제는 입술까지 파르르 떨린다.
거기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다.
“현 상황에서는 그 불여시가 너의 가장 큰 경쟁자고....”
“........?”
“엔 플라워 주아 언니도 요주의 인물이야.”
“주아 언니?”
“그 언니, 요 근래 인터뷰 때 민이에 대해 하는 이야기 들으니까 뭔가 심상치 않아. 자꾸 나이를 떠나 존경한다느니, 오빠처럼 의지가 된다느니... 자꾸 수상쩍은 워딩을 날리잖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다.
“제이미 언니도 경계할 필요가 있어. 얼마 전에 한국 돌아왔다기에 만나서 식사 한 번 했는데... 어우, 그 언니도 너랑 똑같아.”
“나?”
“너처럼 민이에게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주세아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막강한 경쟁자가 너무 많지 않나?
“그래도 기회는 있어.”
어느 새 연습실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휴식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데뷔 쇼케이스 때 와준다고 했거든?”
“저, 정말?”
“응. 그때 기회를 잡아서 덮... 아니아니, 고백해 버려!”
귓불이 붉어진다.
“더 크기 전에 잡아야 해. 이번이 아니면 기회 없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그때 트레이너의 외침이 들려온다.
“연습 시작하자!”
혼자 결의를 다지는 친구의 모습에 반지희는 혀를 찼다.
“저러고 또 아무 말도 못하고 끝나겠지. 미래가 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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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너 한국에 오면 시간 좀 내줘. 우리 다 같이 놀러 가자! ]
반지희의 메시지였다.
놀러가자고?
[ 좋지. 어디로 갈까? ]
한참 문자를 주고받는데 땀에 푹 젖은 샬럿이 와서 생수병을 건넨다.
“고마워.”
“누구하고 그렇게 즐겁게 대화하는 거야?”
“아, 친구들. 내가 일전에 영상 보여줬지? 문 라이트라고....”
“아, 기억난다.”
“그 친구들 몇 명이 같은 소속사에서 데뷔하거든. 그때 쇼케이스에 방문할 예정인데 같이 놀러 가자고 해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샬럿이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한다.
“나도 데려가.”
“응? 뭐라고?”
“나도 한국 가고 싶어. 네 친구들도 만나보고 싶어. 관광도 하고 싶어.”
가, 갑자기?
샬럿은 다니엘까지 끌어들였다.
“다니엘 잠깐 이리 와봐!”
“무슨 일인데?”
샬럿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다니엘은 그 특유의 모험심을 발사한다.
“나도 갈래! 한국도 궁금하고 민이 친구들도 보고 싶어.”
다니엘은 거절할 수 없는, 굉장히 순수하고 해맑은 미소로 말했다.
“왜냐면 민이 친구는 우리 친구잖아! 나도 같이 가자! 응?”
“그, 그래 뭐....”
딱히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같이 한국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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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잭슨 스튜디오에 수많은 이들이 집결해 있었다.
노아 1편 출연진 전원과 스텝들이었다.
감독님이 주위를 둘러보며 묻는다.
“혹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교장 선생님 아직 안 오셨습니다! 병원 다녀오느라 조금 늦으셨다고 하네요.”
아카데미 교장 역할의 명배우, 이안 코너를 말하는 것이다.
모두가 깜짝 놀라는 가운데, 감독님이 우려를 담아 캐스팅 매니저에게 물었다.
“병원이라니... 어디 아프신 겁니까?”
“근래에 기침이 잦아지셨는데 오늘 아침에 특히 더 심하게 하셔서 급히 병원으로 모셨답니다.”
“아니, 진작 모시지 않고....”
“아시다시피 번거로운 걸 워낙 싫어하셔서... 아, 저기 오시네요!”
잠시 후, 하얗게 샌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말쑥한 정장한 차려 입은 노년의 신사가 등장했다.
모두가 존경을 담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은 전설의 명배우, 이언 코너 경의 등장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며 묻는다.
“지금 다들 일어서서 뭐하는 거야? 부담스럽게 이러지 말고 어서 자리에 앉아!”
그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한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난 그저 한 명의 배우일 뿐이야. 특별 취급 같은 거 하지 마. 알겠어?”
“네!”
사람들은 그러겠노라, 굉장히 예를 담아 대답했다.
... 내가 보기에는 불가능한 요구다.
영화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는 걸 어쩌라고?
“에잉.”
그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혀를 차며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둘러보다가 우리를 보고 눈빛을 반짝인다.
그리고 정감을 담아 말을 건넨다.
“우리 주연 배우들이 여기 있었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침에 물을 마시다가 사례가 들려서 기침을 좀 했더니 아들 녀석이 질겁해서 날 병원으로 끌고 가지 뭔가?”
슬쩍, 한편에 선 그의 장남을 바라본다.
얼굴에 민망한 기색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별 탈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내가 알기로도 이안 코너 경은 시리즈가 끝난 이후로도 건강하게 활동하며 노익장을 과시하니까.
“이제 모두 모인 것 같으니 대본 리딩을 시작하겠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내 인생의 대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