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숙련된 조교 앞으로! >
노아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법적 보호자인 톰슨 부부의 설명에 따르면 근처 공원에 산책 나갔다가, 버려져 울고 있는 것을 주워와 키웠다고 했다.
하지만 하워드 톰슨이 심장마비로 급사하고, 양모 필리아 톰슨이 새 남자와 결혼했는데 이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며 불행이 시작됐다.
항상 눈치를 봐야 했고, 허드렛일은 모두 노아의 몫이었다. 찢어진 옷을 입고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니 학교 친구들도 노아를 기피했다.
노아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거울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
그곳은 바로 기사와 마법사.
요정과 드래곤 등, 온갖 전설과 신화가 살아 숨 쉬는 신비의 대륙 엘로아였다.
들어갈 수도, 만질 수도 없고 세상에서 오로지 노아만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노아는 거울 속 세계를 사랑한다.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신나고 재미난 모험이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보며 크게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쓸쓸히 맞는 열 네 살 생일 때 노아는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토록 동경하던 엘로아 세상 속에 떨어진 것이다.
울창한 원시림 한복판에서 노아는 중얼거린다.
“이곳이... 실존하는 곳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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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연기가 이어지는 동안 여기저기서 불편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온다.
옆자리의 배우가 중얼거린다.
“우리 주인공의 연기 실력이 많이 떨어지는 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번이 첫 연기 도전 아닌가?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기본기가 여러모로 딸리는 건 사실이다.
분명히 말하자면, 다니엘과 샬럿은 연기자로서의 자질은 많이 떨어지는 타입들이다.
이 문제 때문에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혹평을 들어야 했지.
“크흠.”
“흐음....”
불편한 헛기침과 신음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도 다니엘은 흔들림 없이 대본 리딩을 진행 중이다. 다니엘의 정신력이 굳건한 덕분일까?
천만에!
내가 사전에 정신 교육을 단단히 시킨 덕이다.
분명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이야기를 해줬거든.
그래도 비판만 가득한 건 아니다.
“몰입력은 좋군요.”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노아하고 비슷한 것 같던데....”
“첫 연기 도전이라는 걸 감안하면... 아직은 지켜볼 가치가 있는 듯 보여요.”
배우들의 소곤거림을 들으며 씩 웃는다.
훈련 기간 동안 내가 애들을 케어했다고 했지?
내가 단순히 멘탈 무너진 애들을 다독이기만 한 게 아니다
두 친구에게 한 가지를 강조했다.
일상에서조차도 캐릭터 그 자체가 되라는 것.
흔히 메소드라 불리는 기법이다.
비판이 많은 연기법이고 문제점도 많지만 당장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한 최선의 수였다.
감독님과 트레이너 분들도 동의했다.
물론 메소드조차도 아직은 완벽하지 않지만....
“인간! 어떻게 우리의 숲에 들어온 거지?”
“누, 누, 누구세요?”
“우리는 이 요정의 숲을 수호하는 하이엘프 정찰대다. 이제 네 정체를 밝혀라. 넌 누구고, 혼자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지?”
“하이엘프 정찰대... 전투 장면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정말 굉장해! 멋지다!”
본인의 성격이 노아와 비슷한 부분이 많은 덕분에 캐릭터 표현만큼은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칭찬을 받는 포인트는 또 하나 있다.
“대본을 통째로 외웠군.”
“준비를 나름 많이 한 모양이야.”
우리 세 사람은 대본 전체를 달달 외워 버렸다.
사소한 지문까지도.
대본을 보고 하는 건 몰입에 방해가 될 뿐이라는 생각에 내가 요구한 내용이었다.
덕분에 우리 세 사람만큼은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며 보다 연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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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아, 요정의 숲에 떨어진 노아는 무단침입으로 오해 받아 요정의 마을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침내 평생의 친구가 될 사람과 만나게 된다.
“우와. 나 인간 처음 봐! 귀가 둥글둥글하네. 얼굴에 쓴 건 뭐야? 옷도 특이하다!”
이드라실.
“나쁜 아이가 아니에요. 착한 아이니까 이거 풀어줘요.”
부족 내에서 이드라실의 위치는 특별하다.
요정들이 신처럼 섬기는 존재.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축복을 받은 유일한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그 축복으로 얻은 능력들 중 하나가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노아가 어째서 금지인 요정의 숲 한복판에 있었는지.
보통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했을 이야기들을 이드라실은 모두 믿어줬다.
요정들의 사과와 정중한 대접을 받은 그 날 밤.
놀라운 일이 펼쳐진다.
[ 지구의 아이 노아. 이드라실과 함께 나에게 오렴. ]
요정의 숲이 발칵 뒤집힌다.
마침내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깨어난 것이다.
숲의 모든 요정들이 세계수 앞에 집결했다.
노아와 이드라실.
부름을 받은 두 아이가 앞으로 나가자 세계수가 말한다.
[ 실리아와 바로스의 아들 노아. 아주 잘 자라줘서 고맙구나. 내가 계속 너를 지켜보고 있었단다. ]
내가 누구 아들이라고?
[ 너에게 그 동안 축적한 힘을 모아 축복을 내려줄 것이니, 이드라실과 함께 대마법사 아롤을 찾아가도록 하거라. 그는 왕국연합 수도 켈드리온 아카데미에 있단다. ]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인다.
[ 그가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다. 너의 운명까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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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두 시간 넘게 이어졌던 대본 리딩이 마침내 끝났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느낌이 상당히 나쁘지 않군요!”
아무래도 다니앨과 샬럿은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을 받은 모양이다. 처음에는 언짢아 보였던 시선들이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졌다. 두 사람이 확실히 캐릭터에 몰입해서 열정적인 연기를 펼친 덕분이다.
대사 실수 한 번 없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다니엘과 샬럿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어깨를 짚는다.
“자네, 연기 경력이 있었나?”
“.......!”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이안 코너 경이었기 때문에!
나는 사성장군을 대하는 이등병의 심정으로 뻣뻣하게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저도 이번이 첫 연기입니다.”
“긴장할 필요 없네. 난 인종차별을 하지 않고 경력이 좀 된다고 꼰대 짓도 하지 않아.”
“네. 하하....”
아마도 전자는 캐스팅 발표회 때의 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로하는 것일 터였다.
주름진 얼굴에 가득한 자애로운 미소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진다.
“좀 앉지.”
“네.”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대화가 이뤄졌다.
“원래 뮤지션이라지?”
“네. 한국에서 데뷔했어요.”
“맞아. 나도 그렇게 들었어. 참고로 자네가 출연한 뮤직 비디오도 봤다네.”
“어, 정말요?”
“잭슨 감독이 보여주더군. 어째서 자네를 이드라실 배역에 뽑았는지 바로 납득했어. 자유롭고, 순수하고, 몹시 해맑아 보이더군. 외모도 아주 훌륭했고.”
“가,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안 코너 경에게 칭찬을 들으니... 굉장히 기쁘면서도 민망함이 밀려온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네, 연기에 소질이 있어.”
“저, 정말입니까?”
“저 두 친구는 피나는 노력과 오랜 경험이 필요할 것 같지만... 자네는 조금 달라 자신의. 캐릭터뿐만 아니라 상황 자체를 그려서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군. 보는 관점부터가 다르다는 이야기지.”
“제가요?”
“보통 제작자 마인드가 강한 연기자들이 그런 재주를 가지고 있더군.”
그 말을 듣고 불현 듯 떠오르는 것이 있다.
이드라실 배역에 발탁되고 이전 삶에서 보았던 소설과 영화를 제작자 마인드로 분해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내가 출연할 영화고, 가능하면 더 좋게 발전시키고픈 욕심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더해서.
잭슨 감독님과 함께 지내고 훈련을 받으며 그런 기질이 더더욱 강해졌다. 우리는 수시로 작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아마 이런 부분 때문에....’
이안 코너 경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주신다.
“거기서 만족하지 말고 더 열심히 노력하게.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서 물어보고.”
설마... 이안 코너 경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인가?
그렇다면 놓칠 수 없지!
대본 리딩은 끝났지만 아직 모든 행사가 완료된 건 아니다.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다 같이 점검해보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를 테면 주요 장면의 액션 연출 같은 것.
직접 합을 맞춰 보기도 하고, 집단전 같은 경우에는 완성된 스토리 보드를 공유하며 어떤 식으로 연출이 진행될 것인지 설명을 듣기도 한다.
물론 현 시점에서 배우들이 직접 액션 연출 합을 보여주는 일은 없다.
보여주는 것은....
“자, 그러면 어떤 식으로 합이 진행될 예정인지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숙달된 조교의 역할이지.
내가 스턴트 연기자들과 함께 앞으로 나서자 웅성임이 커진다.
안전을 위한 보호 장구를 갖춰 입은 뒤 레이피어를 들었다.
내가 스턴트 연기자들과 함께 시범 조교로 나선 이유?
지극히 간단하다.
내가 액션 연기를 스턴트 연기자 수준으로 잘하기 때문이다. 한 번 본 동작은 완벽히 카피할 수 있는 재능의 덕을 봤다.
작중 모든 장면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력이 내가 월등히 뛰어났다.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합을 맞춰 테스트 영상도 찍다보니 인정받아 함께 하게 된 거다.
액션 노하우 배우겠다고 이것저것 맛있는 것을 많이 사주기도 했고....
의문스런 시선이 쏟아진다.
설마 내가 시범 조교로 나설 줄은 몰랐기 때문이겠지.
잠시 후 사람들의 시선이 경악으로 바뀌게 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짜릿해진다.
잭슨 감독님이 날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신다.
“가장 먼저 보여드릴 장면은 노아가 처음 요정의 숲에 떨어졌을 때, 괴수와 하이엘프들의 집투 씬입니다.”
숲에 떨어진 노아.
신기함도 잠시, 곧 나타난 거대한 늑대형 괴수로부터 위협을 당하게 된다. 그때 하이엘프들이 나타나 괴수를 물리치고 노아를 포위하고 심문하기까지의 장면이다.
스토리 보드에 명시된 연출 흐름에 맞춰 컷 별로 액션을 보여줄 예정이다.
잠시 후 한 스턴트 연기자가 크로마키 더미를 꽂은 장대를 들고 나타난다.
잭슨 감독님이 부연설명을 했다.
“저 크로마키 더미가 바로 극 초반에 등장할 늑대형 괴수의 얼굴 높이입니다.”
그리고 나를 본다.
시작하라는 끗이다.
내가 레이피어를 높이 뽑아들며 소리쳤다.
“전투 준비!”
촤차차창!
금속 마찰음과 함께 은빛의 레이피어가 뽑혀져 나온다.
물론 모두가 레이피어를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화살을 사용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크아아아앙!”
늑대 연기자의 우렁찬 포효가 신호탄이었다.
화살 부대가 빠르게 주위를 맴돌며 화살을 쏘아 보낸다.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때 발생한 틈을 노리고 나를 비롯한 원거리 팀이 현란한 몸놀림과 검술로 치명상을 입힌다.
오늘을 위해 열심히 합을 맞춰 왔기에 우리들의 호흡이 굉장히 잘 맞았다.
덕분에 평상시에는 실패가 잦았던, 재주넘기를 활용한 일격들도 멋지게 성공시켰다.
[ 크르르... ! ]
이제 마지막 최후의 일격만이 남았다.
나는 두 명의 스턴드 연기자들이 포갠 두 손을 딛고 허공에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크로마키 더미를 향해 힘껏 레이피어를 내질렀다.
극중에서는 오른 눈에 해당하는 부위를 깊숙이 관통하는 장면이다.
검을 찔러 넣은 채 가볍게 착지!
이로서 첫 레이드 씬은 멋지게 마무리 되었다.
“........”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