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격려하다 >
애들을 데리고 청담동 아파트로 도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 둘을 덩그러니 호텔에 던져 놓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아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밥부터 먹자! 네 엄마가 잔뜩 차려놨어!”
엄마와 아빠가 따뜻하게 맞아주신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다니엘과 샬럿의 첫 한국말!
두 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머나. 한국말 잘하네! 호호호!”
“잘 왔어!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푹 쉬어!”
두 분 텐션이 굉장히 높다.
해외에 홀로 거주하던 아들이 모처럼 집에 돌아왔기 때문이리라.
첫 식사를 시작했다.
“어이구, 잘들 먹네?”
“그러게. 내심 걱정 했는데....”
부모님은 애들에게 모든 신경이 가 있었다.
영국 애들이 한식 잘 먹는 광경이 신기하고 놀라워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예들이 아마 어지간한 한국인들보다 한식 더 많이 먹어봤을 거예요. 제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많이 먹였거든요.”
“그랬어? 잘 했네!”
“어쩐지, 그래서 젓가락질도 어색함 없이 잘 했구나.”
요리사인 어머니는 그저 뿌듯해할 뿐이지만, 아버지의 시선이 특히 심상치 않다.
김치찌개와 계란말이, 콩자반을 야무지게 잘 집어 먹는 샬럿을 굉장히 뿌듯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식사를 마친 뒤 다니엘, 샬럿과 함께 분배해서 설거지를 하는 와중.
“난 저 아이 마음에 든다.”
아버지가 와서 귓가에 속삭이신다.
“.......?”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니.
“며느리 감으로 좋다는 말이야.”
“... 그런 거 아녜요.”
“자식아. 그런 거 아니라면 멀쩡히 잘 사는 영국 애가 널 따라서 한국까지 왔을까?”
“친한 친구가 어디서 어떻게 자랐는지 궁금해 할 수도 있죠! 저도 애들 사는 집 다 가보고 그랬어요.”
“남자라면 몰라도 여자들은 겨우 그런 이유로 이성... 심지어 머나먼 타국까지 쫓아오지는 않는단다. 이 어린것아.”
“아빠가 여자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까다로운 네 엄마 결국 꼬신 거 보면 모르겠냐? 이 아빠가 여자에는 도통한 사람이야! 내 말이 틀림없어!”
아빠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고 떠나셨다.
“아무튼 아빠는 응원할 테니까 이 기회에 잘 해봐. 너무 늦으면 안 돼. 이성 관계라는 게 오래 유지될수록 서로에게 점점 무덤덤해지는 법이거든.”
“.......”
흘끔 샬럿을 바라본다.
지금도 바비 인형처럼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성인 이후부터는 정변의 아이콘이 되어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게 된다.
이전 생에서 괜히 내게 열병을 심어줬던 것이 아니다.
... 아씨, 아빠는 괜한 소리해서 쓸데없이 의식하게 만들고 말이야.
설거지를 마친 뒤 타타임을 가졌다.
나는 아이들과 있었던 일들을 위주로 털어놨는데, 엄마는 그것보다는 미국 생활을 더 궁금해 하셨다.
“가끔 기사 뜨는 거 보니까 범상치 않게 생긴 흑인 친구들하고 많이 친해진 모양이더라.”
“어쩌다 보니....”
“뉴욕 이야기는 잘 해주지도 않고... 설마 그 친구들에게 이상한 물이 들어서 온 건 아니지?”
그게 무슨 물인데요 엄마?
걱정이 태산인 엄마와 달리 아빠는 지극히 정상적이셨다.
“에이, 무슨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 그거 인종 차별이야! 한국인이라고 다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잖아?”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이른 새벽 시간이었다.
다니엘과 샬럿을 깨워서 근처 공원에서 조깅과 스트레칭을 마치고 돌아와 샤워와 식사를 했다.
“나도 가고 싶은데....”
서연이 어린이가 투덜거린다.
“나도 놀이공원 가고 싶은데....”
“넌 학교에서 놀아야지.”
오리 주둥이가 됐다.
아무래도 다니엘, 샬럿과 함께 어울리고 싶었던 모양.
그래도 참 기특하다 싶었던 게 뭐냐면....
“놀이공원에서 잘 놀다와. 나 선물도 사오고. 알았지?”
애가 어설프게나마 영어로 의사표현을 하더라.
다니엘과 샬럿이 놀랐는데, 엄마가 굉장히 뿌듯해하며 딸 자랑을 했다.
“확실히 서연이가 날 닮아서 머리가 좋더라고.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영어 과외 선생님이 천재적이라고 칭찬을 많이 하더라니까?”
서연이 머리 좋은 거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서연이는 기세등등했다.
“조금만 있어봐. 내가 오빠보다 영어 더 잘하게 될 테니까!”
내 동생이 너무나도 기특해서 지갑에서 용돈을 꺼내 찔러 줬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 잘하고 있어.”
“........”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오빠가 자상한 척 하는 게 징그럽고 재수 없어서.”
“.........”
그래. 우리는 사이좋은 남매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구나.
통통한 볼따구를 냅다 꼬집어 버린 뒤 소리쳤다.
“다녀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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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우리끼리만 놀러 다니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회사에서 사람을 붙여줬다.
최명규 씨.
바로 내 한국 매니저님이시다.
승합차에 탑승하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번거롭게....”
“번거롭지 않아요. 이게 제 일이잖아요.”
듬직하게 미소 짓는 매니저의 모습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오늘 잘 부탁해요!”
약속 장소로 이동해서
문 라이트 일곱 명 전원을 태웠다.
11인승 승합차가 가득 찼다.
“어머나, 어머나! 어머나!!”
“꺅! 정말 소설 찢고 나온 것 같아!”
“나 진짜 노아 팬인데... 영화 기대 많이 하고 있어요!”
역시 텐션 하나는 어마어마한 애들이다.
그런데 심지어 영어까지 잘한다!
반지희가 으스댄다.
“우리 영어 유치원 출신이야!”
부잣집의 상징이라는 바로 그 영어 유치원?!
“어, 난 아니야.”
아까부터 미러리스 카메라를 부착한 짐벌을 들고 있던 백미진이 손을 들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미드하고 영드 보다가 영어 터득했어. 특히 닥터 후하고 셜록 보면서 영국식 영어 진짜 많이 배웠는데....”
순간 다니앨과 샬럿이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닥터 후?”
“셜록 봤어? 나 그 드라마 정말 좋아하는데...!”
갑자기 드라마를 주제로 수다에 불이 붙어 버렸다.
다들 한 마디씩 하려고 목소리를 높이니 차안이 굉장히 소란스럽다. 샬럿과 다니엘도 애들 텐션에 말려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떠들어대고 있었다. 심지어 주세아까지도.
나는 조용히 액션 캠으로 촬영 중인 명중이를 보며 말했다.
“네가 고생이 많다.”
“평상시에는 조금 힘들었는데 오늘은 괜찮아.”
“왜?”
“분량이 많이 나오고 있어.”
이 자식... 뮤튜버 다 됐구나.
여자애들은 드라마 이야기.
나와 명중이는 뮤튜브 채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놀이공원에 도착했다!
“우와아!”
“여기 진짜 오랜만이다!”
“꺄아아악!”
애들 텐션이 우주까지 치솟았다.
난 더 이상 감당 못하겠어.
도망가고 싶어.
여기서부터는 거대한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릴 뿐이었다.
“기프트 샵 까지 머리띠부터 사자!”
“소프트 아이스크림도 먹자!”
“여기 중국집이 진짜 전망도 좋고 맛도 좋아! 거기서 이것저것 잔뜩 시켜서 점심 먹어야 돼!”
“다 시끄럽고 T 익스프레스부터 탈거야!”
문 라이트 애들이 다니엘과 샬럿을 참 잘도 챙겨줬다.
머리띠를 사서 직접 씌워주기도 하고, 먹을 거 사면 제일 먼저 주고.
그 외에 사진 촬영을 하거나 놀이 기구를 타러 가면 양 쪽에서 손을 꼭 붙잡은 채 쉴 세 없이 수다도 떨었다.
덕분에 다니엘과 샬럿도 굉장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문제는....
“너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난 신경 쓰지 마.”
촬영 감독에 빙의한 최명중.
백미진이 들고 있던 짐벌과 카메라를 받아서 구도까지 잡으며 촬영에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힘드시죠? 애들이 워낙 기운이 넘쳐서....”
“힘들긴요. 보기 좋네요.”
“다크 써클 내려왔는데요?”
“........”
최명규 매니저님.
처음에 그렇게 활기 넘치던 분이 지금은....
사실 애들의 비글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 김민!”
“노아 주역들도 있어!”
“저기 저 여자애들, 텐 믹스에 나왔던 주세아, 반지희 맞지?”
슬슬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며 테마파크에 사람이 많아졌는데, 우리를 알아보고 몰려든 이들을 제지하고, 경계하느라 그런 것이다.
매니저님의 배려로 우리는 쾌적하게 즐길 수 있었다.
“괜찮아요. 전 아무렇지 않아요.”
“........”
정작 당사자는 실시간으로 피가 마르고 있는 듯 보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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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은 몰랐지만, 최명규 외에 피가 마르는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
바로 주세아와 반지희였다.
‘어쩌지?’
‘몰라!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야!’
반지희의 계획은 단순했다.
자신이 판을 깔아주면 주세아가 고백한다!
‘그런데 우리 곧 데뷔하는데... 이래도 되는 거야?’
‘싫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렇게 손 놓고 있으면 김민은 샬럿인가 하는 예쁘장한 영국 애랑 사귀겠지 뭐.’
‘........’
‘되게 예쁘더라. 눈동자도 크고 비율도 좋고... 둘이 사귀면 완전 선남선녀가 따로 없겠....’
‘그냥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그게 좋을 것 같지?’
그렇게 시작된 고백 작전!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아!’
사실 사람 많은 것 정도야 큰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 부분을 이용하면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니까.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은....
‘샬럿 쟤, 보통이 아니야.’
어느 새 분위기를 리드하고 있는 사람은 문 라이트 리더인 자신이 아닌 바로 저 샬럿!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친구들을 꼬드기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고, 김민을 계속 자신의 옆에 두고, 본인을 챙기도록 만드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자신은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태연하게 해내는 모습에 반지희는 전율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보통이 아니야!’
갑자기 김민의 한국행에 따라나선 이유를 알 것 같다.
‘김민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따라 나선 거야!’
이런 상황에, 과연 주세아를 위한 찬스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결론은 금방 나왔다.
‘망했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놀자!’
그 순간.
반지희는 모든 고민과 번뇌를 단번에 털어 버리고 무리에 껴서 수다를 떨었다.
홀로 남겨진 주세아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기회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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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주세아의 표정이 어두웠다.
설마 내일 쇼케이스 때문에 부담이 돼서 그런 건가?
긴장을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내일 데뷔 쇼케이스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
“.......!”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땡그래 진다.
혼자 상념에 잠겨 있다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귀여웠다.
“음, 그러고 보니 살이 좀 빠졌네?”
“과, 관리 중이라서....”
“그렇구나. 그런데 무리하지는 마. 너는 다른 애들처럼 다이어트에 목을 맬 필요가 없어.”
“...왜?”
“네 비주얼의 최대 강점이 비현실적인 AI 미모와 빼어난 볼륨감이거든.”
새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그거 알아?”
“.......?”
“나 텐 믹스 보면서 네 팬 됐어.”
“저, 정말?”
“응! 그리고 그 프로그램 보면서 다시 한 번 확신했어.”
난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한 눈 팔지 않고, 지금처럼 최선을 다하면 넌 누구보다도 빠른 시일 내에 대한민국 최고의 아이돌 가수가 될 거라고.”
“......!”
주세아의 크고 맑은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린다.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 넌 내가 발굴한 최고의 인재야.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도 통하는 최고의 인재.”
“........”
“내가 장담할게.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오늘만큼은 편히 웃고 즐기자. 응?”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감이 가득했던 주세아의 눈빛에 맑은 기운이 돌아왔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