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에버가든의 데뷔 >
오후 네 시, 놀이공원을 떠나 명동으로 이동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 보이네.’
표정 변화는 없지만 친한 친구이기에 알 수 있는 감정 변화가 느껴졌다. 반지희가 속삭이듯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주세아는 물어봐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내 팬이라고 했어.”
“누가. 민이가?”
“최선을 다하면 누구보다도 빠른 시일 내에 대한민국 최고의 아이돌이 될 거래. 그러니까 당분간은 한 눈 팔지 않을 거야.”
‘아항.’
반지희는 전후 사정을 모두 파악했다.
‘하여튼 요물이라니까.’
사람 마음 휘두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
“그래서, 당분간 고백은 포기할 거야?”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러면 그 때가 언제인데?”
세계에서도 통할 아이돌이 되었을 때?
잠시 고민해보던 주세아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아니야.”
묘한 확신에 반지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그래도 친구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참 다행이다.
반지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미소 지었다.
명동을 지나 인사동 거리를 함께 구경한 뒤 유명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질린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는 가운데 반지희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이렇게 유명했던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쫓아오지?”
“우리가 아니라 저 세 명이 유명한 거지.”
최명중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직접 메뉴 주문을 받으러 온 음식점 주인에게 사인과 사진 촬영을 해주는 노아 삼총사가 보인다. 그러고 보니 한쪽 벽에 샐럽과 함께 촬영한 사진과 사인 액자가 가득했다.
반지희가 중얼거렸다.
“부럽다. 우리는 과연 언제쯤 되어야....”
그런데 팬 서비스를 해 준 김민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아닌가?
“저 친구들 모르세요? 텐 믹스에 출연해서 JJ 엔터테인먼트 신인 걸그룹에 발탁된 인재들인데.”
“오, 그래요? JJ 엔터테인먼트라면 가수 장진영 씨가 운영하는 대형 회사 아닌가?”
“맞아요. 에버가든이라는 팀인데 분명히 성공할 거예요. 아, 저기 저 친구들도 굉장히 유망한 인재고 크게 성공할 친구들이니 미리 사인 받아두는 게 좋을 거예요.”
“아이고, 특급 정보네! 좋은 거 알려주셨으니 계란찜하고 김치찌개 서비스로 드릴게요!”
“오, 정말요? 하하! 감사합니다. 앞으로 여기 친구들 데리고 자주 올게요!”
부러움만 가득하던 일행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잠시 후.
맛있는 음식이 식탁을 가득 채운 것보다 자신들의 사진과 사인 액자가 벽면을 장식한 모습에 일행은 굉장히 뿌듯해했다.
@
저런 거 가지고 좋아하기는.
음식점 벽에 자기 사인과 사진이 장식된 게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일까?
나는 잘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모습들을 보니 내 자신의 순발력에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 삼인방이 팬 서비스 해주는 광경을 어찌나 부러워하며 쳐다보던지....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어느 새 하늘이 어둑해져 있었다.
“자, 이제 남산으로 갑시다!”
오늘 관광의 데미는 바로 남산!
가서 아이스크림, 츄러스를 사서 서울 야경을 감상하며 먹는 것도 하나의 묘미였다.
이전 삶에서 아이돌 활동에 실패하고 여행에 취미를 막 붙이기 시작할 무렵 자주 찾던 장소였다.
이번 생에서는 첫 방문이라 반가움과 기대감에 마음에 설렌다.
“우와아!”
“서울 야경이 이렇게 멋있었어?”
“그러고 보니 나 서울 출신이면서도 남산은 처음이야.”
“나도!”
다들 굉장히 좋아한다.
다니엘과 샬럿도 함께 섞여서 사진을 찍고 간식을 먹으며 즐기고 있었다.
우리를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소수였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외국 관광객이 많았고 한국 사람들도 멀리서 사진을 촬영할 뿐, 각자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느긋하게 야경을 즐기는데 옆에 다가온 샬럿이 묻는다.
“너 혹시 저기서 좋아하는 애 있어?”
“.......?”
얘는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걸까?
“직접 보니까 영상보다 더 예쁘고 매력 있더라. 특히 저 애.”
친구들과 컨셉 사진을 촬영 중인 주세아를 가리킨다.
“나 직접 보고 깜짝 놀랐어.”
“왜?”
“아, 이렇게 예쁜 애가 세상이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
순간 샬럿의 눈동자에 시샘이 스친다.
“심지어 볼륨감도 좋잖아. 이런 거 보면 신이 참 불공평한 것 같아.”
“.......”
순간 말문이 막혀서 슬그머니 다른 곳을 쳐다본다.
샬럿이 가늘게 뜬 눈동자로 날 채근한다.
“솔직히 말해. 너 쟤 좋아하지?”
“아냐.”
“정말? 내가 보기에는 저 애를 유난히 잘 챙겨주는 것 같던데...그건 내 착각일까?”
“쟤들은 널 그렇게 보지 않을까?”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던 샬럿이 깜짝 놀랄 소리를 한다.
“설마... 날 좋아하는 거야?”
“......!”
배시시 웃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저, 저 요망한...!
그제야 놀림을 당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콕 찔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좀 마.”
“꺅!”
짧은 비명과 함께 몸을 비틀며 무너지는 샬럿.
“얘들아!”
순간 이목이 집중된다.
난 샬럿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끼리만 놀지 말고 얘도 좀 끼워줘.”
반지희와 주세아가 다가와 샬럿을 압송해간다.
“어? 자, 잠깐만...!”
샬럿은 바동대지만 두 사람의 협공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끼 부린다니까.”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지?
@
마침내 에버가든의 데뷔 쇼케이스 날이 다가왔다.
현장에서 에버가든 멤버들의 부모님들과 만날 수 있었다.
자식들의 데뷔에 굉장히 들뜬 모습들이다.
이미 몇 번 만나서 모임도 가졌다는 모양이다.
“아이고, 우리 프로듀서님이시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사실 반지희와 주세아 부모님께 제대로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때가 맞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에버가든의 데뷔 프로듀서인데, 개인 친분을 내세워 편애하는 분위기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에게 인사를 드린 뒤 조금 떨어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
쇼케이스가 시작됐다.
시원하고 사랑스러운 마린 룩으로 개성을 뽐내는 다섯 명의 미소녀들
3대 기획사 중 하나로 꼽히는 JJ 엔터테인먼트의 신인답게, 하나 같이 비주얼이 훌륭하다.
주세아는 역시나 군계일학이었다.
멤버 중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때 터져 나온 함성은 정말이지 차원이 달랐다.
당당하게 객석을 둘러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주세아의 시대가 시작되는 구나.
... 라고.
초반에는 텐 믹스 서바이벌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때 선보였던 무대라던가, 그때 느꼈던 감정 같은 것들.
사회자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유명한 개그우먼 출신 MC였는데, 주세아와 반지희 화제성을 살리 되, 다른 세 명의 멤버들의 분량도 공평하게 챙겨줬다.
대본에 쓰여 있는 대로만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방송을 깊이 보고 연구한 뒤 이 자리에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야기도 나왔다.
[ 같은 소속사 선배 뮤지션이자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김민 씨의 곡으로 데뷔하게 되었는데,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
[ 꿈만 같았죠! ]
[ 사실 내심 기대하고 있긴 했는데 막상 현실로 닥치니 크게 놀랐어요. ]
[ 정말 좋았어요! 제가 김민 선배님 광팬이거든요! ]
이건 나하고 깊은 인연이 아직 없는 세 멤버의 대답.
[ 저 역시 정말 놀랍고 기뻤어요. ]
[ 저도 마찬가지예요. ]
주세아와 반지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대답으로 유야무야 넘어가려고 했지만....
[ 어? 제가 알기로 두 분은 데뷔곡 <블루 웨이브>와 남다른 인연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
진행자가 가만 놔두지 않았다.
원하는 대답이 따로 있었던 모양.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주세아를 대신해 반지희가 나섰다.
[ 사실 저하고 세아는 연습생으로 입사하기 이전부터 이 곡을 알고 있었어요. ]
[ 어떻게 된 거죠? ]
[ 이 곡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가이드를 우리가 했거든요. 그것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서 연습생으로 입사하게 된 것이기도 해요. ]
난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감탄했다.
참 현명한 대답이 아닌가?
이렇게 하면 이 자리에서 불필요한 문 라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필요가 없어진다.
[ 이제 블루 웨이브를 포함해서 오리지널 싱글을 선보여야 하는데, 곡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
반지희가 마이크를 주세아가 아닌 다른 멤버에게 넘겼다. 토크 분량이 유난히 적었던 멤버였는데 이 역시 좋은 배려였다.
[ 제가 존경하는 김민 선배님이 만든 곡이예요. ]
[ 팝. 락. 디스코 등,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는 팝 댄스 음악이에요. ]
[ 시원한 여름, 연인과 꿈같은 휴가를 즐기고 싶은 우리들의 작은 소망을 담았어요! ]
다른 두 명의 멤버들도 한 번씩 곡 소개를 한다.
진행자가 정리했다.
[ 데뷔곡을 계절 송으로 만드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심지어 작곡가가 바로 그 김민 씨라니 더 기대가 되는군요. 박수로 청해보겠습니다! ]
마침내 울려 퍼지는 에버가든의 데뷔곡.
<블루 웨이브>
색다른 컬러로 펼쳐지는 무대는 그 나름의 멋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미련도 생긴다.
문 라이트 함께 데뷔해서 저 곡을 불렀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에버가든의 쇼케이스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
대기실로 가서 꽃다발과 함께 격려,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사진 몇 번 촬영하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
이 시간 이후부터 에버가든 멤버들은 숙소 생활을 시작하게 될 예정이다. 그리고 당장 내일부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데뷔 음원은 내일 출시된다나?
그나저나 숙소 생활이라.
이게 처음에만 신기하지 갈수록 불편하고 힘든 부분이 많이 생길 텐데....
고민 끝에 몇 가지 선물을 하기로 했다.
바로 대표님께 전화해서 말씀드렸다.
“에버가든 숙소에 전신 안마 의자, 65인치 스마트 TV, 공기청정기, 청소기 하나씩 선물할게요. 가장 좋은 것으로 맞춰주세요.”
내가 숙소 생활했을 때 굉장히 절실했던 것들이었다.
이 정도 가전을 갖춰놓으면 톱 아이돌 그룹 숙소가 부럽지 않을 것이다.
@
원래대로라면 목요일은 샬럿과 다니엘을 포함, 가족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전날 밤.
갑작스런 연락으로 일정이 조금 바뀌었다.
점심 직전 도착한 장소는 삼성동 고층 빌딩 중식집.
내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허허, 오랜만이에요!”
미소 때문에 더 얍실해 보이는 주름진 얼굴.
KM 엔터테인먼트의 김만수 회장이었다.
“갑작스런 연락에도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이 양반이 이번에는 또 어떤 헛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간절히 나를 찾은 걸까?
궁금해서 못 참겠더라.
그래서 오전 시간을 비운 거다.
표정은 미소 짓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김만수 회장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축였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