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로 돌아왔다-133화 (133/205)

< 133화. 거절하다 >

“제이미를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시선은 나를 쳐다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때 그의 밑에서... 그의 총애를 잠깐이나마 받아본 적이 있던 나는 어떤 감정을 숨기고 있는 지 꿰뚫어 볼 수 있다.

굴욕감.

“소개해 준 무대가 뉴욕에서 굉장히 유명한 래퍼들이 운영하고 있는 클럽이라고 하더군요.”

자신이 못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별거 아니라는 듯 내색조차 않는 나에 대해 경외심과 함께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애써 밝게 웃는다

“흑인 음악하는 친구들은 다 그 무대에 서고 싶어 할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맞나요?”

“네. 뭐....”

그 떠그 라이프들이 뉴욕에서는 제법 유명하긴 하지.

사이먼 블랙, 레드 트라이브, 레이지.

레이지는 이미 슈퍼스타 반열에 올랐고.

나머지 두 명은 지금도 유명하지만 시간 좀 지나면 힙합의 아이콘 같은 존재들이 되어 버리니까.

“그리고 우리 제이미에게 굉장히 좋은 인맥을 연결해줬더라고요. 그 인맥 덕분에 좋은 방송이나 공연에 설 수 있었다고 제이미가 말했어요.”

“베카 J 말씀이시죠?”

“네! 굉장히 핫한 친구라고, 지금도 미국에서 굉장히 유명하지만 시기만 잘타면 슈퍼스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저도 그렇게 보고 있어요. 베카 J는 정말 굉장한 친구죠.”

“들어보니 그 친구 곡 작업을 김민 군이 도와주고 있다던데....”

눈빛이 달라진다.

뭔가 꾸미는 눈빛.

난 흥미롭게 웃었다.

“그냥 멜로디랑 가사 만들어서 보내주는 것 중 골라서 편곡 정도만 해줬을 뿐이에요.”

“프로듀싱이군요. 그 정도면 지분 반 이상을 먹고 들어가죠.”

“전 그냥 제가 듣기에 좋은 곡을 골라서 조금 만져줬을 뿐인데... 하하.”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수선을 떨지만 실은 굉장한 일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다.

베카 J는 결국 라틴 팝 뮤직의 상징적인 스타가 될 텐데, 그 프로듀싱을 내가 했다는 것이니까.

“아무튼, 민군 덕분에 제이미의 미국 진출이 나름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었어요.”

결과적으로 제이미의 미국 진출은 실패했지만, 전생처럼 처절할 정도의 쓴맛을 본 건 아니다.

내가 뉴욕을 떠난 이후로도 사이먼 블랙과 레드 트라이브가 좋은 무대에 설 기회를 줬고, 베카 J가 자신의 인맥으로 라디오, TV, 행사장을 데리고 다니며 연결해줬다고 들었거든.

그 활동이 꽤나 영양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KM엔터테언민트는 그걸 또 미국 진출 성과라며 언플질을 하더라.

하지만 체면 세우기일 뿐, 이미 심각한 손해를 입은 상황이고 현지 법인은 철수를 고민 중이라고 들었다.

김만수 회장.

내 앞에서는 웃고 있지만 속은 말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거금을 들인 자신의 필생의 계획이 실패했으니까.

이로 인해 주주들과 내부 직원들의 비난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심지어 아티스트 재계약 문제로 심각한 내분을 겪고 있는 중이기도 하지.

오늘 자리는 바로 그 실추된 이미지와 입은 손해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슬슬, 목적이 짐작된다.

그는 물 한모금으로 목을 축인 뒤 본론을 꺼냈다.

“오늘은 김민 군에게 정말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말씀해 보세요.”

“혹시 스타더스트라는 그룹을 알고 있어요?”

난 미소를 애써 참고 대답했다.

“물론이죠. KM의 신인 남자 아이돌 그룹이 아닌가요?”

덧붙이자면 이전 삶에서 내가 소속되었던 그룹이기도 하지.

“사실 스타더스트 분위기가 상당히 좋지 않아요.”

그건 내가 소속되어 있었을 때도 그랬다.

KM이 시대 파악 못하고 지들 같은... 정말 오글거리는 중2병 그룹 내놓았다며 말이 많았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도 컨셉이 문제가 많긴 했었다.

이 양반이 슬슬 맛이 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지.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켜 이슈를 모으고 그룹 이름을 대중에 어필할 수 있는 카드가 필요한데....”

라떼는 그런 거 없었단 말이지!

카드?

노력하면 뭐하나.

KM 남자 그룹 특유의 중2병 스러운... 어둠의 다크, 혼돈의 카오스 같은 컨셉이 더 심해지는 시기였는데.

컨셉 미스를 만회하겠다고 죽어라 행사와 방송을 돌았다.

주로 내가 똥꼬쇼를 했지.

다들 나만 찾았으니....

“김민이 그 카드가 되어주면 안 될까요?”

“.......”

참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내 노력으로 그룹 이미지가 알려지고, 내가 곡, 컨셉, 안무 작업에 손을 대면서 중2병 컨셉이 바뀌기 시작했거든.

상큼하고 대중적인 댄스 팝 그룹 이미지로.

그 시점에서 왕따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혼자 다 해먹던 내가 프로듀싱까지 손을 댔는데 그게 엄청나게 잘 되고 있으니까.

회사 프로듀서 팀이 날 배반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못했던 걸 일개 아이돌 나부랭이인 내가... 마리오네트의 실을 끊어 버리더니 하드 캐리를 해버렸거든.

모든 것이 맞물린 결과였다.

내 실력과 상품은 인정하면서도 본인들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을 불편해하던 사람들.

이러다가 정말 원맨 그룹이 되고 자신들은 병풍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날 왕따시키기 시작한 멤버들.

결국 의도는 성공했다.

난 말 그대로 ‘카드’로만 쓰인 채 버림받았다.

버린 것도 모자라서 알고 보니 카드가 이상했다며 자근자근 짓밟더라.

효과가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나를 욕하며 멤버들을 동정했다.

그들을 응원했다.

여기서 나를 대신할 새 맴버 영입과 함께 스타더스트의 상승세가 시작됐다.

“카드가 되어달라는 말씀은... 그 스타더스트라는 신인 그룹 프로듀싱을 부탁하는 건가요?”

“프로듀싱이 아니라 곡을 부탁하는 거죠. 프로듀싱은 제가 맡아서 할 예정이에요. 제가 모아서 데뷔시킨 그룹이니 제가 끝까지 책임지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다급한 변명.

내가 기분 나빠서 거절할까봐 똥줄이 탄 모습이 우습다.

“스타더스트라....”

고민하는 척, 다시 과거를 회상한다

이 그룹의 떡상에 큰 기여를 한 게 웃기게도 바로 나다.

내가 작곡에 참여했고, 메인으로 활약했던 음악과 뮤직 비디오들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은 것이다.

바로 이거다 싶었던 KM은 내가 만들어 놓은 상큼한 팝 댄스 그룹 노래와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

회사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비슷한 컨셉의 음악과 안무, 뮤직 비디오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방향이 잡히니 뜨는 건 순식간이더라.

그렇게 해서 미국 진출까지 성공했다.

음, 여기서부터는 솔직히 내 기여 덕분이라고만 하기는 민망하다.

확실히 애들도 그렇고 KM도... 능력이 좋더라고.

감을 잡자마자 저 정도로 날뛰는 모습을 보며 솔직히 감탄도 여러 번 했었거든.

뭐, 그건 그거고.

“........”

슬슬 대답을 해줘야 할 때다.

시간을 확인해보고 말했다.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답변 드릴게요. 회사하고 상의도 해봐야 하고 제 개인 정도 빡빡하거든요.”

“아.....”

“마음 같아서야 그냥 들어드리고 싶은데 아무 곡이나 대충 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엄청난 고심과 노력이 필요한데 제가 곧 노아 촬영을 시작하게 되어서....”

“........”

“그래도 회장님 요청이니 정말 진지하게 고려해보고 떠나기 전 답변 드릴게요.”

“... 알겠습니다.”

시무룩한 회장을 두고 자리를 떠나며 생각했다.

미쳤냐?

내 손으로 원수 같은 놈들을 왜 띄워줘?

짓밟아서 땅 속에 파묻어 버려도 시원찮을 판국인데.

“.......”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부터 녀석들이 신곡을 발매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나도 신곡을 내면 어떨까?

그래서 내가 이슈를 모두 독점해 버린다면?

계속 찬밥 신세만 되다가 결국 쉬어 버린 슈퍼 아이돌 스타더스트라니.

꽤나 재미있는 복수가 될 것 같지 않나?

KM에도, 스타더스트에도.

@

그날 오후에는 광장시장에 향했다.

“오랜만이네.”

모두의 시선이 아버지에게 향했다.

아버지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예전에 여기서 장사한 적이 있었다.”

그건 몰랐는데...?

“지금도 아는 사람이 많아. 십년 이상 있었던 사람이라면 뭐... 어? 김씨! 오랜만이야!”

그게 시작이었다.

우리 아빠의 광장시장 인싸 전설.

“어이구, 백 할머니 아직도 여기 계시네. 순자 너 오랜만이다. 아직도 여기 있었어?”

“정호야! 형님 오셨다 인마!”

뭐... 모르는 사람이 없다.

여기저기 인사하고 다니는데 어지간한 상인들이 우리 아빠를 반갑게 맞아준다.

덕분에 생각 이상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광장 시장은 대체적으로 모든 음식점이 맛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맛있는... 정말 아는 사람만 안다는 그런 곳에 찾아가서 별미도 맛 봤다.

“어때? 재미있어?”

“응! 굉장히 신기해!”

“여기가 지금까지 본 어떤 곳보다도 제일 좋아!”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제대로 즐기는 모습들이다. 오죽하면 맵고 짠... 자극적인 것을 못 먹는 샬럿이 모든 음식을 하나씩은 건드려보고 있었으니까.

“영국에서도 이런 거 팔면 참 좋을 텐데....”

“그러고 보니 런던 파머스 마켓도 굉장히 유명한데 거길 안 가봤네.”

“볼거리는 많은데 막상 맛있는 요리는 많지 않아서....”

“가족들하고 몇 번 가봤는데 내 취향은 아니었어.”

평가가 상당히 안 좋다.

“그래도 난 가보고 싶어. 런던 돌아가면 바로 파머스 마켓 탐방부터 하자. 런던에도 분명 광장 시장 못지  않은 맛의 거리가 있을 거야!”

그 자리에서 서연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머니가 말했다.

“서연이 고등학교 졸업 할 때까지는 한국에서 키우기로 했다.”

“그래요?”

“내가 보니 영어 공부는 한국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리고 너처럼 외국에서 음악, 영화 활동을 제대로 할 것도 아닌데... 필요할 때 건너가서 촬영하고 돌아오면 되는 거 아니냐? 굳이 거기서 살게 하거나 학교 다니게 할 필요 없이.”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렇기 한데....”

본인 얼굴보다도 큰 빈대떡을 열심히 뜯어 먹고 있던 서연이에게 물었다.

“넌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지 않아? 런던 진짜 좋은 곳인데.”

“난 한국이 더 좋던데?”

“그래?”

“맛있는 음식도 없고 화장실은 불편해. 결정적으로 엄마 아빠가 없잖아! 내가 가면 누가 챙겨주고 돌봐주겠어?”

곧 폭소가 터져 나왔다.

내 통역을 들은 다니엘과 샬럿도 크게 웃는다.

서연이 찡그린 얼굴로 묻는다.

“뭐야. 왜 웃는 거야? 내 말이 우스워?”

“그게 아니라 기특해서 그래. 벌써 엄마를 챙기겠다니....”

맞는 말이다.

그렇게 노아 시리즈로 간을 보다가 좋은 기회가 왔을 때 거기에 맞춰 판단하고 움직이면 된다. 그게 아니라도 내가 있으니 한국에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하면서 지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면 적극 도와줄 것이고, 가게를 차리고 싶다면 차려줄 것이다.

세계 여행이 꿈이라면 온 세상을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우리 서연이는 그럴 자격이 있는 아이다.

세상이 나를 비난했을 때, 겁먹지 않고 당당히 그 세상과 맞서 싸워준 아이니까.

“그래. 너 하고 싶은 다 해 봐. 내가 지원해 줄 테니까.”

“뭐야, 오빠답지 않게 왜 자상한 척이야?”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다 먹고 백화점 가자. 서연이 옷도 사주고, 신발, 가방, 지갑, 최신 휴대폰... 다 사줄게!”

“.......”

날 멍하니 바라보던 서연이가 심각하게 말한다.

“아빠! 엄마! 아무래도 오빠가 미친 것 같아. 제정신이 아니라고!”

다시 한 번 폭소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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