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뒤바뀐 운명? >
“안 돼.”
“이미 결정 끝났어요.”
대표님과 팀장님은 단호했다.
난 괜히 섭섭한 마음에 한 마디했다.
“굉장히 단호하시네요. 너무해!”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너 한 번 더 그러면 혼난다?”
“민이는 귀여운 척 잘 못하는뎁!”
“아, 진찌 확...!”
순간적으로 주먹을 움켜쥐며 발끈했던 대표님은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이미 곡 넘어갔어.”
“엑? 언제요?”
“어제 결정 나자마자.”
“어떤 곡이 넘어간 거예요?”
“둘 다.”
참 빠르기로 해라.
“<눈 내리는 밤>은 편곡도 아직 안 끝냈는데....”
“내가 할 거야.”
오... 그건 기대되네.
“에버가든과 엔 플라워에게 오늘 들려주고 반응을 볼 거야.”
“거절당하면 곡 못 쓰는 거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대표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그냥 포기해. 엔 플라워가 시크릿 가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리가 없어.”
“아니, 대표님이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그 누나들 진짜 까다롭고 취향도 확고해서....”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대표님이 어처구니없어 하고 있었다.
“야, 너 지금 나한테 엔 플라워 취향 운운 한 거야?”
“........”
“어이가 없네. 야, 엔 플라워 내가 만들고 키운 그룹이야.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
“그리고 이건 취향 문제가 아니야. 활동을 하다보면 촉이라는 게 생겨요. 아, 이 노래는 무조건 빵 뜨겠다! 성공에 대한 촉!”
대표님은 진지하게 말씀하신다.
“시크릿가든은 그런 곡이야. 무조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 진짜.”
대표님은 정연 팀장님과 무언의 시선을 교환했다.
팀장님이 나서셨다.
“이렇게 하죠.”
“........?”
“만에 하나라도 엔 플라워가 시크릿 가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에버가든에게 넘길게요.”
“콜!”
재빨리 대답하는 나를 정연 팀장도 아주 잠깐 어이없다는 듯 바라본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다들 굉장히 좋아서 당장 연습하고 싶어 할 거예요.”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죠!”
“알 때도 있어요.”
단호하셔라.
그런데 대화하기 무섭게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만요.”
통화하던 정연 팀장님이 나를 보고 묘한 표정을 짓는다.
“알겠어요. 그렇게 전하죠.”
아무래도 테스트에 대한 결과가 나온 모양인데?
대표님도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뭐래?”
“테스트 결과는....”
잠시 후, 나와 대표님 사이에 희비가 크게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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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TV 생방송 뮤직 스테이션 촬영대기 중.
매니저가 엔 플라워 멤버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곡이 하나 나왔는데, 일단 들어보고 후속곡으로 할지 반응을 정하려고 해요.”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아가 물었다.
“여기서 곡을 들어보자고요?”
“대기실 반응 처리가 굉장히 좋더라고요. 다 테스트 해봤으니 유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요.”
그렇다니 뭐... 어차피 딱히 할 것도 없었으니 음악을 듣기 시작한다.
화려한 선율과 대조되는 강렬한 킥 드럼. 그리고 트랩 비트!
“........”
가사는 없었지만 어떤 곡인지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모두의 표정이 금방 진지해졌다.
곡이 끝나자 멤버들이 소감을 나눈다.
“이거 무조건 되겠는데?”
“나도 촉이 세게 왔어. 이건 무조건 잘 될 거야.”
“이걸로 하자. 나도 진짜 마음에 들어.”
“곡 좋다. 이건 누가 봐도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야!”
의견이 모였다.
주아가 물었다.
“설명 좀 해주세요.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모든 것이 결정되고서야 매니저는 숨겨진 비화를 털어놨다.
“김민 군이 만든 곡이고, 원래는 애버가든에게 갈 곡이었어요.”
시크릿가든.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 깊은 어둠을 자기만의 공간에 깊숙이 숨겨두고 있다.
곡의 화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밀 화원에 작신의 어둠을 감추고 있다. 어떻게든 뒤덮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어둠의 존재감은 더욱 커져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바로 양면성에 대한 노래죠.”
“........”
굉장히 심오하다!
“마음에 들어.”
“우리 격에 딱 맞아!”
다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듣기 좋은 노래도 좋지만, 이렇게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는 심오한 음악이야말로 커리어를 빛내주고 그룹의 격을 상승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우리에게 온 이유를 알겠네요. 시원하고 상큼 발랄한, 대중적인 여름 곡으로 데뷔한 에버가든에게는 많이 이른 곡이에요.”
역시 주아는 그룹을 대표하는 리더답게 회사의 결정을 단번에 이해했다.
“이게 김민 군이 일주일 동안 몇 번이나 기절했을 정도로 정말 어렵게 탄생한 곡이래요.”
“와....”
“덧붙여 에버가든을 명품 걸그룹으로 만들겠다며 다함께 으쌰으쌰하며 시작한 프로젝트였다는데....”
“그게 우리에게 오게 된 거군요?”
“그렇죠.”
“아, 왠지 에버가든 친구들에게 미안해지는데....”
좋기도,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다.
혹여라도 이 곡으로 크게 성공하게 된다면 미안한 마음이 더 커질 것 같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매니저가 씩 웃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김민 군이잖아요. 분명 에버가든 친구들에게도 시크릿 가든 못지않은 좋은 음악을 줬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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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에 모인 에버가든에게 담당 매니저가 말했다.
“지금부터 곡을 하나 들려줄 거야. 내 생각에는 너희도 분명히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반지희가 냉큼 손을 들며 물었다.
“누가 썼어요?
“맞춰 봐.”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매니저는 곡을 재생시킨다.
눈 내리는 밤.
도시가 하얗게 물들면
그대가 생각나.
그대가 떠올라요.
연습실에 따뜻하면서도 가슴 떨리는 겨울 감성의 팝 발라드 음악이 울려 퍼진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꼭 모은 소녀들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특히 주세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 목소리는 분명히....’
내 마음을 포근히 감싸줘요.
그대의 눈처럼.
그렇게 노래가 끝나고.
“첫 소절 듣고 바로 알았어! 이거 민이가 만들고 부른 곡이죠? 맞죠?”
“문제가 너무 쉬웠지? 아무튼, 곡 어때? 제목은 눈 내리는 밤. 크리스마스를 노리고 만든 겨울송이야. 너희들 컨셉하고 딱 맞고, 일단 굉장히 대중적이라서 마음에 들더라고.”
“우리도 좋아요!”
“빨리 부르고 싶어요!”
“듣자마자 전율이 흘렀어요!”
다른 멤버들도 입을 모아 외친다.
표정이 굉장히 들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주세아.
매니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마음에 들었나보네. 세아가 저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퍼포머로서의 자질을 보여줬으니, 보컬 그룹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줄 차례였다.
이 곡을 제대로 연습해서 보여줄 수 있다면 대중은 에버가든의 종합적인 능력치가 굉장히 좋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국민 걸그룹의 신화가 시작되는 거지.’
국민 걸그룹!
원래는 명품 걸그룹이었던 컨셉이 이 곡의 등장으로 바뀌었다. 시크릿 가든과 명품 걸그룹 컨셉은 엔 플라워에게 넘어갔고,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듣고 땅을 치며 안타까워했더랬다.
하지만 뒤이어 이 곡을 모두 함께 듣고 바로 미련을 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국민 걸그룹 컨셉이 만들어졌다.
반지희가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러면 혹시 다음 곡 컨셉은 봄인가요?”
“오! 그러면 우리 사계절 그룹이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겨울, 봄, 다음 컨셉은 가을이네! 사계절 한 번씩은 다 해봐야지!”
“내가 듣기로 히트한 계절송은 한 때의 유행이 아니라 지속적인 히트로 연금곡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고!”
“연금 그룹도 좋다!”
저희들끼리 신나서 밝고 희망찬 미래에 들떠 있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매니저가 소리쳤다.
“열심히 해서 우리는 노래도 잘한다는 걸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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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연유로 계획대로 가기로 했어요.”
“으하하! 봤지? 자식아! 내가 뭐라고 했어? 이게 맞다고 했지?”
“.........”
대표님은 환호성을 지르며 내 등짝을 팡팡 두드리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틀렸어.
시크릿 가든은 꼭 에버가든에게 주고 싶었는데... 꿈이 점지해 준 곡이었는데!
잡초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꿈 이야기를 했더니....
“오늘 잠 자면 꿈속의 주인공이 바뀌어 있을 거다. 에버가든에서 엔 플라워로.”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야, 너만 그런 꿈꾸는 줄 알아? 난 아마 수천 번도 꿨을 거다.”
“... 그, 그래요?”
“네가 특별한 사람이라서 꿈이 영감을 선사하는 게 아니야. 고민이 쌓이고 쌓여서 네가 무의식중에 최선으로 선택한 결과의 단편이 구현되는 것뿐이지.”
“아....”
“너 가끔 영감님이 어쩌고 헛소리하던데 그것도 똑같아. 네가 지금까지 만든 히트 곡은 누가 휙 던져 준 게 아니야. 모든 것이 네 고민과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가사에 대한 고민을....”
“아, 그 부분 말인데요.”
정연 팀장님이 말씀하신다.
“시크릿 가든 가사는 엔 플라워 멤버들이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맛 들렸네. 네가 미니 앨범 참여하게 해줬는게 그 결과가 좋았잖아. 아시아 시장에 진출해서 성과도 좋았고. 하게 해주자.”
나도 이쯤에서 미련을 털고 말했다.
“그래야죠. 그렇게 해야 엔 플라워 누나들이 더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자신들만의 곡이 완성되는 거니까요.”
“자식이 뭘 좀 아네. 아무튼 분위기 좋다. 엔 플라워는 명품 걸 그룹으로, 에버가든은 국민 걸 그룹으로.”
‘국민 걸그룹이라.’
이 바닥 계획 뒤집히는 거야 한두 번도 아니니 뭐... 그런데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에버가든 다음 곡의 주제는 정해진 셈이네.’
다음 날부터 활동이 시작됐다.
방송 출연도 하고 공연장에 올라가 노래도 부르고.
특히 영국에서의 일정이 많았는데 가 UK차트 1위를 굳건히 수성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영국의 유명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특별 게스트로 출연해서 무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엔 플라워, 에버가든의 후속곡 준비 소식이 전해졌다. 아직 외부에 공개된 건 아니지만 나는 작곡가로서 수시로 일 진행 상황을 듣고 있었다.
엔 플라워의 경우는 이미 준비된 컨셉을 가져왔으니 금방 뮤직 비디오, 화보 촬영을 하고 프로모션 일정까지 다 잡아 놨더더라.
에버가든은 아직 블루 웨이브 활동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엔 플라워의 <시크릿 가든> 활동이 끝날 때쯤에 맞춰서 후속곡을 이어갈 수 있도록 조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엔 플라워 시크릿 가든 뮤직 비디오 나왔다. 볼래?”
“봐야죠.”
런던 시내를 질주하는 자동차 안.
대표님, 정연 팀장님과 함께 뮤직 비디오를 감상한다.
특별히 뮤직 비디오에 내가 많이 관여했다.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화원을 그대로 재현하자는 정연 팀장님의 제안 덕분이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에, 굉장히 아름다웠던 화원의 모습과 멤버들의 의상, 헤어스타일, 화장... 모든 것들을 최대한 상세하게 묘사하고 정리해서 아트 팀에게 전달했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초안이었다.
정말 광활한 화원.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바로 그곳에 요정 같은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땋거나 풀어 내린 뒤 화관으로 장식한 엔 플라워 멤버들이 앉아 있다.
무릎을 감싼 채, 굉장히 우울한 얼굴로.
안무는 국. 내외 최고의 댄스팀 스무 팀에 리드를 띄운 뒤, 안무를 종합해 가장 좋은 파트만 추려서 다시 하나의 안무로 재조합했다.
저 화원 장면 외에는 엔 플라워 멤버들이 일상에서 밝고 활기차게 보내는 장면이 펼쳐진다.
또한 갑자기 어둡고 음침하게 변한 화원에서, 트랩 비트에 맞춰 강렬하게 춤을 추는 장면도 삽입되었는데 반전 효과가 나조차도 깜짝 깜짝 놀랄 정도다.
뮤직 비디오를 보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양면성을 완벽히 이해하고 재했어.’
과연 대한민국 최고 걸 그룹 짬밥이 어디 가지 않았다.
더욱이 평균 연령대가 에버가든보다 높고 상승과 하강곡선을 타는 동안 단맛 쓴맛을 모두 맛본 상황이라 안무와 표정 연기의 표현력부터가 상당한 수준이었다.
곳곳에 명품 의상과 아이템들을 절묘하게 활용한 게 눈에 띈다.
아트 팀과 촬영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
뮤직 비디오 끝나면 전화라도 한통 돌려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 내 곡을, 의도를 기대 이상으로 구현해줬으니까.
그렇게 뮤직 비디오가 끝났다.
“어때?”
“어때요?”
대표님과 정연 팀장님이 나를 바라본다.
내가 원곡자니 내 반응이 궁금했던 것이다.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게 원래 에버가든에게 돌아갈 곡이었다는 거 절대 말하지 마세요. 특히 에버가든 멤버들에게는요.”
“... 왜?”
“제 생각인데 아시아뿐만 아니라 북미, 유럽 지역에서도 먹혀요. 곡, 스타일링, 안무, 영상미, 컨셉... 모든 것이 수준급이에요.”
이건 KPOP 전성시대가 열리는 2020년 이후, 어느 때 등장해도 성공할 수밖에 없다.
내가 만든 곡이고 지휘한 컨셉이지만... 전율이 일 정도로 멋졌다. 그걸 훌륭히 소화한 엔 플라워 멤버들이 정말 다시 보일 정도였다.
에버가든이었다면 이 정도로 소화해내지는 못했겠지.
애초 아직 십대 밖에 안 된 애들이 인간의 양면성이 어쩌니, 깊은 어둠이 저쩌니 운운하는 일이 이상한 일인 것이다.
... 그 부분은 내 명백한 실책이지.
그렇다고 해도!
“저런 곡이 원래 자신들 거였다는 소리 들으면 굉장히 아쉬울 거 아니예요. 어쩌면 감정이 안 좋아질 수도 있는 일이죠.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
“.......”
어째 두 사람 모두 대답이 없었다.
난 가늘게 뜬 눈으로 물었다.
“이미 말했어요?”
“........”
“아 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