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버리기가 아까워. >
레게 기타 리듬이 나른하게 울려 퍼지는 해변.
에메랄드 빛 물결이 기분 좋게 찰랑거리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온 몸을 감싸 안아준다.
어느 순간 파도 소리만큼이나 레게 기타 리듬 소리 역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어? 이게 대체 뭐지?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
잠에서 깼다.
꿈이었구나.
주위를 둘러보니 샬럿과 다니엘이 소파, 간이침대에 누워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 녹음 마치고 피곤해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군.
[ 이거 부를 사람? ]
묻기 무섭게 싸워대더니.
결국 최후의 승자는 사이먼 블랙이었다.
[ 나에게도 기회를 한 번 줘야지! 나도 빌보드 1위 항 번 해보고 싶다고! 너희들은 이미 해봤잖아?! ]
[ 무슨 개소리야? 나도 아직 못 해봤다고 젠장! ]
성질 더럽기로는 사이먼 못지않은 잭이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 잭. 너에게 맞는 곡은 따로 만들어줄 테니 사이먼 주자. ]
그 말에 잭은 툴툴 대면서도 물러섰다.
그렇게 현장에서 녹음이 시작됐고, 믹싱, 마스터링까지 끝낸 뒤 음원을 건네줬다.
[ 이 음악이면 나도 빌보드 1위를 할 수 있다는 거지?! ]
나한테 무슨 욕을 먹고 싶어서 미친 소리를 하는 건지....
그런데 잭을 비롯한 다른 친구들은 모두 부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라.
... 애도 아니고.
그리고 잠들었다.
작업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레게는 날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군.’
레게 팝의 잔향이 거칠게 날 압박하고 있었다.
빨리 날 이용해서 다른 음악을 만들어보라고.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아니, 원래 영감이라는 게 시간이 지나면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허망히 사라지지 않던가?
그런데 끝까지 남아서 날 괴롭힐 줄이야!
그래서 자리에 앉았다.
다시 꿈속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요소를 집중해 본다.
잠깐, 일단 참조 이미지부터 찾아보자.
그 장면. 굉장히 그림이 좋았거든.
마침 적절한 곳을 찾았다.
내가 꿈에서 봤던 곳과 정확히 일치했다.
몰디브의 해안가.
완벽한 백사장이었고 에메랄드 빛 파도가 넘실대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휴양지!
이 이미지를 놓고, 이번에는 바람, 파도, 물결소리 샘플들을 다양하게 찾아본다.
사운드 샘플을 따로 파는 사이트에 가서 소리를 일일이 들어보고 있는데.
“으음... 일어나자마자 곡 만드는 거야?”
“아, 깼어?”
샬럿이 잠에서 깼다.
막 깬 머리가 사자 갈기처럼 되어 있었고 얼굴이 부스스 했지만 워낙 인형 같이 예쁜 외모라 여전히 사랑스럽다.
문제는....
“옷 좀 제대로 입자.”
“어? 으, 으응...!”
민망해하며 황급히 옷을 여미는 샬럿.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단추가 모두 풀어져 속살이 빤히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같이 지내며 저런 광경을 한두 번 목격한 것도 아니다. 얼굴 붉히고 가슴 뛰고... 이런 시기는 진작 넘긴 것 같다.
“나 샤워하고 올게.
옷가지를 들고 스튜디오를 나서는 샬럿.
난 피식 웃으며 다시 사운드 샘플을 탐색한다.
오, 이거 좋은데?
재료를 모두 갖춰 놓은 뒤에야 작업을 시작했다.꿈 속 해변에서 들었던 레게 기타 사운드를 최대한 똑같이 구현해 본다.
그리고 고민했다.
이거, 혹시 어디선가 들었던 음악은 아니겠지?
작곡가들이 잠을 자다가 영감을 얻는 경우가 흔하긴 한데, 대부분은 무의식 중 어디선가 들었던 음악이 재현되는 경우가 많다더라. 그래서 모르고 냈다가 표절이 되는 경우가 왕왕 존재한다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난 기억력이 굉장히, 매우, 어메이징하게 좋은 편이라 조금만 머리를 굴리며 서칭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음, 없군!
레게 기타 리듬을 풍성하게 채워본다.
은은하면서 신비로운 해변 느낌을 주는 Pad 악기를 밑바탕에 깔고, 어택감은 약하지만 부드럽고 존재감이 뚜렷한 베이스 기타를 연주해 채워넣는다.
이건 힙합, 알앤비 보다는 록 스타일의 드럼이 어울릴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아날로그 적이면 곤란하고, 특히 킥 부분에 펀치감이 조금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90년대 비치보이스 스타일 록 드럼을 구현하고 그 위에 808 킥을 합쳐 소스를 완성한다.
오케이, 여기까지는 마음에 들어.
문제는 지금까지 완성된 것이 전주, 사비일 뿐이라는 것.
이제 브릿지 부분과 후렴을 완성해야 하는데.
“고민이네. 피치를 끌어올려서 신나게 달려볼지 아니면 이대로 은은하게.....”
“신나게 달려.”
“.......!”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 새 옆 자리에 끈 나시와 트레이닝용 핫 팬츠를 입은 레이나가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아침 운동했어요?”
“응. 냄새 안 나지? 샤워 하고 왔는데.”
“어쩐지 꽃향기가....”
여기서 한 번 더 선비질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아무리 내가 동생 같고 미성년자라고 하지만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닌가?
하지만 레이나는 원래 저런다.
그리고 이 환상적인 스튜디오는 본래 레이나의 것이지.
내가 참는 수밖에!
“... 옷 좀 입어요.”
헛! 참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레이나가 물었다.
“왜? 나 살쪘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게 아니라... 에효. 됐어요. 말을 말아야지.”
아주 틈만 나면 날 놀리려고....
난 한숨을 쉬며 작업을 계속 이어갔다.
“신나게 달려요?”
“응, 이거 비치 보이스 음악에 영감 받아 만든 곡이지?”
“딱 맞추네요. 그런데 표절 같지는 않죠?”
“응. 표절은 확실히 아니야. 말 그대로 영감만 받은 정도니까 문제 될 거 없어. 아무튼 내 말 대로 해봐. 후렴구는.....”
빌보드의 여왕이 본격적으로 작업에 참전했다!
사실 그녀의 수많은 빌보드 1위 곡 중에는 그녀 본인이 멜로디와 가사를 쓰고 프로듀싱까지 한 곡도 다수 존재한다.
그게 아니라도 그저 운빨로 좋은 곡을 얻었던 게 아니다. 그녀의 안목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소리다.
“퍼커션 중에 젓가락으로 유리 잔 두드릴 때 나는 소리 있잖아? 그 소스를 공간감을 조금 더 키워서 메인 퍼커션 리듬으로 넣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래요?”
“지금 도입부 임팩트가 상당히 아쉬워. 내 생각에는 여자 보컬과 방금 말한 유리잔 리듬, 그리고 스냅. 세 가지 정도로 미니멀하게 구성하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아.”“여자 보컬은 레이나가 좀 도와줄래요?”
“그러지 뭐.”
그녀의 말대로 도입부를 변경하니 미니멀하고 트렌디하게 변경됐다.
그 순간 확신이 왔다.
“내친 김에 가이드도 쭉 이어서 해보죠.”
그녀의 곡이라는 확신이 들자 나머지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직역하면 대충 파도를 느끼다.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휴양지에서 듣기 좋은, 혹은 휴양지를 갈망하게 만드는 여름 러브 송으로 만들면 되겠다.
여기서 조금 더 욕심을 부리면 파도를 성적 쾌감에 비유해서 하이라이트 파트에 묘한 느낌을 줄 수도 있겠지?
너무 대놓고는 말고, 은근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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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이 완성된 시간은 오전 열 한 시.
끝마치고 다 함께 바깥으로 나가서 식사를 했다.
“내가 살 테니까 맛있는 거 먹자!”
그녀의 기분이 굉장히 좋아보였다.
이제 막 따끈따끈한 곡이 완성되었기 때문이겠지?
그녀가 물었다.
“어떻게 아침부터 그런 곡을 만들 생각을 했어?”
꿈 이야기를 해줬더니 굉장히 신기해하더라.
다니엘이 물었다.
“이런 경우가 흔한 건 아니지?”
“흔하지 않지. 너도 생각해 봐.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게 하루가 지나도 사라지기는커녕, 꿈속에 나타날 정도로 더 강해지는 거야!”
“음, 확실히 흔한 경험은 아니네!”
“바로 그거야. 그래서 이번 곡이 참 묘하다는 거고.”
“아무튼 난 이 곡 굉장히 마음에 들어. 개인적으로는 세뇨리타보다 더 좋아.”
“어? 그래요? 어째서요?”
“일단 내가 참여한 곡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런 계절에 특화된 음악을 좋아하거든! 여름 노래. 캐럴 송, 이런 거.”
그러더니 그녀가 은근히 묻는다.
“우리 캐럴 송 작업도 같이 하자. 응?”
아주 뽕을 뽑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하지만 내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다.
같은 캐럴 송도, 슈퍼스타 레이나가 부르면 반응 자체가 달라질 테니까.
“구상 좀 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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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웰슨 감독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 캐스팅이 모두 완료 됐어. ]
그리고 배우와 스텝을 포함한 <1980 브로드웨이> 팀 명단을 보내주셨다.
레이나와 레이지, 샬럿 왓슨을 포함한 모든 배우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내가 잘 아는 배우도, 잘 모르는 이들도 존재했다.
후자 쪽은 대체적으로 브로드웨이에서 주로 활동하던 배우들이었다.
[ 자네와 올리비아 퀸 작가님이 프리 프로덕션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까다로운 일들을 미리 잘 끝내놓은 덕에 진행이 수월했어. ]
프리 프로덕션 중 시나리오 회의, 콘티 및 대본 제작, 로케이션 확정, 주연 배우 리스트 제작 같은 것들은 나와 올리비아 퀸 작가님, 헨리 윌리엄스 작가님 선에서 이미 끝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제작사를 디즈니로 컨택했고, 그 디즈니가 우리가 준비한 작업물을 바탕으로 감독님을 섭외하고 제작 지원을 해준 것이니 작업이 수월한 것도 당연했다.
[ 대본 리딩은 뉴욕 맨해튼에 있는 내 개인 스튜디오에서 진행하기로 했으니 자네는 비행기를 탈 필요가 없어. ]
“오, 잘 됐네요.”
[ 그러면 그때 보도록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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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있는 시리즈의 후속 제작이 아니라면 대본 리딩은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고가 터져서 제작이 중단될 수도 있고 배우에게 무슨 일이 발생해서 일정을 연기하거나 아예 캐스팅을 교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노아와 달리, 1980 브로드웨이는 내 오리지널 창작이라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난히 더 떨리고 불안하기도 하다.
결과가 안 좋으면?
제작 과정에서 사고라도 터지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항상 모든 일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 이렇게 모두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감독 잭 웰슨입니다. ]
첫 대본 리딩은 무탈하게 끝났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고, 분위기도 꽤나 화기애애했다.
그런데 제작 발표회를 남겨 놓고 큰 문제가 생겼다.
[ 배우 로버트 스콧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입건. 면허 취소 수준. 피해자 심각한 부상. ]
음주운전도 모자라 교통사고라니...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범죄였다.
이미지가 굉장히 좋았고 배우로서 연기력만큼이나 커리어도 좋아서 우리 영화의 주요 배역에 낙점 됐던 중년 연기자였다
대본 리딩 때 분위기를 주도할 정도로 유쾌한 성격이었고.
그랬던 그가 사고를 치고 말았다.
1980 브로드웨이 팀이 뒤집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잭 웰슨! 이 망할 자식...! ]
감독님이 전화로 욕설을 내뱉더라.
현 시점에서 우리가 바래야 할 것은 두 가지.
사고 피해자가 무사히 치유되기를.
우리 프로젝트가 이런 식으로 외부에 노출되지 않기를.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이번만큼은 내게 미소를 지어주지 않았다.
[ 로버트 스콧 음주운전 교통사고 피해자, 병원 치료 중 사망. ]
[ 가해자 로버트 스콧은 잭 웰슨 감독의 <1980 브로드웨이> 출연 예정이었던 사실이 알려져.... ]
[ 1980 브로드웨이란 어떤 영화...? ]
“하....”
망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