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다 (2) >
“꺄아악!”
“민아! 김민!”
이번에도 팬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공식 팬클럽인 ‘김민의 숲’ 회원들 말이다.
“안녕하세요. 그 동안 잘들 있었죠? 이번에도 선물 잔뜩 가져왔어요!”
뉴욕, LA, 런던,
틈이 날 때마다 모은 선물 보따리를 팬 카페 회장인 최소라에게 건네줬다.
“소라 누나와 팬 분 덕분에 향수병 따위 느낄 새도 없었네요. 보내주신 음식 정말 감사히 잘 먹고 있어요.”
“누, 누나...!?”
“아, 호칭이 기분 나쁘시면 다시 바꿀....?”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행이다.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누나라고 부를 테니 잘 좀 부탁드려요.”
팬 서비스를 충분히 해주고 마중 나온 최명규 매니저님을 따라 차에 탑승했다.
차는 경기도의 한 거대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민!”
“우와! 김민이다!”
제일 먼저 세아와 반지희가 달려와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와,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사이에 몰라보게 예뻐졌네.”
“흥. 세아에게만 하고 싶었던 말을 굳이 나한테까지 할 필요 없는데.”
“무슨 소리야? 난 지금 에버가든 모두에게 하는 말이야.”
어느 새 모든 멤버들이 내 주위에 몰려와 있었다. 나하고 친분이 없는 탓에 선뜻 다가지오지 못하고 있는 그녀들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다들 놀랄 정도로 예뻐졌네요. 관리 정말 열심히 하고 있나 봐요.”
“죽도록 하고 있어요!”
“회사애서는 트레이너님이 괴롭히고 집에서는 세아가 괴롭혀요!”
“눈치 볼 사람 많아서 힘들어 죽겠어요.”
트레이너님이야 그렇다 치고, 세아는 또 왜?
내가 바라보자 세아는 당당히 부정한다.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다들 모함하는 거야.”
“저 거짓말쟁이!”
“와, 프로듀서 님 앞이라고 내숭 떠는 거 봐!”
“세아가 평소 어떤 지 잘 모르시죠?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려고 하면 굉장히 무섭게 다그쳐요!”
“지희가 엄마라면 세아는 아빠에요! 엄하고 무서운 아빠!”
다들 굉장히 친해진 것 같다. 팀워크도 생각 이상으로 좋은 것 같고.
가장 좋은 예로 주세아가 본래의 성격을 주저 없이 드러내며 멤버들을 무섭게 관리하고 있다는 부분이 그랬다. 특히 아침 운동과 식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챙기도록 한다나?
... 그런데 그렇게 무섭게 다그치나?
“다들 네 앞이라고 엄살만 부려서 그렇지, 실은 불편한 것 이상으로 도움이 정말 많이 되고 있어. 스트레칭, 올바른 운동법, 식단 관리 같은 걸 세아가 정말 많이 알고 있거든.”
“그래?”
“어려서부터 태권도 말고도 여러 가지 운동을 해왔고... 일단 요리도 어느 정도 할 줄 아니까.”
“오, 그래? 그러고 보니 세아 요리는 못 먹어 본 것 같은데 궁금해지네.”
그 말에 멤버들의 몸을 쿡쿡 찌르고 있던 세아가 나를 돌아본다.
“우리 숙소에 놀러오면 맛있는 거 만들어줄게.”
“그래? 그러면 오늘... 은 조금 그렇겠지? 내일 오전 중으로 한 번 방문하도록 할게.”
어쨌든 한국에 왔으니 집에는 들려야지.
스튜디오 세트장에서 촬영이 시작됐다.
나는 뮤직 비디오 여주인공의 남자친구 역할이었다.
처음 대본이 나왔을 때에는 소속사 배우를 투입해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도록 할 계획이었다는데, 멤버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계획이 아예 바뀌어 버린 것이다.
대놓고 날 써먹기로!
감독님이 내게 장면을 설명해주신다.
“여자 친구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헤어지기 전의 아쉬운 감정을 표현해 주시면 됩니다. 음악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많이, 자유롭게 표현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이 씬을 멤버 전원에게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 내용상으로는 여자 주인공이 한 명의 캐릭터지만, 에버가든 멤버 전원이 여자 주인공이 되어 각자, 또 같이 연기를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 그러면 누구부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선다. 멤버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 했지만....
“어, 그, 그러면 세아 씨부터 할까요?”
감독님과 스텝들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털모자와 목도리, 장갑 등의 겨울용 의상을 착용하고, 눈이 잔뜩 쌓여 있는 골목길 세트장에 나란히 선다.
“레디... 액션!”
감독님의 외침이 내면의 스위치를 올렸다.
난 연기 모드로 돌입했다.
@
감독은 긴장하고 있었다.
‘벌써 할리우드 대작에서 두 작품의 주연을 맡았다지?’
하나는 촬영이 끝나고 뮤지컬 영화는 곧 촬영에 들어간다고 했다.
노아와 1980 브로드웨이.
같은 미디어 업계 종사자로서 굉장히 관심을 갖고 있는 작품이었다. 바로 그 주연의 역량을 이 자리에서 볼 수 있게 됐으니 기대감이 가득했다.
“레디... 액션!”
자신의 외침과 함께 시작된 연기.
순간 김민의 분위기가 돌변한다.
예쁘고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에서, 어른스러운 ‘남자’의 모습으로.
가장 먼저 주세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냉막한 인상의 주세아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자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준다.
‘조, 좋아! 자연스러워!’
끊지 않고 롱 테이크로 가도 될 것 같은데?
지금 이 순간. 카메라에 담긴 김민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시선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여자친구’인 세아만을 담고 있는 것이다.
세아 역시 이 분위기에 굉장히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계속 눈치를 보며 나란히 걷는 모습을 남자친구를 너무나도 좋아하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수줍고 어설픈, 연애 초창기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저 얼굴에서 저런 분위기가 나오다니... 세아 양도 연기에 재능이 있구나!’
그런 착각 속에 연기는 계속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눈길을 걷던 두 사람은 주택 앞에 멈춰 선다.
말없이, 그러나 세상 따스하게 세아를 바라보는 김민의 표정과 눈길을 오래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 둘곳을 찾지 못한 채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세아의 모습.
그때 김민의 양손이 세아의 작고 하얀 얼굴을 부드럽게 감싼다.
‘어? 어어어?!’
순간 감독은 자신의 본분조차 잊은 채, 로맨틱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의 첫 키스 씬을 앞두고 흥분한 시청자가 되어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감독님!’
보다 못한 조연출의 속삭임이 정신을 일깨웠다.
입술이 닿기 전.
“컷!”
급하게 터져 나오는 외침.
“아아아!”
아쉬움에 가득한 스텝들, 특히 여자 직원들의 탄성 소리!
그 순간, 김민이 뿜어내는 달콤한 분위기에 젖어 몽롱한 얼굴로 눈을 감으려던 주세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비로소 정신이 돌아간 것이다.
곧, 세아의 새하얀 얼굴이 눈에 띄게 빨개진다.
반지희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야! 주세아! 촬영을 하랬더니 진짜 연애를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 너 제정신이야? 재 얼굴 빨개진 거 봐! 진짜 미쳤나봐!”
“어머! 어머! 어머!”
멤버들은 발을 동동 구르거나 입을 가리고 서로의 어깨를 치는 둥, 깨방정을 떨었다.
주세아의 얼굴은 누가 봐도 잘 익은 사과 마냥 새빨개졌다.
김민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세아를 폭 안아준 상태로 물었다.
“감독님. 어땠어요?”
무슨 대답이 필요할까?
[ 짝짝짝! ]
감독은 온 힘을 다해 손뼉을 쳤다.
스튜디오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
세아는 도망치듯 세트장 뒤로 달려가 버렸다.
부끄러움이 많네.
귀여워라~.
“다음 반지희! 이리 와!”
이걸 앞으로 네 번 더하면 다음 씬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거지?
자칫하면 늘어질 수도 있는 촬영이니 처음부터 과감하게, 그리고 제대로 해야 오늘 안에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쪼르르 달려온 반지희는 의욕이 넘친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몸을 푸는 시늉을 한다.
“다들 이 리더님이 하는 거 잘 지켜봐! 내가 이 촬영장을 제압해 보일 테니까!”
대체 선전 포고는 왜 하는 건지....
“지희 화팅!”
“에이스가 침몰되어 버린 이상 우리 그룹의 자존심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리더 뿐이야!”
“힘내라!”
이게 무슨 스포츠 경기 같은 거였어?
침몰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레디... 액션!”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해볼까 싶은 마음에 손을 잡지 않고 대뜸 어깨를 감싼 뒤 내 품에 끌어당겼다.
“.......!”
지희가 당황하고 놀란 얼굴로, 내 품에서 날 올려다본다.
난 빙긋 웃어 보인 채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뭔가 보여주겠다고 했지? 어디 한 번 해봐라!’
할리우드에서 쌓은 연기 내공으로 어떤 애드립이든 다 받아 쳐줄 테니!
그렇게 생각하고 다음 행동을 기대하는데.
“.......!”
애가 가만히 있는 게 아닌가?
다소곳하게 내 품에 안긴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설마 이게 애드립은 아닐테고?
집 앞에 멈춰 서서 품에 안은 지희를 내려다본다.
지희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고 눈동자도 사정없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어, 아무래도 이거 연기가 아닌데?
그러건 말건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중이니 애드립을 이어간다.
두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겨 준 뒤 왼손으로는 뒷머리를, 오른손으로는 허리를 감싸며 품에 더욱 밀착시킨다.
“........!”
숨소리가 급격히 거칠어졌다.
그 순간.
“컷!”
시기적절하게 울리는 외침.
입술 바로 앞에서 얼굴을 멈춘 뒤 오뚝한 코를 툭 퉁기고 도발했다.
“뭔가 보여주겠다더니...별 거 없네.”
“......!”
순간 지희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그리고.
“나쁜 놈! 으아앙!”
우는 소리를 내며 달아나 버리는 게 아닌가?
주세아가 도망쳤던 바로 그 장소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감독님과 스텝들이 배를 잡고 웃고 있었는데 나머지 멤버들은 사형수마냥 덜덜 떨고 있었다.
난 씩 웃으며 말했다.
“자,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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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은 저녁 식사 직전이 되어서야 끝났다.
“김민 씨! 정말 잘 해주셨어요! 헐리우드에서 주목하는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감독님이 보기에 정말 괜찮았어요?”
“물론이죠! 나중에 로맨스 영화 꼭 촬영해 보세요. 상대 배우가 누구건, 김민 씨 매력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할 겁니다.”
그리고 세트장 너머를 바라보신다.
“에버가든 멤버들처럼요.”
다들 저기에 숨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다들 굉장히 순수하더라.
작은 자극(?)에 굉장히 취약하기도 했고.
그게 재미있어서 나도 모르게 조금 오버해버렸다.
“아무래도 오늘 제가 좀 지나쳤나봐요. 편집 잘 좀 부탁드려요. 저 에버가든 팬들에게 욕먹고 싶지 않아서요.”
“물론 저 역시 욕먹고 싶지는 않으니 최대한 신경 쓸 생각입니다만... 솔직히 대체 어떤 걸 버리고 어떤 걸 살려야 하는 지 고민이 되네요. 장면이 하나 같이 좋아서....”
“감독님만 믿겠습니다!”
멤버들은 저녁 식사 후 이어서 댄스 파트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란다.
난 여기서 돌아갈 생각이다.
“계속 숨어 있을래? 나 이제 갈 거야!”
한참을 지나서야 멤버들이 머뭇대며 모습을 드러낸다. 내 앞에 다가온 소녀들은 날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모르겠는데 반지희까지 저럴 줄은 몰랐다.
... 확실히 내가 오늘 좀 지나쳤다.
“큰일이다. 앞으로 경험 더 쌓이고 그러면 연기 할 기회가 많아질 텐데 이렇게 자극에 약해서야...”
난 에버가든 여자 매니저에게 말했다.
“제가 오늘 대표님에게 말할 테니 애들 연기 트레이닝도 본격적으로 시키는 게 좋겠어요.”
“어, 이건 연기 경험 유무와 관련한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나도 눈치는 있다.
내가 말없이 미소 지어 보이자 냉큼 태도를 바꾸고 대답한다.
“알겠습니다.”
“매니저님이 멤버들하고 숙소에 같이 살죠?”
“네. 맞아요.”
“제가 내일 에버가든 세 번째 싱글 후보곡 몇 개 가지고갈 테니 함께 아침 식사하고 들어보시죠.”
“.......!”
그 말에 날 보지 못하던 멤버 전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세 번째 싱글이라는 말에 반응한 것이다.
매니저가 놀라고 기뻐하며 묻는다.
“세 번째 싱글도 김민 프로듀서님이 챙겨주시는 건가요?”
“그래야죠.”
난 멤버들하고 한 명 한 명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에버가든은 제 그룹인데요.”
활짝 펴지는 표정들.
비로소 날 봐주는 소녀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마지막 촬영까지 열심히 하고. 우리는 내일 아침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