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등잔 밑이 어둡다. >
호텔 객실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 저 아이... 네 동생은 너보다도 훨씬 빨리 미국에서 슈퍼스타가 될 수 있을 거다. ]
아이작의 진지한 말이 귓가를 울린다.
과연... 그게 정말일까?
[ 네 동생을 킴벌리에게 맡겨 봐라. 내 아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녀는 프로듀서로서도 천재적인 역량을 가진 사람이야. 사람 보는 눈 하나는.... ]
그러면서 엄지를 치켜드는 그의 얼굴이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그때.
도도도!
“나 다 씻었다!”
철푸덕!
“.......!”
욕실에서 나온 서연이가 달려오더니 그대로 내 배에 다이빙을 하는 게 아닌가?
“이 자식이... 복수가!”
“꺄아아아!”
오빠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나는 가차 없는 보복 가했다.
눕혀놓고 몸으로 팔다리를 찍어 누른 뒤 겨드랑이와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혔다.
“꺄하하하!”
마구 웃던 서연이는 급기야 눈물을 죽죽 뽑았다.
“애를 죽여라, 죽여!”
서연이와 함께 나온 엄마의 일갈에 나의 처절한 복수극은 허망히 끝을 맺었다.
“어엉... 복수할 거야.”
엉망이 되어 울고 있는 서연이의 모습에 흡족함이 밀려왔다. 난 예전부터 서연이를 괴롭히는 게 정말 좋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럴 엄두조차 못내서 아쉬웠는데....
“오빠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몰라! 대답 안 해!”
앙칼진 반응을 무시하고 물었다.
“한국에서 혹시 대표님이 연예인 되고 싶은 생각 없냐며 연습생 제안하지 않았었어?”
“........”
뾰로통한 얼굴.
난 이럴 때의 즉효약을 잘 알고 있었다.
“오빠가 미국에서 제일 맛있다는 최고급 아이스크림 사줄게. 대통령하고 헐리우드 스타들도 즐겨 먹는다는 거야.”
“... 정말?”
애가 달콤한 디저트, 특히 아이스크림에 약하다.
과장 안 하고, 맛있고 새로운 아이스크림 사준다고 하면 순순히 유괴범을 쫓아갈 지도 모른다.
“응.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디즈니 인형도 다 사줄게.”
“어? 진짜로?”
“그래. 그러니까 화 풀고 오빠랑 대화 좀 하자.”
“음. 그런 말 하긴 했지. 나보고 아이돌 데뷔해보고 싶은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셨어.”
역시....
“그래서 어떻게 했어?”
“거절했어.”
“어? 왜? 아이돌 싫어?”
“싫지는 않은데 연기가 더 좋아서. 잭슨 아저씨... 가 아니라 감독님이 앞으로 영화 많이 찍게 해주겠다고 약속도 해주셨어!”
... 감독님이 그런 약속을 했었다고?
“네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원래 그런 말 안 하시는 분인데...아무튼, 그 후로는 별 말이 없었어?”
“누구, 오빠네 대표님? 아니, 계속 말씀을 하시긴 했는데....”
“... 이 양반이. 한 번 아니라고 했으면 순순히 포기하고 물러설 것이지 정말.”
“계속 거절하는 것도 미안해서 몇 번, 회사에 가서 견학도 해보고 연습도 했는데 역시 내 취향하고 안 맞아서 그냥 거절했어.”
“너 아까 아이작, 킴벌리 앞에서 노래 불렀잖아.”
“누가 음악이 싫데? 좋아하는데 아이돌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지.”
“아하.”
벌써부터 가치관이 확고하구나.
장하다 내 동생.
“킴벌리 씨고 가수 하고 싶은 생각 없냐고 물어봤는데 그건 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
아, 이미 킴벌리 씨도 물어봤구나.
“그러면 뭐가 하고 싶냐고 물어 보셔서 연기 하고 싶다고 대답 했더니 알겠다고 대답하시던데?”
“그리고?”
“그리고? 거기서 끝인데...”
“끝?”
“응. 끝!”
굉장히 의미심장하구먼.
어느 새 아버지와 어머니와 우리 근처에 앉아 대화를 경청하고 계셨다.
아버지가 관심을 갖고 물었다.
“왜, 서연이 미국에서 연예인 시키려고 그러냐?”
난 서연이를 흘끔 보며 물었다.
“아까 아이작이 그러더라고요. 서연이 킴벌리에게 맡겨보라고. 슈퍼스타가 될 재능을 타고 났다던데요?”
“그런 말씀을 하셨어?”
“아이작이 다른 건 몰라도 안목은 정말 월드 클래스 수준이에요. 당장 제가 미국에 진출하게 된 계기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날 발굴해서 미국 시장에 끌어 준 사람은 아이작. 그리고 본격적으로 매니지먼트를 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올려 준 사람은 부인인 킴벌리 씨였다.
“그런 두 사람이 점찍을 정도의 인재라면... 정말 미래가 밝다는 뜻이거든요.”
부모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잭슨 감독님, 아이작, 킴벌리 씨... 이렇게 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서연이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이 정도면 미국에서 교육시키는 걸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우리의 시선이 서연이에게 향했다.
아직 어려서 철없는 서연이가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나도 오빠처럼 미국에 진출해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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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12월 31일.
뉴욕 맨해튼 타임스 스퀘어에서는 볼드랍이라는 이름의 신년 행사가 열린다.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해서 공연을 펼치고 함께 카운트다운과 해피뉴이어를 외친다.
이 무대에 서는 것은 가수로서 굉장히 영예로운 일!
바로 그 행사에 내가 참석하게 되었다.
레이지, 레이나와 함께.
미국 주요 방송사에서 동시에 생중계하는 최대의 행사였다. 아티스트로서 이 무대에 선다는 것은 성공을 보장 받은 것과 다름없다.
이른 아침부터 타임스 스퀘어 인근 지역은 통제되기 시작했고, 입장을 기다리는 이들로 인산인해였다.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기저귀까지 찰 정도로 열정을 보이는 이들이 허다하다.
“아이고.... 이렇게 엄청난 행사였어?”
“사람이 진짜 많네.”
부모님은 감탄을 멈추지 못하고 서연이는 아예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엄청난 광경이 이른 아침부터 펼쳐져 있었다.
지금 우리 가족은 걸어서 레이나, 레이지의 연습실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인 타운 유명한 순두부 집에 들러 식사를 하고, 어제 서연이에게 약속한 아이스크림 맛집에 들려 후식도 즐겼다. 그리고 소화할 겸 느긋이 걷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우리 이미 늦은 거 아니냐? 지금이라도 줄을 서볼까?”
“에이... 무슨 말씀을. 설마 그런 생고생 시키자고 이곳으로 모셨겠어요?”
가족의 시선이 나에게 향한다.
난 으스대듯 말했다.
“전망 좋은 레스토랑 예약했으니 그곳에서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편하고 따뜻하게 관람하시면 됩니다. 으하하!”
이미 더 연습할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는 우리 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볼드랍을 위해 세뇨리타를 비롯한 여러 곡들을 특별하게 리믹싱 했으니 연습이 필요하긴 했다.
오전에 만나자마자 죽을 듯이 땀을 흘리며 춤추고 노래를 추는 동안 가족들은 한 편에 서서 우리를 지켜본다.
그런데 서연가 심상치 않다.
녀석에 대한 관심도,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는 녀석의 반응도.
처음에는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더니 갑자지 일어서서 우리 하는 동작들을 슬금슬금 따라하는 게 아닌가?
연말이고, 날씨도 추워서 안무를 꽤나 복잡하고 어렵게 재구성했었다.
춤 연습 한 번도 안 해 본 초보가 따라할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민아. 네 동생 정말 범상치 않은데?”
결국 레이나까지 주목할 정도로 이목을 끌어 모았다.
...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도 서연이가 각잡고 춤과 노래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한 번 자질을 파악해볼까?
“서연아!”
“응?”
“이리 와 봐!”
결국 서연이를 불러 제대로 춤과 노래를 가르쳐봤다.
... 어쭈, 배우는 속도가 굉장히 빠른데?
“대열에 세워놓고 같이 연습 한 번 해보자!”
레이나의 제안.
뭔가, 아까부터 서연이를 보는 눈동자가 귀한 보석이라도 발견한 눈빛이다.
잭슨 감독님, 아이작, 킴벌리 씨까지는 그냥 그렇고 넘길 수 있겟는데... 레이나까지 이렇게 관심을 보이다니.
괜히 내 가슴이 떨린다.
마치 내가 처음으로 공개 오디션을 볼 때의 그 느낌이다.
“나도 춤 잘 추면 오빠하고 같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거야?”
... 정작 서연이는 마냥 신나 보이지만.
그렇게 다시 시작된 연습!
“.......!”
“와우.”
“세상에...!”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서연이가 센터에서 춤을 추는 모습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느끼는 경악보다는 덜할 것이다.
아니... 잠깐 동작만 좀 가르쳤을 뿐인데....
‘이렇게 잘한다고?’
진지한 얼굴로, 배운 춤 동작들을 제대로 펼쳐 보이는 서연이의 모습은 신동 그 자체.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아이였다.
그렇게 춤이 끝나자.
[ 휘이이익! ]
“천재 소녀의 등장인데?”
“뭐야, 민에 이어 민 여동생도 천재였던 거야?!”
“세상에, 저런 불공평한 남매가 있을 수 있다니...!”
사방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지금 이 사람들은 미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굉장한 댄스 크루였다.
“헤헤. 오빠, 나 잘했어?”
하지만 서연이의 해맑은 미소 앞에 난 웃을 수 없었다.
그 천재적인 재능이 너무나도 놀라웠던 것이다.
온 몸에 전율이 밀려왔다.
전생을 포함해 지금까지.자칭 타칭 영재, 천재들을 수없이 봐왔지만 오늘만큼 전율을 안겨주지는 못했다.
서연이가 정말 천재였다니....
그것도 나를 한참이나 능가할 정도의....
레이나와 레이지 커플은 잔뜩 들떠서 말했다.
“이거 정말 굉장한데? 민! 네 동생을 볼드랍 무대에 세워보는 건 어때? 분명 굉장한 무대가 될 거야!”
“나도 레이나 말에 찬성이야! 민, 같이 한 번 해보자!”
굉장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고 있는 서연이.
마음이 복잡해졌다.
서연이 저 녀석.
이전 삶에서는 대체 얼마나 재능 낭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그건 그렇고....
‘분명 대표님도 저 천재성을 발견했을 텐데... 결국 놓치고 말았으니 땅을 칠 정도로 안타까웠겠군.’
아마 볼드랍 무대를 보게 되면 더 배가 아프지 않을까?
... 재미있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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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 여섯시.
볼 레이징을 신호로 행사가 시작됐다.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울 날씨 속에서도 열성적으로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
무대 위에 오른 아티스트들은 그 모습에 불이 붙은 것인지, 그 어느 때보다도 공연에 진심이다.
우리는 출연자들을 위해 마련된 건물 안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와...!시선을 조금 내리니 건물 통 유리창에 달라 붙어 있는 서연이가 보인다.
볼드랍 풍경에 완전히 넋을 잃은 모습이었다.
참고로 부모님은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킴벌리 씨와 함께 느긋이 식사를 즐기고 계신다.
내가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뉴욕, 신기한 곳이지?”
“으, 으응!”
“여전히 가수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거지?”
“그거보다는 연기하는 더 재미있고 좋아!”
신념이 참 확고하다.
아니지.
양궁 그만둔 거 생각하면 꼭 그렇지는 않을 지도...?
“그러면 연기를 하면서 필요하면 춤과 노래도 춰야 한다면....?”
“그건 괜찮아.”
아하.
“그러니까 무조건 연기가 우선이라는 거구나? 방해가 되지 않는 선이라면 다른 것도 상관없고?”
“응!”
이제 확실히 알았다.
‘매니지먼트는 킴벌리에게 맡기는 게 좋겠지? 그리고 괜찮다면 레이나에게 튜터링을 부탁해보는 것도....’
노래를 비롯한 음악적 역량은 배우에게 있어 큰 자산이다.
못해도 상관없지만, 잘한다면 선택의 폭이 굉장히 넓어진다.
배우와 제작진.
양쪽 모두 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리우드에서 음악 실력과 연기력.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전천후 스타에 대한 수요가 굉장히 높아지지.’
서연이라면, 그 시대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슈퍼스타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진짜 천재의 미래를 프로듀싱할 생각에....
출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함께 빌딩을 벗어나 볼드랍 스텝들과 보디가드들의 인도를 따라 무대로 이동했다.
잠시 후, 큐 사인을 신호로 우리는 노두 함께 무대로 뛰어 올라갔다.
[ 와아아아아!! ]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온다.
사실 대부분은 이 시대 최고의 팝 디바, 레이나를 향한 것들이다.
그녀라는 태양 앞에 나와 레이지는 반딧불에 불과하다.
그보다 내가 신경 쓰는 건 서연이다.
추위에 대비해 두춤하면서도 멋스러운 코트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 예쁘게 묶은 서연이는 긴장한 기색이다. 아무리 간이 커도 이런 자리에서는 떨 수밖에 없지.
그러나 음악이 시작되고 서연이의 분위기가 돌변한다.
나와 짝을 이뤄 커플 댄스를 선보이는 서연이의 모습에 사람들이 주목하며 열광한다.
어느 순간에는 미국 주요 방송사의 카메라들이 일제히 서연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타임스 스퀘어.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강탈해 버린 서연이는 그 누구보다도 신나고 즐거운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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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 뉴이어를 위해 지인들과 모여 TV를 시청하던 장진영의 입이 어느 순간 크게 벌어졌다.
“... 서연이잖아?”
아니, 김민은 그렇다 치고....
서연이가 왜 볼드랍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는 거야?!
‘대체 어째서?!’
“저 여자애, 혹시 김민 동생이야?”
“맞는 것 같은데? 둘이 닮았잖아?”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웃고 떠들던 이들도 어느 순간에는 TV 속 소녀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뒤집어 지기 몇 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