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파문의 중심 (2) >
레이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아직 모른다!’
‘그래도 혹시...?’
... 라는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던 나였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아,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휘몰아친다.
심지어 레이지조차도 단 하나의 상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 장르 필드, 힙합 중 베스트 랩송과 랩 퍼포먼스 였는데 여기서조차도 모든 상이 불발됐다.
이때부터 시상식장 분위기가 상당히 안 좋아졌지만 난 아직 희망을 놓지 않았다.
세뇨리타!
누가 뭐래도 올해는 세뇨리타의 해였다.
전 세계가 세뇨리타를 불렀고, 이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첼린지 열품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Song Of The Year(올해의 노래상!)
사실 우리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걸 기대하고 여기까지 온 거였다.
그런데.
“하....”
이조차도 불발!
백인 여자 가수가 받았다.
라일라 캠벨.
흑인 음악 중심에 레이나가 있다면 백인 팝 음악 중심에는 바로 그녀, 라일라 캠벨이 있었다.
더욱이 그녀의 아버지는 컨트리 송의 대가이자 그래미 제너럴 필드 수상자인 유명 뮤지션이기도 했으니 미국 대중음악 씬에서는 성골이라도 봐도 좋겠지.
그래도... 그래도 이건 좀 너무 하지 않나?
난 황당하고 억울해서 미칠 지경인데 레이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말했지? 기대를 하지 말라고.”
“.......”
“얼굴 펴. 의연하게 대처해.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어.”
그 말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동료 가수들, 특히 백인이 아닌 이들이 우리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극소수의 동양인 뮤지션들은 우리를 대신해 당장이라고 폭발할 듯한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애써 미소 지은 채 라일라 캠벨에게 박수를 보냈다.
내 첫 그래미 어워드는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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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미가 미쳤어. 올해는 누가 봐도 한국에서 온 천재 소년의 해였잖아. 아니, 다 떠나서 세뇨리타조차도 단 하나의 상도 받지 못했다니... 그래미는 앞으로 보이콧이다! ]
[ 이건 정신 나간 일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
김민의 무관 소식은 제일 먼저 현장에 참석했던 이들의 멘탈을 뒤흔들었다.
정도가 있지.
한 해, 전 세계 대중 음악계에서 가장 핫했던 뮤지션에게 무관이라니...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헨리 윌리엄스와 아이작 이스트.
두 거물 뮤지션은 그래미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 여기서 뭘 더 해야 상을 주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
[ 이건 정말 너무도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
특히 헨리 윌리엄스는 그래미를 21회나 수상했던 작곡가였다. 그런 그까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니 이번 일이 더 크게 이슈가 됐다.
결국 이 소식은 아시아.
특히 수상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기대하던 대한민국을 강하게 뒤집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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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누가 뭐래도 올해는 우리 민이가 최고였는데...!”
김민의 수상 불발 소식을 접한 장진영은 물건을 집어 던지고 고함을 지를 정도로 분노했다.
회사 직원들도 그 모습에 공감했다.
자신들도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민의 무관 소식은.
그의 분노는 회의실에서도 이어졌다.
“이럴 거면 아예 노미네이트를 하지 말던가...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거야? 대체 이래서 뭘 얻으려고 하는 거야?”“시청률이죠.”
이정연 팀장에게 쏠리는 시선.
“그래미 어워드는 오래전부터 비슷한 일로 말이 많았어요. 흑인들에 대한 차별심이 극심했죠. 하물며 동양인에 대해서는....”
미국에서 흑인이나 히스패닉보다 더 차별대우를 받는 인종이 바로 동양인들이었다.
안 그래도 흑인 음악에 박한 시상식.
동양인이 흑인 음악을 해버렸으니....
“더욱이 이번에는 확실히 밀어줄 가치가 있는 성골이 등장했죠.”
“라일라 캠벨.”
누군가의 말에 이정연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벌써부터 레이나의 라이벌로 여겨질 정도로 굉장한 커리어를 쌓고 있는 백인 여자 가수죠. 아버지는 그래미 제너럴 필드를 수상한 전설적인 컨트리 송 가수고요.”
거기까지 말한 이정연 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그래미는 당장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에요. 레이나와 레이지, 김민의 본상 노미네이트로 수상을 기대한 흑인, 동양인 시청자들이 대폭 늘어났고 이것이 생방송 시청률 상승으로 이어졌으니까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올해 그래미 어워드는 모처럼 시청률 기록을 달성했을 정도로 많은 관심이 모였다.
“지금이야 많은 사람들이 분개하지만 금방 사그러들거에요. 실제 올해 라일라 캠벨의 퍼포먼스가 굉장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녀는 라일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팬덤을 가졌죠.”
찬란한 금발, 새하얀 피부, 아름다운 이목구비.
라일라 캠벨은 대중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비주얼을 갖춘 스타였다. 거기에 싱어 송라이터로서 역량도 굉장하다!
지금도 기세가 굉장하지만, 미래 가능성은 그보다도 더 굉장하다는 평가가 대세였다.
아직 20대 초반의 어린나이였기 때문이었다.
“2월에 있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수상을 기대해봐야죠. 그래도 그곳은 인종 차별 이슈가 상대적으로 덜한 곳이니 기대해도 좋을 거예요.”
그래미와 함께 미국 3대 대중음악 시상식으로 꼽히는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이 시상식은 대중들의 투표로 수상자를 결정한다.
그 점을 떠올린 장진영이 화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래. 그곳이라면 수상을 기대해도 좋겠지.”
그리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에서라도 뭔가 상을 좀 받았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민이 녀석, 진짜 크게 실망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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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래미 어워드에서 받은 충격과 실망감을 잊기 위해 몸부림쳤다.
나쁜 그래미.
내가 기도까지 했는데... 어떻게 상을 하나도 주지 않을 수가 있어?!
누가 본상 달래?
장르 필드, 그게 아니면 다른 분야에서라도 하나 정도는 줄 수 있었잖아!
올해는 정말 굉장했던 것 같은데...!
소파 위에서 실망감에 몸부림치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다니엘이 위로를 건넸다.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수상은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거기는 팬 투표로 결정된다며?”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마시던 샬럿이 한 마디 던졌다.
“투표라면 오히려 라일라 캠벨이 더 유리하지 않아? 팬 규모로 따지면 레이나, 레이지, 김민 세 사람 합친 것보다도 훨씬 클 텐데.”
“........”
할 말을 잃은 다니엘.
난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힘없이 중얼거렸다.
“맞아. 현 시점에서 인기 싸움이라면 라일라 캠벨을 당해낼 수 있는 뮤지션이 얼마 없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북미뿐만 아니라 영국과 유럽에서도 라일라 캠벨 인기가 굉장한데.”
“그거야....”
“심지어 라일라는 활동도 굉장히 열심히 하잖아. 올해 발표한 음원만 대체 몇 갠지....”
이어지는 라일라 칭찬에 다니엘이 미묘한 눈빛으로 묻는다.
“샬럿. 너 혹시 라일라 캠벨 팬이야?”
“.......”
멈칫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벗어나는 샬럿.
다니엘이 펄쩍 뛰었다.
“맞구나! 이 배신자! 거기 서!”
또 다시 툭탁 거리기 시작한 둘을 내버려 두고 난 다시 소파에 널브러졌다.
샬럿의 말이 틀리지 않다.
사실 그래미 어워드 이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직 미국은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그런 곳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내가 라일라 캠벨 이상의 슈퍼스타가 되어야 해.’
전무후무.
비교할 대상조차 없는 최고의 슈퍼스타가 되어야한다.
‘마이클 잭슨처럼 말이지.’
단순히 빌보드 1위 많이 하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
그런 기록으로는 역대 그 누구보다도 화려한 레이나조차도 쓴맛을 보는 곳이 미국 어워드였다.
차트 순위 외적으로도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겨야 한다.
그래서 미국 대중 음악계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닌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일단은 내 자신부터가 슈퍼스타가 되는 것이 우선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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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촬영장에 복귀한 나를 <1980 브로드웨이> 배우, 스텝들이 따스하게 맞아줬다.
“그래미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야! 올해 최고의 노래는 바로 네가 만든 노래들이었다고!”
“아쉽긴 하겠지만 좌절 할 필요는 없어. 열심히 하다 보면 후세에서 네가 옮았다는 것이 증명될 테니까.”
솔직히 말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마치 본인들의 일처럼 같이 화를 내며 욕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래미 쇼크를 빠르게 잊고 더 촬영에 몰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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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얼마 후, 미국 최대의 이벤트 중 하나인 슈퍼볼이 시작됐다.
일찍 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다 함께 모여 슈퍼볼을 시청했다.
미식축구에 열광하는 사람이 무척 많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나온다! 레이나하고 레이지야!”
“우오오오!”
우리 영화에 출연하는 레이나와 레이지 커플이 하프타임 쇼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두 사람이 나에게도 제안을 했지만 거절했다.
주연으로서 영화 촬영에 더 집중해야 했으니까.
결정적으로 처음부터 나에게 온 제안도 아니었다.
세뇨리타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저 두 커플이었다.
14분.
엄청난 규모의 무대를 휘어잡는 두 커플을 난 응원의 마음으로 조용히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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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CG가 거의 사용되지 않은 영화였고, 대부분이 스튜디오가 아닌 로케이션으로 진행됐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스튜디오 세트장을 활용했을 뿐.
이는 잭 웰슨 감독님이 현장감을 중요시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맨해튼은 1980년대 당시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많았다.
이런 이유들로 촬영 기간이 생각 이상으로 길어졌는데 이는 현지 촬영 과정에서 잡음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임대 해주기로 했던 극장 일장이 갑자기 바뀌어서 취소를 통보하거나, 레이나 레이지 로케이션 촬영 씬 때 현지 팬들로 난리가 나거나 등등.
그래도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촬영장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고, 주연인 나와 샬럿을 포함, 모두가 즐겁게 작업에 임했다.
촬영 막바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가 열렸다.
빌보드, 그래미와 함께 미국 3대 대중음악 시상식으로 유명한 행사였다.
당연히 나는 촬영 일정 문제로 참석 하지 못했다.
예상대로 라일라 캠밸이 휩쓸었다.
를 동시에 받았고, 행사의 오프닝을 장식했다
그렇다고 레이나가 찬밥 신세가 된 것은 아니다.
제너럴 중 Single Of The Year, Collaboration Of The Year를 레이지와 함께 받은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상을 받았고 엔딩을 장식했다.
사실 나도 몇 개 분야에 노미네이트되긴 했지만 결과는 뭐... 이하 생략!
이제 3대 대중음악 시상식 중 남은 행사는 5월 빌보드 뮤직 어워드.
앞서 진행된 두 행사에서 쓴맛을 본 것도 있고, 나름 깨달음을 얻은 것도 있어서 아무런 기대도, 감흥도 들지 않았다.
당장은 <1980 브로드웨이> 촬영을 멋지게 마무리 하자는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