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마지막 촬영 >
이른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머리맡에 손을 뻗어 리모컨을 붙잡았다.
버튼을 누르자 전통 커튼이 반응하며 좌우로 벌어진다.
곧, 4월의 뉴욕이 창 너머에 펼쳐졌다.
푸른 하늘, 그 아래에 초록빛이 만연해 있다.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쾅쾅!
[ 오빠! 샬럿 언니가 아침 식사 다 됐으니 빨리 나오래! ]
과격한 노크 소리와 함께 서연이의 외침이 들려온다. “알았어. 나갈게.”
한껏 기지개를 펴고 침실을 나섰다.
거실에 앞치마를 입은 샬럿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잠이 많은 다니엘은 잠옷을 입은 채 식탁에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서연이는 학교 갈 준비까지 이미 끝마친 채 식사 준비를 돕고 있다.
이것이 한 달 전부터 시작된 아침의 풍경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각기 장소로 헤어졌다.
다니엘은 존로 액션 스쿨.
샬럿은 보컬 트레이닝 센터.
나는 서연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촬영장으로 향할 예정이다.
거리를 걸으며 물었다.
“뉴욕 생활은 좀 어때? 할만 해?”
“응. 재미있어. 거리도 예쁘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아! 나 학교에서 친구 많이 사귀었어!
빈말이 아니라 내가 봐도 서연이는 적응을 굉장히 잘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활기찬 편이었지만 여기서 훨씬 더 생기가 넘치는 것 같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서연이가 다니는 미들 스쿨이 있었다. 일단 외관부터가 굉장히 고급스러운데, 부잣집 출신 애들이 많이 다니는 뉴욕 최고 명문 중 하나다.
“서연이다!”
“서연!”
“안녕!”
참 신기하지.
유학 온 지 한 달 밖에 안 된 애가 저렇게 친구를 많이 사귀다니...내 동생이지만 나와는 여러모로 다른 아이다.
타고난 인싸라고 해야 할까?
벌써 마음이 급해져서 친구들에게 달려가려는 서연이를 붙잡아 세웠다.
“기다려 봐.”
그리고 지갑에서 용돈을 두둑이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먹어.”
“어? 이런 거 필요 없는데....”
“빨리 받아.”
머뭇거리던 서연이의 손에 돈을 억지로 쥐어준다.
어느 나라든, 무리에서 대장 노릇을 하는 사람은 돈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미국 애들도 방과 후, 삼삼오오 모여 좋은 곳, 맛있는 장소 찾아 돌아다니는 건 똑같더라.
“학교 마치고 친구들하고 놀다 와.”
“저번에 준 용돈도 아직 남았는데....”
“친구들 기다린다. 빨리 가 봐.”
“... 응. 고마워 오빠!”
서연이게는 다 해주고 싶다.
실제로 뉴욕에 유학 온 뒤로는 틈이 날 때마다 좋은 곳을 데리고 다니며 풍부한 경험을 선물 중이다.
그런 게 다 좋은 자산으로 쌓이는 법 아닌가?
서연이가 친구들과 학교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몸을 돌렸다.
촬영장 가기 전에 그곳부터 들려야겠군.
@
도착한 곳은 허드슨 야드의 레이나 녹음실.
요 근래, 내 모든 곡 작업은 바로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모든 장비에 전원을 넣은 뒤 바로 어제까지 작업했던 결과물을 확인해본다.
디스토션이 강하게 걸린 킥 드럼과 흑인 음악 표준 악기라고 불릴 정도로 대중화 된 808 사운드의 조화.
굉장히 잘게 쪼개지는 박자.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트랩 힙합 같지만...
두우우...우우웅?!
808 베이스를 그대로 쓰지 않고, 재가공을 해서 마치 미끄러지는 듯한 효과를 주는 글라이드 기법이 기존 트랩과 다른 느낌을 준다.
정박을 타던 드럼 비트가 갑자기 엇박을 타기도 하고, 가사는 내가 쓴 거라고 믿을 수 없이 폭력적이고 험악하다.
박자를 잘게 쪼개는 악기는 카운터 스네어라는... 일종의 보조 스네어 같은 것이다. 클로즈드 하이햇이 하던 역할을 대신 한다.
이것이 바로 드릴 힙합.
트랩에서 파생된 음악으로 문자 그대로 험악한 느낌을 주는 힙합 음악을 말한다.
시카고에서 시작되긴 했지만 영국에서 상업화에 성공, 2019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는 장르다.
이걸 몇 년 앞당긴 현 시점에 내가 먼저 시도하는 것이다.
“잭 녀석이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는데.”
저번 달, 그러니까 3월 초.
사이먼 블랙이 앨범 하나를 발표했다.
트랩 힙합으로 꽉꽉 채워진 곡이었는데 그 중 가장 주목을 받은 곡은 .
말랑 말랑하고 시원한 느낌의 대중적인 랩 음악이다.
이 음악이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오르더니 발매 3주 만에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그래.
이 작업실에 처음 방문했을 때 영감을 받아 제일 먼저 작곡했던 노래였다.
본래 레게 팝 스타일로 만들었다가 왠지 마음에 안 들어서 중간에 뭄바톤 스타일로 바꿔 버렸던 그 음악.
첫 빌보드 1위에 사이먼 블랙은 굉장히 기뻐했고, 성대하게 축하 파티를 열었다.
모두가 축하해주는 그 자리에서 유독 삐져서 술만 때려 붓는 인간이 있었으니 바로 잭!
이해할 수밖에 없다.
눈앞에서 놓쳤던 곡이 보란 듯 성공해 버렸으니 뭐....
그래서 잭을 달래 줄 겸, 약속했던 곡을 지금 마무리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녀석의 포악하고 와일드한 성정에 걸맞은 드릴 힙합 음악으로!
“... 이 정도면 된 것 같군.”
마침내 곡을 완성했다.
제목은
곡 내용 중 날 거슬리는 널 쏴 죽여 버리겠다는 가사 내용과 총 소리가 삽입됐는데, 바로 그 소리를 표현한 단어다.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곡을 들어본다.
분노, 살의, 증오, 욕설....
세상에 상대를 얼마나 미워해야 이런 가사가 나올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과격하고 잔혹하다.
곡을 모두 들어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잭 녀석과 찰떡인 노래야.
어디 보내볼까?
... 다 보내면 재미없으니 티저 올리듯 일부를 잘라서 보내야겠다.
몸이 닳도록!
[ 이게 누구 노래~게? ]
짧은 메시지와 함께 후렴구를 자른 음원 파일을 보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 Bullshit! What the Fuck is That!? ]
아주 욕설을 그냥....
“뭐야. 별로야? 그렇게 싫어? 흠, 그러면 지워야 하나?”
[ 미쳤어? 지우긴 뭘 지워? 당장 내놔! 그거 내 곡이지? 내꺼 맞지? ]
“글쎄, 어떨 것 같아? 누구 곡일까?”
[ 내 곡이잖아! 저건 무조건 내 곡이어야 해! 듣자마자 느낌이 왔단 말이야. 이 빌어 처먹을 곡은 분명 날 위해 태어난 곡이야! ]
“으하하!”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 너 녹음실에 있는 거지? 나 우X타고 가고 있으니까 딱 기다리고 있어! 아무도 부르지 마! 너 혼자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
“알았으니까 빨리 와. 나 오후에 촬영가야 돼.”
[ 금방 도착할 테니 조금 만 기다려. 넌 뒤졌어. 가서 엎어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
그렇게 통화가 일반적으로 끝났다.
죽이니 살리니... 그만큼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뜻이겠지만 표현 좀 좋게 해주면 안 되나?
하여튼 욕쟁이 녀석....
“빨리 음악 틀어 봐!”
정말 빨리도 도착했다.
전화 통화한지 10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너 어디 있다가 온 거야? 근처에 있었어?”
“지금 그제 중요해? 음악! 음악을 틀어 달란 말이야! 방금 그거!”
눈빛이 아주....
더 시간 끌면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다.
혀를 차면서 음악을 재생했다.
“볼륨 높여!”
그리고 녀석은 눈을 감고, 트랩 리듬을 타며 음악을 듣는다.
“바로 이거야.”
이게 뭔데?
어쨌든 굉장히 감격스러워하고 있는 건 알겠다.
그런데 중간 중간 드럼이 엇박을 타며 기존 트랩 리듬, 플로우와 다른 전개로 음악이 진행되니 녀석이 당혹감을 보인다.
음악이 끝나자마자 물었다.
“트랩인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이게 대체 무슨 장르야?”
“드릴 힙합.”
“드릴? 시카고 드릴 말하는 거야?”
“아무튼 어때, 곡은 마음에 들어?”
“응. 완전 마음에 들어, 이 곡이라면 나도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 그건 조금 자신 없는데.
“이거 나 줄 거지? 내 곡이지? 응?”
“그게 아니라면 왜 너에게 들려줬겠어? 가져.”
“좋아! 아, 이 곡 제목은 뭐야?”
오른손으로 총 모양을 만든 뒤, 녀석을 겨누며 말했다.
“Bang!”
@
촬영장으로 가는 길.
사이먼 블랙이 전화를 걸어왔다.
[ Bro! 이야기 들었어. 잭 녀석에게 기가 막히는 곡을 선물했다며? ]
난 어처구니가 없어서 반문했다.
“그새를 못 참고 자랑한 건가?”
[ 곡도 들려주던데. 드릴 힙합, 제목이 Bang! 이라며? ]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형제 같은 사이라도... 아직 녹음도 하지 않은 곡을 이렇게 막 유출시켜도 되는 건가 싶었던 것이다.
... 뭐, 내 손을 떠난 곡이니 잭 녀석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그래서, 네가 듣기에는 어때? 뜰 것 같아?”
[ 말해 뭐해? 나 그 곡 듣고 전율했어. 와, 어쩌면 이렇게 잭 녀석에게 딱 맞는 곡을 쓸 수 있는 거지? 넌 역시 대단해! 천재야! ]
단순 립 서비스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 불안 불안하다.
“그 곡으로 1위 못하면 사람 차별하는 거냐며 총 들고 쫓아올 지도 몰라.”
[ 잭이 포악하긴 하지만 형제에게까지 그럴 만큼 경우가 없는 놈은 아니야. ]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 잘 될 거야. 아무튼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이런 식으로 좋게 해결이 된 것 같아서 기쁘네. ]
경우 없기로는 잭 녀석 못지않은 사이먼도 내심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가 부르는 게 맞아. 어둡고 잔혹한 걸 좋아하는 잭과는 안 울리는 곡이야.”
[ 그건 맞아. 하하하! ]
웃고 떠드는 사이 촬영장에 도착했다.
“나 이제 일 시작해야겠다.”
[ 나중에 시간 되면 보자고. bro 덕분에 굉장히 바빠져서 당분간 얼굴 보기 어려울 것 같아. ]
“바쁜 게 좋은 거야. 열심히 해.”
통화를 마치고 현장을 지휘 중인 잭 웰슨 감독님께 다가갔다.
“감독님.”
“촬영 시간이 아닌데 왜 이렇게 일찍 와서?”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날 포옹하며 굉장히 따뜻하게 맞아주신다. 그 동안 함께 한 시간 덕분에 거리감을 모두 없애고 따뜻하게 대해주기 시작했다.
난 씩 웃으며 말했다.
“오늘 마지막 촬영일이잖아요. 일도 좀 돕고 그러려고 왔죠.”
때마침 트럭 한 대가 도착했다.
미슐렌 스타 쉐프가 만든... 치킨과 스테이크가 포함된 도시락 세트가!
“와우....”
“으리으리한 도시락이군.”
도시락을 하나 씩 받아든 배우, 스텝들이 날 바라본다.
“이거 또 민이 산거지?”
“민 밖에 더 있겠어?”
“촬영 기간 내내 신세를 지는 군.”
“이 정도면 출연료를 우리에게 산 음식 값으로 다 쓴 게 아닐까 싶은데....”
난 감독님에게 메가폰을 빌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촬영 현장이니 만큼 평상시보다 더 신경 써서 마련했어요. 맛있게 드세요! 아, 참고로 뒤풀이 파티는 따로 준비했으니 모두들 참석 부탁드려요!”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민! 잘 먹을게!”
“고마워!”
그렇게 시작된 촬영장에서의 마지막 식사.
잠시 후.
보컬과 댄스 트레이닝까지 마친 샬럿이 커피 트럭과 함께 등장해서 큰 환호를 받았다.
오후 네 시.
마침내 마지막 촬영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