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아트 디렉터 (1) >
“컷!”
감독님의 외침과 함께 촬영장에 정적이 흘렀다.
모두의 이목이 촬영장면을 모니터하는 잭 웰슨 감독님께 쏠려 있었다.
잠시 후.
척!
감독님이 머리 위로 손을 올려 엄지를 치켜드신다.
그것이 신호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촬영 끝!
나와 샬럿은 서로를 힘껏 끌어안으며 감격을 나눴다. 뒤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우리는 촬영이 무사히 끝난 것은 축하하며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겼다.
1월에 시작된 1980 브로드웨이 촬영은 4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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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풀이 파티 자리.
지금까지 냉철한 카리스마만 보여주던 감독님이 처음으로 술에 취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스스럼없이 다가와 사람들과 어깨동무하고, 건배하며 농담을 즐기기도 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내게, 샬럿이 다가와 말했다.
“정말 재미있었지?”
“음?”
“촬영 말이야.”
“아, 물론이지. 진짜 재미있었어.”
“후속 작에서도 같이 연기하면 좋을 텐데... 어때?”
눈을 반짝이는 그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진 얼굴을 보고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얘가 언제 이렇게 컸지?’
처음 런던에서 봤을 때는 아직 꼬꼬마 티가 확연했는데, 날이 갈수록 성숙해지더니 두 번째 영화 촬영을 마친 지금은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내가 설레여 했던.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미녀 여배우로서의 자태가 풍기기 시작한 것이다.
감정을 들킬세라, 헛기침을 한 번 터트리고 짐짓 고민하는 척을 한다.
“후속작이라...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
“응! 아직 아무것도 말 해주지 않았잖아! 작업은 얼마나 됐는지, 출연진은 어떻게 되는지.”
“출연진이라....”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단 미안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네. 후속작에 우리 둘은 출연하지 않을 거야.”
“아....”
실망한 얼굴.
“그리고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났는데... 넌 그 후의 현실적인 이야기가 궁금해? 그게 보고 싶어?”
“그건 아니지만....”
우물거리던 샬럿이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이 멤버 그대로, 그리고 너랑 내가 주연으로 다시 한 번 연기를 하는 걸 바랬었단 말이야.”
“박수 칠 때 떠나는 법을 배우렴.”
사실.
나와 샬럿이 후속작에도 이어서 출연하는 문제가 거론되긴 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거절했다.
[ 1편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완전히 끝난 거예요. 이제 2000년대에 맞는 새로운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게 여러 면에서 훨씬 좋을 거예요. ]
헨리 윌리엄스 작곡가님, 올리비아 퀸 작가님은 내 말에 적극 찬성했는데 의외로 감독님이 끝까지 미련을 보이더라.그만큼 우리와의 촬영이 좋았다는 뜻이니 난 기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거절했다.
[ 2000 브로드웨이는 제작 기간을 넉넉하게 잡고 충분히 구상하고 나서 여유 있게 추진해 보자고요. ]
서둘러서 좋을 게 없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1편의 흥행 성적과 관객 평가가 별로라면....
‘굳이 추진할 이유가 없지.’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사람 일은 혹시 모르지 않나?
여러모로 대비를 해두는 게 좋겠지.
“같이 하고 싶었는데....”
입술이 댓발 튀어나온 샬럿을 달래줄 겸.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며 말했다.
“너를 위해서는 또 다른 계획을 추진 중이니 기다리고 있어 봐.”
“무슨 계획?”
우연의 일치일까?
그 순간 사람들과 술 파티를 벌이던 디즈니 프로듀서님의 시선과 마주쳤다.
난 씩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결정 되면 말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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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서연이를 학교에 데려다 준 뒤 뉴욕 시 첼시에 위치한 레이나 사무실로 이동했다.
“민, 왔어?”
“제가 늦은 거 아니죠?”
“아직 회의 시작도 하지 않았어.”
“그러면 지금은 뭐하고 있었던 거예요? 들어오면서 보니 굉장히 진지하던데.”
“서연이 연습 영상 좀 보고 있었어.”
“서연이요?”
“어제 오후 촬영한 건데, 볼래?
서연이는 학교에 다니며 연기, 노래, 댄스 트레이닝을 병행하고 있는 중이다.
스케줄을 빡빡하게 잡은 건 아니다.
자유 시간도 좀 주어져야 애가 숨을 쉬지.
레이나가 타블렛 pc을 내게 건넸다.
영상을 다시 재생하니...
[ .......! ]
레이나의 알앤비 히트곡을 열창하고 있는 서연이의 모습이 펼쳐진다.
영상이 끝나고.
“어때?”
레이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날 보고 있다.
난 솔직한 반응을 보였다.
“... 내가 알던 그 꼬꼬마 서연이가 맞나 싶을 정도예요. 이 녀석, 재능이 이 정도였어요?”
“깜짝 놀랐지?”
“보시면 알잖아요. 저 지금 진짜 놀랐어요.
립 서비스가 아니라, 정말 놀랐다.
서연이가.. 레이나의 노래를 이렇게 잘 부를 줄은 상상도 못했던 까닭이다.
“혹시 동생이 그렇게 노래하는 거 처음 봐?”
“네. 부모님께 보여주면 영상 진위 여부를 의심할 거예요. 이거 혹시 합성이 아니냐며....”
웃음이 터져 나온다.
“아니,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예요?”
“나도 깜짝 놀랐어. 재능이 특출나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시작한 레슨이었는데... 이 정도로 타고났을 줄은 몰랐거든. 한 번 말하면 척척 알아 듣고 그대로 소화해내는데....”
몸을 감싸며 부르르 떠는 레이나.
“나도 어렸을 때 천재 소리 꽤나 듣고 자랐거든? 내 스스로를 천재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어. 천재라는 건 서연이 같은 애들에게 어울리는 단어야.”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스텝들.
“성장하는 과정을 우리만 지켜보는 건 좀 아깝지 않냐. 지금 준비 중인 앨범에 피처링으로 한 번 가용해 보는 건 어떨까. 지금 그 이야기 중이었어.”
“서연이를요?”
난 다시 한 번 놀랐다.
지금 레이나는 정규 앨범 마무리 작업 중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피처링으로 가용하겠다는 뜻은....
‘그 정도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온다.
“그래서 결론은 어떻게 났어요?”
“해보기로 했어. 디즈니 프렌차이즈 스타로 키울 생각이잖아? 내가 먼저 발굴했고, 내가 키운 내 제자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생각이야.”
일찌감치 도장을 찍어두겠다는 것이다.
굉장한 일이다.
‘서연이... 정말 나보다도 빨리 슈퍼스타가 되어 버리는 건가?’
솔직히 난 아직도 크게 자신은 없다.
흔히 슈퍼스타라면 눈앞에 있는 레이나 수준의 인지도를 가진 연예인을 말하는 건데... 이건 정말 웬만큼 인기가 많아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난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김민의 동생 김서연이 아니라, 김서연의 오빠 김민이 되는 날이 정말 닥쳐올 지도 모르겠네요.”
사담은 여기까지.
내가 찾아온 건 다른 이유 때문이다.
“이번 정규 앨범 재킷 사진 리스트야.”
바로 이것.
“이번에 네 곡이 총 세 곡이 실리게 됐잖아. 해당 곡의 재킷 디자인 설정에 네 의견이 필요해서 불렀어. 확인해 보고 의견 줘.”
출력된 앨범 재킷 디자인 샘플이 파일첩이 그득했다.
꿈속에서 들었던 레게 기타 사운드를 기반으로 만든 시원하고 달달한 여름 러브 송이다.
이번 레이나 정규 앨범 타이틀이다.
이 외에 알앤비 음악 두 곡을 포함, 총 세 곡을 수록하게 됐다.
차례대로 디자인 샘플을 확인해보며 말했다.
“수위가 전반적으로 좀 센데요?”
“다 너 때문이잖아. 하나 같이 엉큼한 곡을 줘서....”
나를 향해 눈을 흘기는 레이나.
음, 딱히 할 말이 없다.
도 그렇고 다른 두 곡도 은근한 섹스어필이 들어간 곡이다.
아주 은근하게.
내가 무슨 발정이 나서 그런 건 아니고, 나름 미국의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이번 그래미 등의 주요 시상식에서.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레이나가, 라일라 캠벨에게 큰 영애를 모두 빼앗기는 것을 보고 생각한 게 많았다.
그녀는 보다 더 대중 친화적인 아티스트가 될 필요가 있었다.
곡, 무대, 패션. 모든 부분에서.
“과한 건 모두 빼요. 레이나는 이렇게까지 섹시함을 어필할 필요가 없어요. 워낙 타고 났으니까요.”
내 기준에 과한 것들은 가차 없이 날려 버렸다.
의상, 포즈, 표정....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밝게 미소 짓는 모습이 훨씬 매력적이에요. 괜히 입술 깨물면서 치명적인 척 하고... 앞으로 그런 거 시키지 말아요. 의상도 좀 남들 입을만한 걸 입히고요. 무슨 패션쇼에나 어울릴 괴상망측한 것 좀 입지 말고.”
수많은 샘플 이미지 중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건 겨우 한 두 장정도.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제 선택은 이 정도로... 응?”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요상하다.
레이나 포함, 다들 나를 묘한 얼굴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회의에 참여했던 포토그래퍼가 말했다.
“이제 보니 레이나 전문가는 따로 있었네.”
그것을 시작으로 다들 한 마디씩 한다.
“섹시함을 타고 나서 더 어필할 필요가 없다. 음, 맞는 말이야.”
“안목이 있네. 선택한 이미지가 밝고 자연스러워서 마음에 들어.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색다른 매력이 가득해.”
“의상팀 똑똑히 들었지? 남들 입을만할 걸 입히라잖아! 패션쇼 좀 그만하고.”
이건 대체 무슨 반응인건지.
당혹감을 느끼며 고민하는 내게 레이나가 웃으며 말했다.
“나 들으면서 감동했어. 민, 네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아서.”
“뭐... 워낙 팬이니까요?”
아무래도 그녀는 뭔가 엄청난 결심을 한 것 같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번 앨범. 네 감성대로 꾸며보는 게 어때?”
그 말의 의미를 잠시 고민해보고 조심스레 묻는다.
“저보고 아트 디렉터를 맡으라는 건가요?”
“응.”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전 그쪽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데요?”
“뮤지션 아트 디렉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실무 능력보다 아티스트와 컨셉에 대한 이해도야. 그리고 기획력이고.”
“음....”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굉장히 인기 있는 걸그룹들을 네가 프로듀싱 하잖아. 음악, 춤, 패션, 모든 부분을 직접 지휘한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스텝들이 반응했다.
“그래? 나도 보고 싶어! 보여줘!”
“지금 같이 보면 되지 뭐. 뭐라고 검색하면 돼?”
갑자기 엔 플라워와 에버가든 뮤직 비디오, 화보 이미지 같은 것들을 다함께 감상하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상황 전개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그런 나와 상관없이, 스텝들은 하나하나 두 그룹의 컨셉을 상세히 뜯어보며 감탄했다.
“이거 컨셉이 재미있는데?”
“정말 민이 이 모든 것을 만든 거야?”
난 당황해서 변명했다.
“아니, 잠깐만요, 내가 다한 게 아니에요. 제가 총괄 프로듀서이긴 하지만 곡 작업 외에 다른 건 아이디어 정도만 제시했을 뿐이에요. 실제 작업은 다른 담당자들이....”
레이나 이번 앨범의 아트 디렉터가 말한다.
“네가 한 그게 바로 디렉팅이잖아.”
“.......”
그리고 레이나를 향해 의견을 냈다.
“같이 작업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럼 결정된 거지?”
레이나가 내 앞에 있던 이미지 샘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모두 치우고 자켓 작업 처음부터 다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