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아트 디렉터 (2) >
이번 앨범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생활 속에서 비춰지는 다양한 매력들에 대해 담았다.
매력을 발산하는 대상은 나일수도 있고, 친구나 동생으로만 생각했던 사람일 수도 있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점원일 수도 있지.
“... 기껏 이렇게 좋은 컨셉을 잡아 놓고 의상은 이상한 패션쇼에 스튜디오 화보도 온갖 치명적인 건 다 때려 박으면... 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흠....”
안 드나보다.
아트 팀 한 명이 애써 변명했다.
“그래도 사진이 임팩트가 있어야 하니... 그리고 쓸데없이 시선이 너무 분산되는 것도 좋지 않아요.”
“해보고 말합시다.”
당장 떠오르는 컨셉들을 마구 쏟아낸다.
잠자고 일어나서 하품하는 모습.
약속 장소에서 친구들과 만나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
대화를 나누며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모습.
카페에 앉아 매력적인 점원을 흘끔거리며 대화하는 집에 일을 도와주러 온 오빠, 친구, 혹은 동생이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
“굳이 다른 사람이 나올 필요가 없겠죠? 결국 이 앨범의 주인공은 레이나고, 그녀가 일상에서 느끼는 다양한 매력에 대한 반응, 혹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중요하니까요.”
항상 하던 것들이다.
구글링으로 내가 생각한 이미지에 적합한 참조 이미지를 찾아 간단한 코멘트와 함께 짧은 기획서를 만드는 일.
이전 삶에서 곡을 팔 때는 그냥 좋은 곡 만드는 것만으로는 안 됐다. 곡에 걸맞은 좋은 아이디어도 내줘야 기획사들이 좋아했다.
이게 이번 삶에서도 이어졌다.
곡을 만들면서 함께 간단한 컨셉 기획을 짜버릇 했던 습관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큰 효력을 발휘한다.
“짜잔, 어때요?”
엑셀 파일에 빠르게 완성한 컨셉 기획서를 큰 화면으로 보여주니.
“와우.”
“어메이징!”
“한 눈에 파악하기가 쉬운데?”
“아니... 아트 기획을 이렇게 간단히 끝낼 수 있다고?”
다들 놀라는 모습이다.
작곡가가 이렇게까지 한다는 게 흔히 접할 수 있는 광경은 아니긴 하지. 더욱이 지금 내 나이를 생각하면....
“이번 트랙을 보니 클럽 풍 댄스 음악도 있던데. 요즘 클럽에서 입을 법한 트렌드하고 매력적인 의상을 붙여보면 좋은 것 같아요.”
곧바로 각 트랙 컨셉들에 대한 의상, 소품 기획 회의로 넘어간다. 이번에도 역시 내가 주도했다. 나에게 해보라고 했으니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막 던져보는 중이었다.
“이 때는 레이나가 조금 더 섹시함을 어필해도 될 것 같아요. 클럽은 그렇게 해도 되는 곳이니까.”
아예 해당 트랙을 크게 틀어 놓고 음악만이라도 클럽 풍 분위기를 조성해서 컨셉을 이것저것 붙여본다.
“음, 하얀색과 형광색 튜브 탑이랑 아이스 진 계통 스키니, 힙한 청바지 같은 것들 좀 가져와주세요. 그런 거 있죠?”
“물론 있지! 잠깐 기다려. 헤이, 맥, 나 좀 도와줘.”
“알았어!”
아예 옷을 잔뜩 늘어뜨려 놓고 그 자리에서 패션쇼를 해보기도 한다.
“하얀 튜브탑 하고 아이스진 스키니 청바지 조합이 잘 어울리네요. 가발을 착용해서 블론드 생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화장은... 진하게 말고 잠깐만요. 이런 식으로... 이거 한국 여자 연예인들 방식의 화장인데 이런 식으로 연하면서도 약간의 포인트만 강조해서....”
컨셉 회의는 한 주 내내 이어졌다.
내가 리드하고 기존 아트 디렉터와 팀원들이 서포터 해주는 방식이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좋은 소품이 보이면 즉각 사진을 찍어 구해다 달라고 요청하면 몇 시간 안에 바로 구해다 주더라.
가장 협조적인 사람은 바로 레이나였다.
“이거 이렇게 입으면 되는 거야?”
“오! 그 스타일 아주 좋아요. 부담스러운 느낌도 훨씬 덜해졌어. 앞으로 평상시에도 그런 식으로 입고 화장하고 다녀요. 솔직히 레이나 천배는 더 예뻐졌어요!”
“정말?”
“물론이죠. 레이지에게 지금 그 모습 촬영해서 기습적으로 보내면 어떤 반응이 나올 것 같아요? 한 번 해볼까요?”
평상시 선호하던 패션이나 뷰티 스타일이 아닌, 철저히 내 기준에 맞춘... 이를 테면 K뷰티, K스타일에 가까운 것들을 맞춰주니 본인은 굉장히 어색해했다.
하지만 아트 팀의 반응은 굉장히 좋았고, 실제 착용 샷을 찍어 레이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생생한 반응을 확인시켜주고서야 안심이 된 모양이다.
“자, 트랙별 컨셉 다 만들었으니 이런 식으로 내일부터 바로 화보 촬영 진행합시다.”
새로운 화보 촬영은 꾸며진 스튜디오가 아닌 실제 레이나의집과 뉴욕 거리, 카페, 상점 같은 곳들에서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뮤직 비디오도 해변에서 여름철 휴가 분위기 확실히 내봅시다. 전반적으로 몽환적이면서 이 세상 해변이 아닌 장소를 섭외했으면 좋겠는데....”
“산타모니카 해변 같은 곳?”
“아니, 그런 일반적인 곳 말고요. 정말 환상적인 해변. 뮤직 비디오에서 잘 등장하지 않는 곳.”
몰디브가 가장 이미지가 가깝긴 한데... 거기도 이미 유명한 곳이잖아?
그래서 갑자기 뮤직 비디오 촬영지 선정 작업이 시작됐다.
온갖 후보군이 올랐지만 최종적으로 선택된 곳은...
“새파란 블루라군, 버드 생츄어리, 천 그루 야자수....”
정했다.
“북 마리아나 제도 로타섬으로 갑시다.”
“로타섬?”
“어,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사이판에서 경비행기 타고 30분 가면 도착한데요. 날씨 잘 선택해서 이곳 배경으로 촬영하면 시원하면서 몽환적이고, 살짝 섹시하기도 한 그런 영상이 잘 뽑힐 것 같아요.”
곧 이어 거기서 뭘 입고, 뭘 하고, 어떤 장면을 만들 것인지 논의를 시작하는데....
“일 진행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현기증이 날 정도군.”
아트 디렉터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음, 제 아이디어가 마음에 안 드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진행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니 적응이 잘 안 돼서 그런 거야. 다들 이해할 걸?”
그리고 레이나를 흘끔 보며 말한다.
“우리 고용주가 좀 까다로워야지.”
“아하.”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었어요? 나중에 딴 말하지 말고 지금 말해요.”
“음....”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그녀는.
“없어. 아주 좋아. 모든 것이 굉장히 새로워서 마음에 들어!”
그럴 거다.
평소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컨셉이 계속 쏟아지고 있으니까.
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강조했다.
“매력을 강조하려고 하지 말아요. 그러는 순간 망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아.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라는 거잖아.”
“바로 그거죠. 수줍으면 수줍은 대로,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난 씩 웃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런 의미로 뮤직 비디오 남자 주인공은 레이지로 섭외합시다. 다들, 사랑에 푹 빠져 어쩔 줄 모르는 귀여운 레이디 레이나의 모습을 보고 싶죠?”
“오오오!”
내 제안에 박수까지 치며 환호하는 사람들.
“뭐? 레이지? 자, 잠깐만! 그런 걸 그렇게 함부로 정해도....!”
“돼요. 제가 해달라면 다 해줄 거니까요. 그리고 레이나 뮤직 비디오 작업인데 거절할 리가 없죠.”
“........”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한다.
“자, 컨셉 기획은 여기까지. 뭐 빠뜨린 거 없나요?”
없나보다.
난 힘껏 손뼉을 치며 말했다.
“레이나 꾸미기. 내일부터 재미있게 한 번 해봅시다!”
@
다음 날, 야외 화보 촬영이 시작됐다.
“굳이 다른 출연진을 섭외할 필요는 없겠죠. 기획, 아트, 의상팀 투입!”
“뭐?!”
“자, 잠깐만... 우리 보고 출연하라고?”
“저, 정말?!”
깜짝 놀라는 사람들.
그리고 레이나.
“여러분만큼 레이나하고 친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
“... 그건 그렇지?”
“그리고 우리가 패션쇼 화보를 찍자는 것 아니고, 전문 모델이나 연기자가 필요 없죠.”
난 포토그래퍼 짐을 보며 말했다.
“안 그래요? 짐?”
“너무 맞는 말이라 나조차 할 말이 없을 정도야!”
“그렇다고 하니... 빨리 투입!”
그렇게 시작된 촬영은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해했다.
심지어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는 뉴욕 거리, 한복판이 아닌가?
“뭐야?”
“레이나 촬영하나본데?”
“어... 저기 지시하고 있는 친구, 혹시 민 아니야? 왜, 그 이드라엘 역의....”
“아, 맞는데? 맞네! 이드라엘이네!”
어느 새 구름처럼 모인 사람들이 촬영 현장을 재미있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러니 레이나 스텝들은 더 어색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쯧. 이래서 아마추어들은....
별 수 없이 내가 나서서 도와줘야 할 것 같다.
“자자, 제가 지휘할 테니 잘 보세요. 우선....”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서 제스처, 시선 등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아니, 거기서 그렇게까지 놀란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어요. 보통 길가다 매력적인 여자들이 지나가면 어떻게 해요? 나는 짐승이 아닌 척, 신사다운 척은 다 하면서 시선만 자연스럽게 쳐다보잖아요. 가슴이라던지 잘록한 허리, 엉덩이 이런 부분들....”
“어, 어어... 그, 그렇긴 한데...”
“어렵지 않아요. 그냥 평상시 하던 대로 하면 돼요!”
“이봐, 그렇게 말하면 내가 여자만 흘끔대는 변태 같잖아.”
“원래 매력적인 여자 앞에서 남자는 다 변태가 되는 법이잖아요.
“.......”
“화이팅 합시다! 화이팅!”
이같은 노력 덕분인지, 스텝들도 점점 촬영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니 레이나가 굉장히 즐거워하더라.
덕분에 내가 원하던 자연스러운 매력이 점점 발산된다.
“이거 어때? 난 좋은 것 같은데....”
“흠, 내가 봐도 괜찮은 것 같은데. 어때, 민?”
포토그래퍼와 아트디렉터도 내 의견을 묻고, 허락이 떨어지면 그제야 다음 촬영을 준비한다.
내가 이 촬영장의 지휘관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엄청난 희열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나도 더욱 열을 냈다.
“레이나! 표정 자연스럽게! 지금 너무 힘이 들어갔어요. 과장하지 말고...그렇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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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화보 촬영이 끝났다.
결과물?
“오오....”
“이런 느낌이....”
레이나를 포함, 다들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는 눈빛이다.
내 독특하고 까탈스러운 요구를 백퍼센트 수용해줬던 포토그래퍼가 웃으며 말한다.
“지금까지 쭉 레이나를 전담해왔는데 이런 매력을 끌어내 본 건 처음이야. 일단 컨셉만 봐도 부담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움 속에 매력이 살짝 묻어 있어서 굉장히 대중적이야.”
정확히 짚었다.
이번 촬영 아트 디렉팅에서 내가 의도했던 그 내용이다.
“레이나는 태생부터가 엄청나게 매력적인 여자에요. 딱히 별 거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거나 서 있기만 해도 굉장히 아름답고 우아하죠. 여기서 뭔가 더 부각시키려고 하는 순간 투머치가 되는 거예요.”
“.......”
레이나가 민망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자연스럽고 솔직한 게 가장 아름다운 법이죠. 뮤직 비디오 촬영 때도 이것을 잊지 마세요.”
레이나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촬영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전 해야 할 거 많아요. 생각보다 길어진 영화 촬영이랑 예상치 못한 아트 디렉팅으로 밀린 업무가 많아졌거든요.”
“그렇구나.”
“저 대신 서연이 데리고 가서 좋은 경험 좀 시켜줘요.”
“그건 나에게 맡겨!”
서연이 학교에 미리 말을 해놔야겠군.
그렇게 레이나 정규 앨범의 아트 디렉팅 작업을 완료하고, 난 곧장 LA로 건너갔다.
목적지는 버뱅크에 위치한 디즈니 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