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로 돌아왔다-177화 (177/205)

< 177화. 조건 >

음료를 들이킨 뒤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디지털 미디어 시티의 방송국 카페테리아. 굉장히 넓고 쾌적한 공간인데, 방송국 직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사내 복지 공간이었다.

... 좋네. 우리 회사 카페테리아도 잘 꾸며진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일단 크기부터가....

“안녕하세요!”

선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하얀 머리카락이 듬성 거리며 나 있었고, 미소 지을 때 눈가의 주름이 깊어진다.

난 일어서서 정중히 인사 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갑작스러운 만남 요청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영웅 피디님!”

T본부 프로듀서 나영웅.

대한민국에서 예능 제작자 하면 떠오르는 몇 안 되는 스타 제작자였다.

지금도 위상이 굉장하지만 2020년 경을 기점으로는 아예 예능의 왕이라는 별칭이 붙어 버린다.

“김민 님이 전화 주셨는데 없던 시간도 만들어야죠!”

능력과 위명에 비해 사람이 참 겸손하다.

이러한 겸손함 역시 그가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단지....

“어? 오렌지 주스 드시고 계셨네요? 하, 내가 오렌지를 먹은지가 얼마나 오렌지....”

“.......?”

“하하하하!”

약간 관종끼가 있고 특히 아재개그를 지나치게 좋아한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난 어색하게 헛기침을 터트리고 말했다.

“딸기가 직장을 잃으면?”

“.......?”

“딸기시럽.”

“어? 딸기 실업... 아! 으하하하하!”

이런 사람 공략하는 건 간단하지.

취향에 맞춰주면 되는 거야!

아재개그, 나도 자신 있다 이거야!

“이제 보니 김민 씨, 굉장히 특별하고 멋있는 사람으로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유머러스한 부분도 있었군요!”

“저 예능 굉장히 좋아합니다. 특히 나영웅 피디님이 만들었던 예능들은 다 좋아해요!”

“아, 정말요?”

자, 혓바닥 부스트 온!

“저 진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봤어요. 2박 3일, 사람의 조건, 얼마 전에 시즌 종영한 청춘 견문록까지... 재미와 감동을 모두 잡으면서 트렌드에 치우치지 않고 전 세대를 아우르는 재미를 선사할 수 있는 프로듀서는 세상에 오직 나영웅 피디님뿐이죠.”

“그, 그런가요? 너무 과찬인 것 같은데....”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저 역시 프로듀서로서 저보다 한참 선배님이신 나영웅 피디님을 굉장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제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허락해주신다면 선배님이라고 부르고 곁에 따라다니며 배우고 싶은 심정이에요!”

칭찬에 약한 우리 관종 피디님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자, 이쯤이면 서론은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사실 제가 남녀 아이돌 그룹을 한 팀씩 준비 중이에요.”

“아, 그러셨어요? 어떤 팀인가요?”

“남녀 열 명씩. 베이스는 아이돌 그룹이긴 한데 예능, 영화, 모델, 방송. 뮤튜브... 다양한 곳에서 활약할 수 있는 만능 엔터테이너 그룹을 꿈꾸고 있어요.”

“열 명씩이라고요? 남자 팀 열 명, 여자 팀 열 명이라고요?”

“네.”

“와우, 아, 그래도 요즘은 팀원이 많아지는 것이 대세로 가고 있는 듯 보이니... 엔 플라워 멤버도 아홉 명이잖아요.”

“그렇죠! 역시 트렌드에도 빠삭하시네요!”

“그럼요! 제가 트렌드를 외면하며 방송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 알게 모르게 반영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저 그런 거 엄청 신경 써요.”

“그야 저도 알고 있었죠! 말씀 드렸다시피 나영웅 피디님의 엄청난 팬이니까요!”

“하하하!”

분위기가 좋다.

“사실 프로듀싱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제가 아직 저 친구들을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피디님은 당연히 아시죠? 사람을 모르는데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어요?”“그렇죠! 사람부터 알아야죠!”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한 명 한 명이 어떤 캐릭터를 지니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겸사겸사 입덕 포인트가 될 수도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 구상하면 어떨까.”

“오, 그렇게 방송 콘텐츠 제작으로 생각이 이어지는 건가요?”

“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재거리를 생각하게 됐는데 문득 나영웅 피디님이 떠오르더라고요.”

“제가요?”

“팬이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저 예능은 나영웅 피디님 꺼만 봐요.”

“아, 그러셨지. 하하하하!”

“나영웅 피디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테이블을 탁 치고 오른손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두 가지 소재가 떠오르더라고요.”

“두 가지씩이나... 아, 남녀 한 팀씩? 소재가 뭐죠? 저도 궁금해지네요.”

“하나는 섬 표류기! 일단 남자 팀은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을과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섬에 떨궈놓고, 알아서 하루 삼 시 세끼를 챙겨 먹도록 미션을 주고 지켜보는 거죠!”

“오오!”

관심을 보인다.

그러겠지. 곧 당신이 하게 될 예능이니까!

“일단 명분은 데뷔 전 팀워크 훈련인데 사실은 멤버들을 극한 상황에 떨어뜨려서 여기에 대응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재미를 얻자는 거죠.”

“제가 또 그런 거 좋아하거든요! 재미있겠네요! 또 하나는 뭔가요?”

“여자 팀에게는 식당이나 게스트 하우스 운영을 맡겨보려고요. 그래서 다양한 손님들을 대접하게 하는 거죠. 꾸미고, 만들고, 계산하고, 조달하고, 대접하고... 이런 걸 시켜 보려고 해요.”

“그것도 재미있겠네요!”

“여기에는 최소한의 도움이 필요해요. 메뉴 구성, 재료 관리 및 다듬기, 손님 접대. 총무, 이걸 익히는 과정부터 방송에 담는 거죠!”

“아하. 치밀하시네요. 그런데 그런 준비 과정이 또 재미있는 거 아니겠어요?”

“어때요? 괜찮죠?”

“왜 저를 찾아왔는지 알겠네요. 흐음....”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제부터 나는 철저한 을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단호하게 거절한다면 협상의 여지가 없는 거겠지만 만약 조건을 건다면 어떤 일이든 감수하고서라도...!

“김민 씨도 같이 하시죠.”

“... 네?”

응? 뭐라고? 나?

놀라서 눈만 끔뻑이니 나영웅 피디님이 진지하게 제안하신다.

“아무리 콘텐츠가 재미있어도 그 친구들만으로는 각이 안 나와요. 하지만 김민 씨가 메인으로 출연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죠. 김민과 아이들의 섬 표류기, 김민의 홈스테이! 뭐 이런 식으로 타이틀이 붙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좀 가져 줄 테니까요.”

“아....”

와... 이건 생각지도 못한 사실인데?

“음.”

난 진지하게 고민했다.

“확실히, 제가 메인으로 나서는 쪽이 그림도 많이 나오겠어요. 조금이지만 인지도도 있는 편이고....”

“조금이라뇨? 굉장하죠! 세상에 빌보드 차트하고 할리우드를 제 집 드나들 듯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한 명도 없어요!”

열을 올리며 칭찬을 해주시니 왠지 민망하기도, 기분 좋기도 하다.

“흠흠. 그러면 제가 출연한다면 제작을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음....”

그런데 확답 대신 또 무언가를 고민하신다.

설마 여기서 또 조건을 걸겠다고?

“이거 거절하셔도 두 프로그램은 할게요. 그런데 김민 씨 하고 제가 꼭 같이 해보고 싶은 게 떠올라서 제안하는 거예요.”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난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 양반, 나를 본인의 예능 페르소나로 만들 셈인가?

@

대표님을 비롯한 모든 팀장님들이 회의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표님 전화 받고 왔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대표님이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물으신다.

“너 K본부로 가서 나영웅 피디하고 미팅하고 왔다면서?”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라고 생각했다가 고개를 돌려 최명규 매니저님을 바라봤다. 한국에서 내 일정을 알고 챙겨주는 분은 이 사람 뿐이었다.

“설마....”

“제가 보고 올렸습니다!”

난 브루투스를 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황제의 심정으로 비통하게 외쳤다.“이 배신자! 회사에 말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하하, 제 입장 좀 고려해 주세요. 전 대표님이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처지라....”

우리 둘의 대화를 대표님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신다.

“너희 지금 뭐하냐? 허튼 소리 그만하고 빨리 어떻게 된 일인지 좀 말해봐. 네가 나영웅 피디 만나러 갔다는 이야기만 들었거든.”

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거 궁금해서 다들 모여서 저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건 나였다.

“야, 나영웅 피디 사람 막 만나주고 그런 사람 아니야. 방송가에서 얼굴 보기 제일 힘든 사람 중 하나라고. 알아?”

“... 그냥 만나 주던데요?”

“너니까 만나준거지. 내가 만나자고 그렇게 전화해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다 빠져나가. 친해 보려고 노력해도 어림도 없어. 딱 선을 긋고 비즈니스로 대하더라고.”

“... 되게 겸손하고 자상하시던데?”

“성격하고 별개의 문제야. 공사 구분이 확실하다는 거니까.”

아. 그랬구나.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뭐, 본론부터 말씀드리면... 맞아요. 나영웅 피디님 총괄로 예능 몇 개 제작 협의하고 온 거예요.”

“오오....!”

“와, 그냥 가서 미팅만 한 게 아니라 협의까지 마치고 온 거야?”

“제작팀들 뭐하냐? 김민은 예능을 하나도 아니고 몇 개나 직접 가서 따왔는데....!”

“아니, 그걸 왜 우리한테 뭐라고...!”

웅성웅성.

소란스럽기도 하지.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긴 하네? 흠흠.

“처음부터 말씀드리면.....”

어제 이야기부터 이어갔다.

프로듀싱을 하려고 보니 애들에 대해 아는 게 없더라.

나 혼자만 알지 말고 시청자들도 알아서 팬이 되어주면 참 좋겠는데... 오, 예능 만들까?

마침 나는 나영웅 피디님의 팬이다!

나영웅 피디님 스타일로 예능 포맷 몇 개를 만들어 면담을 요청했고 협상 성공!

“대략 이렇게 된 거예요. 별 거 없어요.”

“.......”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들.

“아, 그리고 저한테 개인적으로 프로그램 하나 같이 해보자고 제안하셨어요.”

“무슨 프로그램인데?”

[ 일단 제목은 맨해튼 드리밍이에요. ]

[ 노래 내용처럼, 수많은 이들이 꿈을 가지고 맨해튼에 모여 들잖아요. 김민 씨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고. ]

[ 쉽게 말하자면 김민 씨의 일상을 쫓는 방송이라고 보시면 돼요. ]

[ 김민은 어디서 자고, 누구와 만나고, 어떤 일을 하며 무슨 목표를 가지고 살아갈까? ]

[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할 거라고 생각해요. ]

[ 그리고 김민 씨를 통해 또 다른 맨해튼 드리밍의 꿈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조명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

“대략 이런 프로그램인데....”

“오, 재미있겠다!”

“이거 정말 김민에게 딱 맞는 프로그램이네!”

“팬들도 좋아할 거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도 관심을 가질 것 같아!”

아직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들 박수치며 좋아한다.

“... 일단 고민 좀 해보겠다고 했어요.”

“뭐?!”

“아니, 어째서?

깜짝 놀라는 사람들.

난 어색하게 말했다.

“그런 게 재미있는지도 모르겠고 촬영 팀이 제 일거수일투족을 쫓아다닌다고 생각하니 부담스럽기도 하고 실수하면 괜히 사서 욕먹는 셈이고....”

“........”

“나영웅 피디님도 당장 급한 건 아니니 잘 생각해보고 답변 주라고 하시더라고요.

“음.....”

“.......”

대표님 포함, 다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인다. 그래도 꾹 참는 건 나를 배려해서겠지?

“아무튼, 이렇게 됐으니 나머지 협의 부탁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