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LK 엔터테인먼트에 방문하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피디님. 제안 주신 거 한 번 해보겠습니다.”
맨해튼 드리밍 제안을 받아들였다.
[ 정말요? 그러면 이번에 뉴욕 건너가실 때 같이 가시죠! 언제 가시나요? ]
그, 그렇게 빨리?
“에... 다음 주 월요일이네요.”
[ 그때까지 촬영 준비할게요. 월요일 새벽부터 촬영 시작할 거고, 그 전에... 최소한 토요일까지 간략한 컨셉이라도 정해서 알려드릴 테니 마음의 준비 충분히 해두세요.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도 얼떨떨한 기분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이 엄청난 추진력... 이게 설마 이 사람 성공의 비결이었던가?
동사무사소로 가서 주민 등록증을 발급 받았다. 이것으로 나는 법적으로나마 성인이 된 것이다. 이어 모처럼 만에 문 라이트 애들을 만나 떠들썩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자리에서 LK 소속의 두 친구가 내게 말했다.
“우리 피디님이 민이 너 좀 만나고 싶다는데, 언제 시간 좀 내주면 안 돼?”
LK 총괄 프로듀서라면 시상식 때 안면을 튼 프레드를 말하는 것이다.
“내일 한 번 찾아뵙지 뭐.”
이유는 대략 짐작이 되고, 나 역시 프레드 프로듀서에게 큰 호감이 있던 참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지.
다음 날 합정동에 위치한 LK 엔터테인먼트 사옥을 방문했다.
3대 기획사 중 사옥이 가장 크고 화려한 외관을 지닌 곳이다. 마치 우주선은 같은 느낌이랄까?
“어서 오세요!”
1층 로비에 프래드 프로듀서가 마중나와있었다.
시상식 때와 달리 검은색 힙합 패션을 장착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바로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프레드 프로듀서의 모습이었다.
“방문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주고받은 뒤 바로 작업실... 로 갈 줄 알았는데.
“우리 애들 연습하는 모습 보여드릴게요.”
걸그룹 데뷔조 연습실로 데려가더라.
“JJ는 지하층이 아티스트 연습실이죠?”
“어? 잘 아시네요?”
“워낙 잘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우리 회사 아티스트들은 최상층을 사용해요. 대표님 집무실도 그곳에 있어요.”
굳이 최상층에 둔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와....”
사방이 통유리로 뻥 뚫려 있었는데, 한강과 시티뷰 조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굉장히 멋지네요. 허드슨 야드에 있는 레이나 작업실을 보는 것 같아요.”
“허드슨 야드에 레이나의 작업실이 있어요?”
“네. 우리 크루 아지트 같은 곳이에요. 레이나, 레이지, 레드 트라이브, 사이먼 블랙... 일이 없어도 그곳에서 모이죠.”
“그러면 Bang!도 그곳에서 나왔겠네요?”
“그렇죠!”
“와, 진짜 가보고 싶어요!”
“뉴욕에 오시면 연락 주세요. 안내해드릴게요.”
“정말요? 와아!”
아이처럼 설레어하는 프레드에게 웃어주고, 춤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여섯 명의 여자 연습생들을 바라본다.
루나리스.
원래는 네 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이었고, 이전 삶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던 월드 클래스 걸 그룹이었다.
멤버 전원이 명품 패션 엠버서더고, SNS 팔로워 수도 전부 억대를 돌파해서 화제가 됐었다.
이제는 문 라이트 출신인 내 친구 두 명이 추가되어 6인조로 편성됐다.
가까이에서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보니 그들의 엄청난 잠재력이 느껴진다.
에버가든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재미있겠는데?
연습이 끝나고 프레드가 모두를 불러 모았다.
“다들 알지? 김민 프로듀서님이야. 인사해.”
“둘, 셋.”
“안녕하세요! 루나리스입니다!”
우렁찬 목소리.
자기소개까지 마치고 나를 향해 눈빛을 빛내는 여섯 명을 차례대로 뜯어본다.
긴장감이 가득했다.
다들 내가 어떤 평가를 할지 잔뜩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이러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
잠깐의 고민 후 진심을 담아 말했다.
“LK가 얼마나 이를 갈고 준비했는지 알 수 있겠네요. 멤버들을 보자마자 명품 브랜드들이 절로 떠올랐어요.”
“명품 브랜드요? 어떤 브랜드죠?”
본인들도 궁금해 하는 눈치.
난 전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명 한 명 말했다.
“리더 지아님은 디X이 떠오르고....”
고전미를 품고 있는 배우상의 비주얼.
실제 그녀는 디X의 엠버서더로, 해당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열렬히 팬질 했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제시님은 샤X, 로아 님은....”
마지막 두 친구 앞에서 멈췄다.
굉장한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난 씩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크레이지 즉석 떡볶이가 떠오르네요.”
오리진 멤버 4인과 프레드는 물음표를, 두 친구는 느낌표를 띄운다.
“우리 단골 분식집인데 이 두 친구가 특히 좋아하거든요. 오죽하면 별명이 ‘떡볶이 학살자’라고....”
“야!”
“너 진짜...!”
등짝을 얻어맞았다.
억! 못 때릴 줄 알았는데...?!
다시 재게 된 연습을 지켜보다가 단 둘이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피드백이 절실한 상황이라... 부탁드려도 될까요?”
“에이,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러지 마시고 딱 한 마디라도 부탁드려요. 사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몇 가지 있어서....”
절실한 얼굴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들어보죠.”
이어진 노래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이거 내가 알던 데뷔 싱글이 아닌데?’
아예 다른 음악이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멜로디를 비롯한 세밀한 구성이 완전히 달랐다.
당혹감을 애써 감추고 음악에 집중했다.
왜 피드백이 절실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곡 재생이 끝나고 프레드 프로듀서가 날 바라본다.
“어떻게 들으셨나요?”
“음.”
뭐라고 말해야 기분 나쁘지 않게 들릴까?
내 고민을 눈치 챘는지, 다시 한 번 말한다.
“필터링 없이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지금 가장 필요한 게 그런 거예요.”
완벽주의자.
그의 이런 성향 탓에 루나리스가 싱글 하나 내는데 1년, 길면 2년이 넘게 걸릴 정도였다.
그가 그렇게 말하니 뭔가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니 걸러 들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 눈빛은 그럴 것 같지가 않은데?
살짝 부담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너무 욕심을 부리고 계신 것 같아요.”
“네? 욕심이라고요?”
“KPOP 걸 그룹 음악이 아니라 미국 걸그룹 음악을 듣는 것 같아요. 그룹 목표를 처음부터 너무 높게 설정하셨어요.”
“아...!”
탄성을 터트리는 프레드.
뭔가 깨달은 것 같다.
그 모습에 안도하며 몇 마디를 더 했다.
“균형을 재조정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아요. 루나리스는 한국에서 데뷔할 KPOP 걸그룹이잖아요. 프레드 프로듀서님의 미국 시장과 흑인 음악을 향한 열망은 잘 알겠는데 지금은 그 욕심을 좀 접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편곡도 그렇고 가장 중요한 멜로디 부분이 한국과는 맞지 않은 부분이 있다.
곡 하나에 지나치게 몰입하면 나중에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될 때가 온다.
지금 프레드의 상태가 딱 그랬다.
“제가 잠깐 좀 만져 봐도 될까요?”
“네? 네. 그러시죠!”
황급히 자리를 비켜주는 프레드.
pc 앞에 앉은 나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미디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일단 드럼 소스부터 어택감이 강한 녀석들로 싸그리 바꿔 버렸다.
Kpop 댄스곡의 승패는 드럼 소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80&를 넘는다고 보는 나였다.
때문에 우리가 듣기에는 밍밍할 수도 있는... 흑인 힙합 음악 특유의 느낌부터 전반적으로 손을 볼 필요가 있다.
[ 쿵! 쿵! 쿵! 쿵! ]
댐핌감 좋고!
이어서 자잘한 세션은 모두 제거해버리고 리드 신스 정도만 남겼다. 그리고 킥과 스네어 뿐이던 비트에 하이햇을 입혀 트랩 비트로 만들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리드 신스를 어택감이 좀 있으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는 소스로 변경한 뒤 이펙터로 공간감을 불어 넣는 작업을 하면....
“자, 어때요? 이제 좀 KPOP 스러워 지지 않았나요?”
“........”
프레드는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BPM은 낮지만 하이 햇으로 비트가 잘게 쪼개졌고 중간에 삽입된 맛깔 나는 퍼커션으로 그루감은 확실히 살아 있다.
몽환적인 성향의 리드 신스에 약간의 뽕끼가 첨가되며 듣기 좋고 트렌디한 랩, 힙합 음악으로 완성됐다.
남은 건 멜로디를 이에 맞게 바꾸는 건데, 그것까지 하면 그냥 내가 만든 곡이잖아?
“괴, 굉장하네요. 어떻게 이렇게 한 순간에 제 고민을....”
이거 좋다는 거지?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이제 중요한 멜로디는 프레드 프로듀서님이 완성하시면....”
“그러지 마시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네?”
“제발 부탁해요. 당연히 이름은 공동 작곡으로 올려드리고 곡비도 제가 받는 수준으로 책정해서 드릴 테니까....”
“에....”
어, 이 정도면 그냥 도움을 주는 수준은 벗어난 것 같긴 한데.....
... 뭐, 내 친구들이 있는 그룹이니 괜찮겠지?
“너 제 정신이냐? 야, 방문했으면 그냥 인사 정도만 하고 오지, 왜 쓸데없이 나서? 나서긴!”
... 안 괜찮았다.
회사로 불려간 나는 대표님께 엄청나게 깨졌다.
“무슨 일이에요?”
이정연 팀장님이 집무실에 들어오며 조심스레 물으신다.
“마침 잘 왔다. 얘가 지금 LK에서 어떤 사고를 치고 왔는지 알아?”
이야기를 들은 정연 팀장의 소감을 간단했다.
“적을 키워주고 왔네요.”
“심지어 곡도 굉장히 좋아. 들어볼래?”
내가 참여한 곡이니... 가이드까지 새롭게 끝낸 음원을 가져올 수 있었다.
곡을 듣고 난 정연 팀장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이제 보니 내부의 적이 여기에 있었네요.”
큭!
천사 같던 정연 팀장님에게 이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
싸늘한 침묵이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솔직히 지금도 큰 잘못 했다고 생각은 안 하는데, 그것과 별개로 두 분이 화를 내는 것도 이해는 된다.
최대 경쟁사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온 셈이니까.
“하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 우리 회사가 협업을 금지하던 곳도 아니었고... 그냥 콜라보레이션 한 셈 쳐야지 뭐.”
“그렇죠. 가끔 이런 이벤트도 필요하거든요!”
“쓰읍...!”
“........”
“그냥 적당히 성공하기만을 빌어야지. 전문가들이 듣기에는 좋았지만 대중 픽은 아니더라. 이런 느낌으로....”
... 그건 내가 불편할 것 같은데?!
“제목이 뭐라고?”
“Kiss me more.”
“직역하자면 내게 더 키스해줘. 이런 뜻인가? 제길, 재목도 좋네. 가사, 노래 분위기하고 아주 찰떡이야.”
“.......”
“.......”
어... 갑자기 분위기가 또 심상치 않은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다.
아니나 다를까.
“야! 이런 건 우릴 줬어야지!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내가 이런 분위기 음악에 환장하는 거 뻔히 알면서...!”
결국 폭주하셨다.
난 뒤도 안 돌아보고 집무실에서 벗어났다.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온다.
[ 이 곡 대박 치기만 해봐. 너 진짜 죽는 줄 알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