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로 돌아왔다 197화
136. 미드스쿨 슈퍼스타(6)
연습 상태는 완벽했다.
나와 감독님이 불철주야, 코피까지 쏟으며 구성한 모든 것들이 배우들에 의해 그대로 구현되고 있었다.
하, 저거 짜낸다고 박터지게 싸웠던 거 생각하면…….
* * *
소위 '프로' 대우를 받는 이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자존심도 굉장히 강하다. 초창기 내가 보낸 곡에 대한 안무 시안을 몇 번이나 반려한 일이 있었다.
간단했다.
'뭐 이래?'
안무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헐라우드에서 소문난, 굉장히 유명한 팀이라고 들었고 실제 뮤지컬 영화뿐만 아니라 팝스타들의 안무까지도 전담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 기대했는데.
'순 재활용 잡탕이잖아? 어떤 곳은 아예 본인들의 시그니처 루틴으로만 가득 채워놨네.'
그게 또 좋으면 말을 안 하겠는데, 무성의함이 잔뜩 느껴져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더라.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와 관련해 가장 고민이 많은 사람은 아무래도 로렌 감독님이었다.
안무 팀과 사사건건 충돌이 일어나고 요구 사항 반영도 늦거나, 잘 되지 않았으니까.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
태도가 영 불손하지 않나?
자신들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나서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 문제로 굉장히 싸웠다.
네가 뭔데 나서느냐.
무슨 말을 들어먹을 생각조차 안하더라.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했다.내가 누군지 모르고 저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알면서도 나 기죽이려고 그랬던 거라면 정말 구제 불능인 거고.
왠만하면 좋게 가려고 했는데 협상의 여지가 없어 보이더라.
그래서 실력으로 밟아 주기로 했다.
쉽게 말해 내가 안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시점, 이전 삶과 달리 나는 안무가로서도 충분한 실력과 경험을 쌓은 상태였다.
엔 플라워, 에버가든, 이노센트, 유니크.
한국 그룹을 비롯해서.
사이먼 블랙, 레이나 등등.
여러 뮤지션들의 안무까지 프로듀싱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1980 브로드웨이 안무는 모두 나 혼자 만들었고 제작사에 인정을 받은 경험이 있다.
로렌 감독님이 나를 기용한 것은 단순히 핫한 뮤지션들의 음악을 만들었다는 전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주일 만에 안무 하나를 만들어 제작사와 안무팀 전원에게 전송했다.
영상에 간단히 트릭을 썼다.
본래 내가 짠 파트의 음악이 무려 열 명의 배우, 댄서들이 선보일 공연이었다.
그걸 수십 번이 넘는 촬영으로, 화면에 스무 명의 내가 등장해서 뮤지컬 안무를 보이도록 편집해 버린 것이다.
이래 봬도 내 스승님이 영화계의 명장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님이시다. 이 정도 편집 기술은 우습지. 시간과 노력이 좀 많이 필요해서 문제지.
그 한 방으로 게임은 끝났다.
제작사 만장일치로 내가 다시 만든 안무가 채택됐고 기존 안무팀의 계약은 해지됐다.
이게 할리우드의 무서운 점이다.
오로지 성과주의라는 것.
-네가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워라벨 챙기면서 일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는데 대신 결과로 증명해야 해!
난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성과로 보여줬고 안무팀은 그러지 못했다. 한국이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가능했다.
왜냐면 난 이미 실력으로 수십 차례 증명한 전적이 있는 뮤지션이었고, 이번에도 역시 그 실력으로 증명한 것이니까.
그 직후부터 틈이 날 때마다 미친 듯이 안무를 만들었다.
새 안무팀을 구해서 내가 짠 안무 시안을 제대로 가이드 해줄 수 있도록 했다.
* * *
솔직히 말해서, 안무 만드는 건 음악 만드는 것보다 몇 배는 쉽다.
적어도 내게는.
난 모든 '움직임'을 한 번 보면 그대로 외워 구사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이전 삶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죽어라 외우고 또 만들어낸 수많은 안무 동작들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이 소스를 분해하고 재조립해서 '작곡가의 의도에 맞는' 안무 동작을 만들어내는 건 굉장히 쉬운 일이다.
심지어 그 작곡가가 바로 나 자신 아닌가?
이런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나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천재성과 나댐의 결과는 어떻게 됐냐고?
"브라보!"
"아주 멋있었어!"
현장에는 촬영 스태프뿐만 아니라 디즈니 본사, 디즈니 채널 관계자들도 와 있었다.
큰돈 들인 최고의 기대작의 최종적인 그림을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온갖 무게를 다 잡으며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던 그들은.
"상상 이상으로 멋지네요!"
"스토리보드 시사회 때 보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멋지군요!"
"보는 내내 전율이 흘렀습니다. 허허허!"
아주 활짝 웃으며 박수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나같이 들뜬 얼굴을 하고 있다.
최종 리허설이 끝나고 모두가 나와 로렌 감독님에게 다가와 한마디씩 했다.
"제가 보기에 성공은 이미 확정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리허설 현장을 지켜봤는데 오늘처럼 전율이 흘렀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 그만…… 더 이상 칭찬 받으면 기분이 좋아 날아가 버려어어!!
그런데 그중에서 날 가장 민망하게 만드는 사람은 다름 아닌 로렌 감독님이었다.
"모두 고생했지만 아무래도 곡과 안무를 혼자 만들어낸 민이 가장 고생했죠! 민을 만난 건 제 생애 최고의 행운이에요!"
뻘게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어우, 더 이상은 민망해서 생략하겠다.
* * *
이번 최종 리허설이 디즈니 본사와 채널 임원들의 마음을 어지간히도 흡족하게 했던 모양이다.
임원 누군가가 즉석에서 바비큐 파티를 제안했고 그게 그대로 이뤄졌다.
다 함께 모여 웃고 떠들었는데 난 온전히 즐길 수가 없었다.
두 개의 껌딱지가 찰싹 달라붙었기 때문!
"저도 민을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사라 굿은 그렇게 부르던데……."
미드스쿨 슈퍼스타의 주인공 올리비아 메리.
"오빠! 나 저거 먹고 싶은데……."
내 동생 서연이.
마음 편하게 고기 좀 먹고 싶은데 두 사람이 옆에 붙어서 입을 쉬지 않는다.
아오 정신없어.
"사라 굿 성격 어때요? 제가 엄청난 팬이라 시디도 샀고 방송이나 라디오도 틈날 때마다 찾아보거든요. 어투나 단어 선택은 굉장히 거칠어 보이는데 성격 자체는 굉장히 순한 것 같……."
특히 올리비아 메리.
얘는 생긴 건 굉장히 고급지고 우아한데…… 굉장히 수다스럽다.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 중 수다스럽기는 얘가 최고다. 엔 플라워 누나들 전원과 붙어도 얘가 가볍게 이길 것 같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야!"
"……!"
이크, 목소리가 너무 컸다.
일순 시선이 집중됐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한마디 해야겠다.
"아주 데드풀이 따로 없네. 네 수다 때문에 고기를 못 먹겠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 졌다.
그런데.
"드시면 되잖아요!"
"네 수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라고!"
"제가 언제 입을 틀어막기라도 했어요? 정 거슬리면 무시하고 드시면 되잖아요!"
"그러려고 몇 번이나 시도를 했는지 알아? 그럴 때마다 자기 말 좀 제대로 들어 달라며 몸을 잡고 흔들어댔잖아!"
"그래도 무시하셨어야죠! 그리고, 평소에 고기 못 먹고 살아요? 왜 이렇게 먹는 것에 집착해요? 이런 자리에서는 대화에 더 집중하는 게 예의잖아요!"
와, 애가 한 마디도 안 진다.
이렇게 기가 센 여자애는 사라 굿 이후 두 번째다.
"으하하하!"
"민이 아주 꼼짝을 못 하는군."
"올리비아가 민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 봐."
한 마디도 안 지고 오히려 얼굴과 몸을 들이밀며 바락바락 대드는 올리비아 메리.
중간에서 접시 수북이 쌓아 올린 고기를 우물우물 먹고만 있는 서연이. 그리고 나.
그래. 내가 봐도 구도가 좀 웃기긴 하다.
"넌 왜 먹고만 있어! 오빠가 곤란에 처해 있는 걸 알았으면 좀 도와줘야 할 거 아니야!"
그래서 괜히 서연이에게 한마디 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날 바라보던 서연이는.
"별꼴이야! 말싸움에서 진 패배자는 얌전히 꼬리나 말고 있어! 괜히 잘 먹고 있는 동생에게 시비 걸지 말고!"
"……!"
빽 소리친다.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내가 이렇게 웃음거리가 될 줄이야!
……좋아.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어 로렌 감독님 옆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왜 따라와?!"
"왜 피해요?!"
"오빠, 동생이 창피해?"
기어이 따라 붙는 게 아닌가?
……난 모르겠다.
항복.
그 후로 난 고기 먹는 것을 포기하고 애들의 수다를 들어줘야 했다.
* * *
그 후로 자매결의라도 맺었나 싶을 정도로 올리비아 메리와 서연이는 항상 붙어 다니며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회사뿐만 아니라 집까지 찾아와 서연이 방에서 자고 가는 일도 빈번했다.
"우리 아이가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며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선생님. 우리 올리비아 잘 좀 부탁드립니다!"
심지어 부모님까지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니까 더 이상 구박하지도 못하겠더라.
이쯤 되니 올리비아 메리도 더 이상 본인의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바비큐 파티장 때부터 그랬는데 이제부터가 본격적이었다.
"제 노래는 언제 만들어 줄 거예요?"
자기 싱글을 만들어 달란다.
그것도 모자라서.
"서연! 나 싱글 내면 네가 피처링 해줘야 해. 그래줄 거지?"
"당연하지. 우린 베스트 프렌드잖아! 대신 내가 앨범 내면 너도 도와줘야 해."
"당연히 그래야지!"
서연이까지 꼬드긴다.
……아니, 이건 그냥 둘이 쿵짝이 맞는 거라고 봐야겠다.
그나저나 서연이와 올리비아 메리의 듀엣이라.
흥미가 가서 물었다.
"하고 싶은 장르 있어?"
"음, 전 팝도 좋고 락도 좋아요. 펑키한 것도 좋고요."
오케이, 팝 락과 팝 펑크를 섞은 장르면 되겠군.
"서연이 너는 팝 락이나 펑크에 대해 좀 아는 거 있어?"
"올리비아가 이것저것 소개해 줘서 많이 듣고 있어!"
이제 보니 저 요망한 것이 서연이를 끌어들이려고 작업 중이었구나!
그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이전 삶에서 올리비아 메리는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전면에 내세운 팝 발라드 음악으로 데뷔했고 그것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직후 라틴 팝, 팝, 알앤비, 소울…… 장르를 넘나드는 활약을 보이며 2020년대 새로운 아이콘으로 부상한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졌다.
왜냐면 이전 삶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라 굿이라는 전대미문의 괴물이 한 발 먼저 등장했으니까.
'사실 올리비아 메리가 마냥 잘 나가기만 했던 건 아니었지.'
기세가 꺾일 일이 있었다.
표절 사건.
그녀의 최고의 히트곡이 표정 시비에 오른 일이 있었다.
80년대 록 밴드의 음악을 도용했다는 것.
결국 그녀는 800만 달러를 배상해야 했고 직후 발표한 모든 음악이 유사성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쪽으로 한 번 찍히면 꼬리표를 떼기 어렵지.'
여기에 그녀의 성장세를 경계하던 라일라 캠벨이 표절 사건을 강하게 비난하며 심지어 디스곡까지 발표했다. 그리고 그 곡이 큰 성공을 거둔다.
강력한 경쟁자의 싹을 자르고 망치고 머리를 내리쳐 여지를 짓뭉개 버린 것이다.
'너무 빨리 성공했던 것 이상으로 성장세가 막혀 버린 아쉬움이 있었는데…….'
내가 제대로 가르치고 프로듀싱 해준다면, 이번에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 * *
한편 올리비아 메리는 김민이 고민을 시작하자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내 곡을 구상하고 있는 거야!'
검지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데 움직임이 경쾌하고 리드미컬하다.
'과연 어떤 곡을 만들어줄까?'
잠시 후,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선 김민이 한편에 비치되어 있던 통기타를 붙잡고 튜닝을 시작했다. 그리고 곧 무언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경쾌한 리듬!
올리비아 메리와 서연이의 두 눈이 마주쳤다.
김민이 즉석에서 작곡을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
'엄청난 곡이 만들어지는 역사적인 현장에 있는 건지도 몰라!'
김민을 향한 두 소녀의 눈빛이 크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