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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화 (1/254)

1 화

평범한 이들의 인생이 그럭저럭 갖춰진 코스 메뉴라면, 내 인생은 온갖 어두운 것들로 마구 버무려진 불행 한 그릇 같았다.

사창가에서 태어나 아비의 이름 도, 얼굴도 몰랐다. 가난한 집에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다 3살 무렵 동생을 보았다.

세상 모든 불행과 우울함을 가득 안고 태어난 나• 온갖 사랑스러움

을 고이 모아 빚어낸 듯 사랑스러 운 내 동생.

봄의 요정처럼 화사하게 빛나는 내 동생은 나처럼 뒷골목 시궁쥐처 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된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신은 어둠 아래 인간들에 게 무심하니.

내가 7살이 되던 해에 어미는 낡 고 좁은 저택만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하였고, 나는 아리아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해야 했 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것만도 버거울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살이 된 어느 날부터 아리아가 갑자기 앓기 시작했다.

원인도 치료 방법도 불명. 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 그러나 이대 로 아리아를 보낼 수는 없었다.

무채색인 삶에 내려온 유일한 색 채인데, 어떻게 가지게 된 소중한 것인데.

보낼 수 없었다. 절대.

아리아의 상태를 일시적으로나마 호전시킬 수 있는 약은 매우 희귀 했다. 나는 그 약값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일하다, 10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검을 잡았다.

이후로는 피 냄새가 진동하는 삶 이었다.

마수가 출몰하는 사지에 쉴 새 없 이 뛰어들다 보니 검술 실력은 빠 른 속도로 늘었고, 어느새 검의 끝 을 보았다. 제국에선 '검은 재앙'으 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던 18살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의뢰를 끝마치고 피 칠갑을 하고선 집으로 돌아가던 그 날, 발을 삐끗해 땅에 머리를 박았 던 그때, 머리에 통증이 퍼지던 그 순간,

그래. 나는,

전생을 떠올려 버렸다.

미친.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느리게 눈을 떴다.

' 여긴.'

익숙한 하얀 천장이었다. 용병 일 로 무리하고 쓰러지기를 여러 차 례, 이젠 내 전용실처럼 사용되는 1인 병실이었다.

•누가 병원으로 옮겨준 모양이네.'

누군지 모를 이에게 고마움을 느 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데, 목 덜미가 서늘했다.

" 언니......

가느다랗고 감미로운 소녀의 목소 리. 물기가 잔뜩 어린 처연한 음색 이었지만, 그 안에 깃든 냉기는 소 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다. 흠칫 하며 고개를 돌렸다.

흐드러지게 피어 낙하하는 벚꽃처 럼 굵게 웨이브 치는 분홍색 머리 카락. 짙은 음영을 그리는 풍성한 속눈썹 아래 처연한 하늘색 눈동 자. 온갖 미를 담아 빚은 듯 사랑 스러운 소녀.

" 아리아......?"

내 사랑스러운 동생, 아리아였다.

벌떡 일어나 아리아의 상태를 살 폈다. 피부가 과하게 창백하고 표 정이 좋지 않았지만, 아픈 것 같지 는 않았다.

•몸도 아픈 애가 왜......

추운 겨울날 밖에 나와 있다가 감 기가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왜 나왔어. 집에서 쉬지."

덮고 있던 이불을 아리아에게 꽁 꽁 둘러주곤 걱정스럽게 아리아를 살폈다. 아리아가 눈을 부릅뜨며 산호색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과 분해 보 이는 얼굴. 냉기가 싸하게 풍겨왔 다.

"지금 내 걱정이 돼? 언니는 피 칠갑을 하고서 길바닥에 기절해 있 었던 주제에, 내 걱정이 돼?"

가는 목소리에 들끓는 감정이 담 겨 있었다. 차갑게 이글거리는 하 늘빛 눈과 마주치기 두려워 소심하

게 눈을 깔았다.

"너는 몸이 아프니까......

발로 바닥을 툭툭 차며 어물거리 니 아리아가 눈을 부릅떴다. 둘러 준 이불이 홱 내팽개쳐졌다.

"내가 언니를 걱정할 거라곤 생각 안 해? 언니만 나를 걱정한다고 생 각해? 나도 언니를 걱정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건지 말해 주지 도 않고! 나갔다 오면 항상 다쳐 있고! 무리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이 는데 쉬지도 않고! 일 좀 그만하라 고 해도 말도 안 듣고! 제발 슈슈

언니 스스로를 걱정해! 내 병 같은 거 안 고쳐도 된다고 말했잖아!"

마수 토벌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는 사실은 여태까지도 아리아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위험하니 당장 그만두라고 할 게 뻔한 데다, 안 그래도 아픈 아이가 나를 걱정하지 않길 바랐으니까.

돈을 버는 데 급급해 요새는 하루 도 쉬지 않고 일을 나갔다. 그 때 문에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 너를 위한 건데.,

침울한 표정을 짓다 아리아의 눈 치를 보았다. 아리아가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억누르는가 싶더니, 끝내 커다란 눈물방울을 뚝뚝 흘렸

"언니가 나 때문에 힘든 거 싫단 말이야......•"

' 이런.,

입 안 살을 지그시 깨물며 조심스 럽게 아리아에게 다가가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품에 안겨 눈물을 펑 펑 흘리는 아리아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졌다.

■사랑스러운 아리아. 내 동생.'

작게 한숨을 쉬며 아리아의 부드 러운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가느다란 분홍 털실이 손가락 사이 사이로 섬세하게 얽혔다.

분명 어렸을 땐 키 차이가 크게 났던 것 같건만, 어느새 눈높이가 비슷해질 정도로 자란 아리아는 여 전히 어린애처럼 울었다.

•아무리 커도 아직 애구나.,

아마 내겐 영원히 아이일 것이다.

나는 아리아의 등을 다정스레 토닥 여 주었다.

"미안. 네가 걱정하지 않도록 조 심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정말 괜 찮아."

"또! 맨날, 맨날 괜찮다고만 하 고......!"

아리아가 흐느끼며 내 가슴팍을 퍽퍽 내리쳤다.

미안하지만 하나도 안 아팠다. 아 리아가 민망하지 않도록 최대한 아 픈 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눈을 굴렸다.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있는 아리 아가 민망하게도, 사실 내 몸 상태 는 피곤한 것만 빼면 정상이었다.

옷에 묻은 피는 내 피가 아닌 마 수의 피. 상처라고 해봤자 좀 긁힌 게 다였다.

애초에 소드 마스터의 몸은 웬만 한 충격이 아니고서야 흠집도 나지 않았고, 흠집이 나는 걸 허용하지 도 않았다. 그 전에 적들의 머리가 날아가니까.

두통이 좀 있긴 했지만, 그것도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가장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머릿속이 고양이가 가지고 논 뒤 의 실타래처럼 마구 엉켜 있었다. 등 뒤로는 식은땀까지 흘러내렸다. 입이 말라 침을 꿀꺽 삼켰다.

모든 문제는 조금 전 미끄러지면 서 머리를 땅에 시원하게 박았던 것에서 시작된다.

믿기 힘들지만, 나는 머리를 박는 순간 전생을 떠올려 버렸다.

전생에 내 이름은 이윤. 지구라는 행성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천애고아로 군사학을 공부하며 살 았다.

전생의 나는 지금의 나만큼이나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고, 지금의 나만큼이나 악착같이 살았다.

분명 다른 세계, 다른 환경임에도 지금의 나와 성향이 비슷하다는 것 이 흥미로웠고, 행복해 보이지 않 아 씁쓸하기도 했다.

전생의 난 30대 중반에 심장마비 로 죽었다. 천애고아로 고달픈 인

생을 살다가 악착같이 군사학 박사 학위를 얻어, 드디어 명문대 교수 가 되기 직전 겪게 된 억울한 죽음 이었다.

억울하긴 하지만 전생은 전생일 뿐이니, 만약 기억하게 된 것이 전 생의 기억뿐이었다면 이 일은 그저 신기한 경험쯤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상황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요정의 밤.'

간질간질하고 로맨스 느낌 폴폴

나는 이 단어는, 전생의 내가 읽었 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이름이 다.

뒷골목 창기의 아래에서 태어났으 나 요정 왕의 혈통을 이은 아름다 운 백작 영애, '아리아 드 프레이 야'.

그녀는 고귀한 친가의 핏줄이 부 끄럽게도 더러운 뒷골목에서 태어 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올곧게 자라난다.

그런 그녀에게는 어려서부터 앓고 있는 병이 있었으니.

원인도 치료 방법도 알 수 없는 희소병으로, 자랄수록 몸 상태가 악화되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오랫동안 병을 앓던 아리아는 병 환이 짙어진 15살 어느 날, 길에서 쓰러지고 만다.

때마침 그곳을 걸어가던 프레이야 백작이 쓰러진 아리아를 발견하고, 백작은 쓰러진 아리아를 백작가 저 택으로 데려간다.

백작가에서 먹은 여러 영약들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아리아는 백작

부부의 권유로 잠시 백작가 저택에 머물게 된다.

그 사이 따뜻한 마음씨로 백작 부 부의 마음은 물론, 백작가 사용인 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그녀는, 자식이 없던 백작 부부의 부탁으로 '아리아 프레이야'가 된다.

그 후 사교계로 진출한 아리아가 여러 해프닝들 속에서 잘난 남주들 과 썸을 타기도 하고 시간 나면 세 상도 구한다는 전형적인 이야기.

그게 바로 '요정의 밤'이었다.

요정 혼혈인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잘난 남자들을 후리고 다니는 역하 렘 로맨스.

뻔한 스토리에 식상한 소재지만, 흡입력 있는 문체와 깔끔한 전개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들었고, 전생의 난 '요정의 밤'을 꽤 재밌게 읽었 다.

문제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요정의 밤'의 여주인공 이름은 아리아라는 것.

'게다가 내 동생 아리아랑 과거

사정도 똑같아.'

15년을 애지중지 길러온 여동생 이 로맨스 판타지 소설 여주인공이 었다니! 이 세계가 소설 속이었다 니!

'게다가 요정의 밤은.'

기본적으로 여주 부둥물이었지만, 머릿속이 꽃밭이던 작중 아리아는 각성을 위해 여러 번의 시련을 겪 어야 했다.

'아리아가 왜 시련을 겪어. 애 머 릿속이 좀 꽃밭일 수도 있지, 왜

각성을 해!'

남의 귀한 여동생을 각성시킨답시 고 시련을 겪게 하다니,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소설엔 나도 등장했는데, 소설 내 '카슈미르 크리시스'를 떠 올리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소설의 카슈미르는,'

아리아가 겪어야 하는 '여러' 시 련 중 하나를 맡고 있는 악녀이자. 남주 후보 중 하나의 배 다른 동생 이었다.

사창가 창기와 카이사르 크리시스 공작 사이에서 태어난 카슈미르는 뒷골목에서 아리아와 함께 살아가 다 우연히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무식하면 용감한 건지, 그녀는 겁 없이 크리시스 공작을 찾아가 자신 을 딸로 받아줄 것을 요구한다.

그녀는 공작의 자비로 공작가에 입적되긴 하지만, 사생아라는 이유 로 사교계에선 조리돌림을 당하며 점점 삐뚤어지게 된다.

카슈미르는 여느 때처럼 사교계에 서 무시당하고 있는 중, 십여 년 만에 백작가의 영애가 된 아리아와 재회한다.

따돌림 당해 덩그러니 남겨진 자 신과 다르게 사교계의 시선과 남주 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아리아.

카슈미르는 아리아에 대한 질투심 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악녀로 각성 한다.

말 그대로 전형적인 로맨스판타지 의 질투 계열 악녀였다.

품속 아리아를 착잡한 눈으로 응 시했다.

내가 미쳤다고 내 사랑스러운 동 생을 괴롭히겠는가. 원작이 그렇든 원작 할애비가 그렇든, 내가 미치 지 않는 이상 아리아를 괴롭힐 일 은 없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원작의 카슈 미르와는 다른 내가 개입되면서 원 작이 엉키게 됐다는 것이다.

카슈미르는 10살이 되는 해에 아 리아를 떠나 공작가를 찾아간다. 내가 지금까지 아리아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카슈미르는 10살 전까지 아리아 와 살면서 아리아에게 관심이 없었 으니, 여태껏 아리아의 병을 고치 려는 노력도 해선 안 됐다.

카슈미르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인 물은 아니었던 만큼 소설의 내용을 송두리째 바꿀 거대한 문제는 아닐 지 모른다. 하지만 혹여나 나비효 과를 일으킬까 불안한 것이 사실이 었다.

아리아의 굽이치는 벚꽃색 머리카 락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아리아가 행복했으면 한다. 소설 에서 겪는 짧은 시련들조차 없이 그저 온전히 행복했으면 했다.

" 아리아."

낡은 가죽 갑옷을 젖은 넝마로 만 들 기세로 우는 아리아의 턱을 살 짝 들어 올리곤 눈을 맞췄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 새빨갛게 짓무른 눈가.

훌쩍이는 아리아의 동그란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언니가 행복하게 해 줄게."

아리아가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끊임없이 해 왔던 약속. 아직까지 지키지 못한 약속이지만, 이제는 정말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작이든 뭐든 상관없다. 아리아 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 어."

아리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니

아리아가 물기 어린 숨을 뱉었다.

"나는, 언니가 무사하기만 하면 돼. 건강한 언니랑 함께 사는 게 내 행복이야."

푸스스 웃으며 아리아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사랑스러운 내 동생은 마음씨조차 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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