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화
소설의 내용을 알게 된 이상, 아 리아를 호강시켜 주는 건 일도 아 니었다. 원작 루트만 타도 호강은 열린 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전까지는 일상을 지켜 야지.'
아리아가 백작가에 입양되기까지 는 이 일상을 지켜야 했다. 아리아 의 곁에서, 아리아의 검으로서 아 리아를 지킬 것이다.
물에 푹 젖은 솜처럼 무거운 두 다리를 느리게 움직였다. 쉬라고 잔소리를 하는 아리아를 겨우 달래 고 나온 길이었다.
' 서둘러야겠네.'
시간을 확인하곤 혀를 찼다. 늘 오후 6시로 고정되어 있는 약속 시 간까지 10분 언저리가 남은 시간이 었다.
며칠간 이어진 마수 토벌로 낡고 쇠해진 마나회로를 억지로 가동시 켰다. 속이 끓어오름과 동시에 마
나가 두 발을 감쌌다. 나는 가볍게 공중으로 도약했다.
내겐 2년 동안 거래를 진행해 온 의뢰인이 있었다. 그 의뢰인과는 늘 수도에서 가장 화려하고 붐비는 태양 신전 거리에서 만남을 가지곤 했다.
'이 의뢰인은 정말 이상하단 말이 지.'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이상한 의뢰 인을 떠올리며 옅게 한숨을 쉬었 다. 이 의뢰인은 만날 때마다 기행 을 벌여 골치가 아팠다.
인적 드문 어두운 골목길에 들어 서자,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레스토 랑이 골목 끝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헬레네 (Helene).
오직 예약제로 이루어지며, 너무 외딴 곳에 자리해 대부분의 이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곳. 가면을 쓰고 서만 입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높 으신 분들의 밀회 장소로 제격인 곳이었다. 심지어는 가격까지도.
늘 의뢰인이 식사를 샀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 이곳의 가격을 몰랐었 다.
'이거...... 설마 진짜 금입니까?'
'식용 금이니 염려치 않아도 돼 요.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버리라 고 할까요?'
'미친 거 아니야? 이걸 왜 버립니 까!'
그러다 식용 금가루를 뿌린 송로 버섯 구이를 대접받은 어느 날. 기 겁하며 가격이 적힌 메뉴판을 확인 한 뒤부턴 식사 때마다 다이아몬드 를 갈아 먹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눈과 하관만 드러내는 검은 가면 을 쓰고 목소리를 변조시키는 마도 구까지 착용한 뒤 목을 가다듬었 다.
"아, 아."
성별조차 짐작하기 힘들 만큼 변 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병 '미르'로서 일할 시간이었다.
드러난 레스토랑은 그야말로 돈을 처발랐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내부
는 화려한 가면을 쓴 귀족들로 가 득했다.
놀란 시선들이 피부로 닿았다. 화 려한 의상들 사이에서 혼자 검은 망토를 칭칭 두르고 있는 나는 공 작새 무리에 낀 까마귀 같았다.
"검은 재앙 미르?"
"그럴 리가요. 그가 왜 이런 곳 에......
"하지만 그가 이 근방에 자주 오 간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미르를 따라하는 자들은 워낙 많 으니까요. 요새 용병들은 다 저 차 림이더군요."
"그렇긴 하지."
레스토랑 일대에 파문이 일며 수 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다, 서서히 시선들이 떨어져 나갔다.
용병 '미르'가 이름을 날리자, 미 르의 특이한 복색을 따라하기 시작 한 용병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났다. 용병 중 열에 두엇은 이 차 림을 하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내가 별 변장 없이 돌아다녀도 알아서들 미르가 아니라고 오해해 주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예약이 되어 있으십니까?"
웨이터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정오에 하늘과 약속이 있습니 다."
웨이터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 다.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알아들어 야 할 이들은 모두 알아들었을 암 호였다.
"......그러시군요. 식사는 무엇으 로 하시겠습니까?"
"오늘 같이 화창한 날엔 레드 샴 페인과 서니사이드 업을 곁들인 스
테이크가 제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우중충했던 데 다, 레드 샴페인 같은 건 없으니 헛소리임이 분명함에도 웨이터는 짧은 목례와 함께 내부 귀빈실을 가리켰다.
"하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앞장서는 웨이터를 따라 익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하늘'이라는 별칭으로 소 개한 의뢰인과의 만남은 늘 헬레네 의 귀빈실에서 이루어졌다.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늘 그렇듯 복도 맨 끝 방 앞으로 나를 안내한 웨이터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돌아갔다.
'오늘도...... 잘해 보자.'
용병으로 일하며 수많은 의뢰인들 을 만났다. 기상천외한 인간들도 한가득 마주해 보았다.
그럼에도 이 의뢰인은 독보적으로 이상했다.
이번엔 반드시 그에게 휘말리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동그란 손잡이 를 돌려 열었다.
방 안은 황궁의 응접실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휘황찬란했다. 번쩍이 는 공간에서 나 혼자만 무균실에 세균 같았다.
방 안엔 총 네 명의 수행원이 있 었고, 모두 성기사들의 제복을 입 고 있었다. 이제는 꽤 익숙한 얼굴 들을 지나치며 문제의 의뢰인 앞으 로 걸어갔다.
하얀 망토로 가려진 몸. 내 것과
비슷한 형태의 흰 가면, 그 사이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
맑고 투명한 그의 눈동자는 갓 세 상을 본 아이의 것처럼 순했다. 그 앞에선 거짓을 고하지 못할 것 같 았다. 은은한 백합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대신관 님."
짧은 목례와 함께 의례적인 인사 를 뱉었다. 창문 너머를 응시하던 그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신관님 말고 불러 달라고 한 호칭이 있지 않나요."
붉은 입술이 화사한 호선을 그렸 다. 한 떨기 백합처럼 아름다운 웃 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민망 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엘."
머뭇거리다 의뢰인이 끊임없이 요 청해 오던 호칭을 어색하게 입에 올렸다. 엘이 부드럽게 웃었다.
의뢰인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 려 하지만, 엘과 함께 있으면 저절
로 긴장이 풀려 버리는 게 문제였 다.
"편하게 앉아요."
나는 익숙하게 엘의 맞은편에 앉 았다. 엘이 손을 까닥이자 수행원 들이 일제히 나갔다.
'소드 마스터랑 단둘이 마주하는 게 무섭지도 않은 건지, 내가 해치 지 않으리라고 믿는 건지.'
속으로 혀를 찼다. 무력이 없는 사람이 소드 마스터 앞에서 단신으 로 남는 건 목숨을 내놓았다는 소
리다. 엘은 지나치게 위기감이 없 었다.
"그간 무탈하게 지내셨습니까?"
예의를 갖춘 인사를 건넸다. 엘은 천천히 눈을 굴렸다.
"신전에서의 삶은 늘 똑같죠. 지 루하고, 진부해요."
턱을 괸 엘이 탁자 위 꽃병의 꽂 힌 꽃을 툭툭 건드렸다. 그의 나른 한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래서 당신과의 만남만 손꼽아
기다렸어요. 당신은 늘 나를 즐겁 게 하거든요."
날 향하는 엘의 눈은 항상 깊이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듯 반짝여 흠 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뿐이니.'
옅게 한숨을 쉬었다. 얼굴을 가려 도 잘생긴 의뢰인께서는 늘 솔직한 심중은 보여 주지 않으면서 사람이 오해할 만한 말들만 늘어놓곤 했 다.
"......클라키의 가죽과 마도루스의
피입니다."
엘의 지긋한 시선을 살짝 피하며 작은 자루를 꺼내들었다. 거대한 아공간과 연결된 자루엔 몇 날 며 칠 밤을 새워 토벌한 마수들의 부 산물들이 가득했다.
"늘 수고하는군요. 여기, 보수예 요."
엘은 자루 안을 확인하지도 않고 하얀 종이봉투를 건넸다. 실수인지 건네받는 중 그의 손끝이 느리게 내 손등을 쓸었다.
' 보수
나는 한참 종이봉투를 내려다보았 다.
내 피나는 노력들의 대가였다. 나 는 이것으로 아리아의 약을 살 터 였다.
허나 나는 돈을 앞에 두고도 그저 기뻐할 수 없었다.
'엘이 기행을 벌인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한 달에 4번, 나는 그에게 마수
토벌에서 얻은 유용한 부산물들을 판매하고, 그는 내게 금액을 지불 한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거래였다.
기묘한 것은 그가 내게 건네는 금 액은 늘 천 골드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백 골드는 평민들의 한 달 생활비 에 가까운 금액. 천 골드는 그 무 자비한 가격의 요정 숲 약수를 한 병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토벌하는 지역과 계절에 따라 등 장하는 마수들은 제각각이야. 그에 따라 토벌로 얻어내는 부산물의 가
치도 일정하지 못하고.'
내가 가져오는 마수 부산물은 때 와 장소에 따라 값어치가 마구 오 락가락했다. 때문에 천 골드라는 큰돈을 일정하게 지불하는 건 당신 의 손해라고 몇 번이고 설명해 주 었지만, 늘 끄떡없이 거금을 건네 는 엘은 내게 불가사의 그 자체였 다.
'게다가 늘 보수에 장난질을 하 지.'
여태껏 그의 장난에 놀라고 기겁 했던 나날들이란.
얼른 열어보라는 엘의 재촉에 어 쩔 수 없이 봉투를 열고 수표를 꺼 냈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대신관님."
"엘 "
" 엘 "
"그렇죠."
방긋 올라가는 입꼬리가 그렇게 약 오를 수 없었다. 나는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약속한 보수에서...... 0이 하나가 더 들어갔습니다."
일만 골드.
내 의뢰인은 상당히 미친놈이었 다.
"그렇군요."
어깨를 으쓱인 엘이 찻잔을 들었 다. 나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군요? 그게 끝?'
일만 골드는 장난으로 건넬 만한 금액이 아니다. 내가 반년을 마수 에게 짓밟히며 아등바등 일해야 겨
우 벌 수 있는 돈이란 말이다.
'아무리 대신관이라고 해도 그렇 지.'
나는 손안의 수표를 꽉 쥐었다.
엘은 자신의 정체를 직접 말하지 만 않았지, 숨기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내가 대강 예측한 그의 정 체는 대신관. 엘은 내가 대신관이 라 불렀을 때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정체가 대신관 일 거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대신관은 내가 우러러 보기도 힘
든 사람이야.'
신전과 황가가 함께 군림하는 솔 라티네 제국은 신전의 권력이 막강 했다.
정치가 황제파와 귀족파, 신전파 로 이루어졌을 정도이니, 신전의 교황은 황제와, 대신관은 후작과 맞먹었다.
'그런 대신관이 왜 나와 만남을 계속하는 건지, 못 퍼 주어 안달인 것처럼 구는 건지.'
나는 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실수니까 미르가 가져요."
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유려하게 찻잔을 기울이는 모습조차 한 점의 조각 같았다.
난 한숨을 쉬며 수표를 그에게 돌 려 주었다.
"이런 돈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지나칩니다."
"하나도 지나치지 않아요. 미르의 피 값이잖아요."
엘의 잔잔한 눈빛과 낮아진 목소
리가 어쩐지 서글퍼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뭘 안다고......
허벅지 위에 올린 무릎을 꽉 쥐었 다.
용병으로서의 피비린내 나는 인생 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내 선택이 니까. 비록 상실을 겪고, 매일 위기 를 겪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걸어온 길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런데,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면 서.'
어떻게 감히 내 피 값을 논하는 가. 꽉 쥔 두 손이 떨려왔다.
잘난 대신관님께서 피 값으로 빌 어먹고 사는 용병 나부랭이의 인생 을 이해할 리가 없다. 나는 기만당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대신관님. 이 이상 저를 기만하 지 마시죠."
이를 으득 갈며 그에게로 수표를 던졌다. 더는 그의 유희거리가 되 고 싶지 않았다.
"......그냥 받으면 안 돼요?"
"대신관님!"
"정말 아무런 의도도 없단 말이에 요. 그냥 호의라고요! 왜 항상 순수 한 호의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해요? 왜 은혜를 갚지 못하게 하 느냔 말이야! 당신도 그랬잖아요!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울컥한 표정으로 말하던 그가 어 느 순간 입을 턱 닫았다.
'......너를 뭐?'
미간을 좁혔다. 당황한 낯으로 입
술을 깨문 엘이 시선을 피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상한데.'
그의 반응에 미간을 좁히면서도 한숨을 쉬었다.
"장난은 이쯤 하시죠. 천 골드도 차고 넘칩니다."
천 골드도 과분했다. 정말 열심히 토벌에 임했지만, 단 한 번도 천 골드에 육박하는 물건을 가져온 적 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이유 없는 호의를 기쁘게 받 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하지 만 정말 미르를 조롱하는 건 아니 에요."
엘이 슬픈 눈으로 날 응시했다. 축 가라앉은 그의 표정에 어쩐지 죄책감이 들었다.
사실 엘이 나를 기만하고자 이런 일들을 벌이는 건 아니라는 걸 알 고는 있었다. 나는 거짓과 적의에 예민했으니까. 나를 우스갯거리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저런 눈을 할 리 없었다.
'차라리 이게 자존심 문제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그냥 받았을 텐데.'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한때 돈을 벌기 위해 귀족들 앞에서 개처럼 기어 다니기까지 했 다. 내게 자존심은 사실상 잔재도 없었다.
'그래도, 정당하지 않은 돈은 못 받아.'
허나 그럼에도, 그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땅을 치는 자존감을 가졌 음에도. 나는 정당하지 않은 돈을 받은 적은 없었다.
'자존심이 아니라 신념을 가져야 한다. 때와 상황 앞에서도 혼들리 지 않는 너만의 신념 말이다.'
언젠가 내 스승이 준 가르침. 나 는 이를 따라 자존심은 버렸으나, 스스로의 신념을 세웠다.
엘의 보수를 거절하는 것은 내 신 념이었다. 돈을 위해 사는 가난뱅 이 용병이 무슨 신념이 있느냐고
비웃을지도 모르나, 그럼에도 지키 고 싶은 나의 정의였다.
'정당하지 않은 보수는 받지 않는 다.'
일한 만큼 받고, 돈을 벌기 위해 불법적인 짓까지 하진 않는다. 천 골드가 내 신념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
그 이상을 받는 건 스스로의 신념 을 거스르는 짓이었다.
"다음부턴 이러지 않으셨으면 좋 겠습니다만, 제 반응이 지나쳤습니
다. 대신관님께서 죄송해하실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 무례를 용서 해 주셨으면 합니다."
허나 그럼에도 이번엔 내가 심했 던 게 맞았다. 무려 대신관인 엘에 게 보일 만한 태도도 아니었고, 내 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에게 할 말 은 더욱 더 아니었다.
올곧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정중히 사과하자, 엘이 천천히 입 을 열었다.
" 미르."
" 네?"
"당신에게 많은 걸 바라고 있진 않아요. 하지만, 나는 당신과 내가 친구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는 데......
느리게 깜박이는 눈꺼풀 아래 드 러난 은빛 눈동자가 투명한 물방울 들로 반짝였다.
"내가 미안해요. 내 마음대로 행 동해서. 그래도, 엘이라고 불러 주 면 안 돼요? 대신관님이라고 부르 면...... 나랑 미르가 아무 사이도 아닌 것 같아요."
처연하게 축 처진 눈꼬리로 금방
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