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화
확실히, 오늘은 내가 말이 좀 심 하긴 했다. 기만이라느니, 놀린다느 니. 대신관인 엘이 내 무례에 경을 치지 않은 것만 해도 놀라운 상황 이었다.
"제, 제가 실수했습니다. 앞으로 는 꼭 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혼치 않게 당황한 나는, 그의 눈 동자에 차오른 물방울에 어쩔줄 모르며 옆에 있던 티슈를 마구 뽑
아 그에게 건넸다. 짐작컨대 수십 장은 뽑은 것 같았다. 혹여 마음 여린 엘이 상처라도 받았을까 염려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엘이 많이 편 해졌구나.'
안절부절못하며 엘을 지켜보다 문 득 생각했다. 대신관인 그에게 내 신념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이렇게 그의 상처를 걱정하는 것 자체가 그를 친근히 여기고 있다는 증거였 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네? 앉으라 하셨기에 앉았습니 다.'
'내가 앉으라는 건 의자에 앉으라 는 거였어요. 왜...... 바닥에 무릎 을 꿇고 있는 거죠?'
문득 엘과의 첫 만남이 떠올렸다.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던 그날을.
용병 길드를 통해 엘이 나와 거래 를 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처음 으로 헬레네에 방문한 나는, 휘황 찬란한 건물에 무척 기가 죽어 있 었다.
'평민과 귀족은 한곳에 앉아선 안
됩니다.'
나는 그때 평민 용병으로서 귀족 들의 횡포에 익숙해져 있었다. 아 무리 영웅이라 칭송받고, 제국에 셋밖에 없는 소드 마스터 중 하나 임에도, 나는 귀족들에게 그저 평 민 용병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막강한 내가 자신들 앞에서 길 때 저열한 쾌감 을 느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그들의 저열한 쾌감을 충족시켜야 했고, 엘 또한 그런 종류의 만족감 을 얻기 위해 나를 부른 줄 알았 다.
'아, 제발...... 그러지 말아요, 제 발 '
아직도 그때의 당혹감을 기억한 다. 자신 앞에서 무릎 꿇은 나를 억장이 무너지는 눈으로 바라보던 엘은 아이처럼 울었으니까.
처음 만난 사내가 눈물을 터트리 는 상황에 미치도록 당황한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다 그를 안아서 달 래기까지 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엘과 나는 첫 만남부터 포옹을 한 기이한 사이였다.
'나는, 나는 당신이 행복하길 바 랐는데...... 왜, 이런 모습을 보여 주는 거예요. 당당한 모습을 보여 줘야죠,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는 데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던 엘 은, 자신을 안은 내 무례를 조금도 지적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덩치 를 생각하면 내가 그에게 안긴 것 같았지만.
나는 아직도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날의 엘을 기억한 다. 가까워진 거리에 짙게 풍겨 오 던 백합 향. 눈물을 머금은 주제에
집착과도 같은 빛을 띠고 번뜩이던 은빛 눈동자.
비록 눈빛이 조금 이상하긴 했어 도, 울고 있는 엘은 한없이 아름다 웠다.
신성하고 순수한 선의 결정체. 한 없이 여리고 약한 생명체. 하늘하 늘하고 아름다우나 툭 건드리면 부 러지는 나비의 날개 같았다.
그래. 나는, 엘을 처음 보고 천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앞에선 절대 무릎 꿇지 말아
요. 굽히거나 스스로를 낮추지도 말고요. 나는 귀족도 아닐뿐더러, 그 이전에 당신의 노예, 아니, 당신 과 같은 사람이니까, 내 앞에선 그 냥 당신으로 있어 줘요.'
나는 그때 느꼈다. 이 의뢰인은 한없이 착하고 여린 사람이라는 걸. 나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만 같은 느낌과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나는 그를 수상 히 여길 수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좋은 사람이었으니.
'의뢰인과는 거리를 둬야 하는 데...... 유일한 예외를 만들어 버렸
지.'
나는 속으로 짙게 한숨을 쉬었다. 이미 나는 엘과 너무 가까워져 버 렸다. 그는 내게 있어 소중한 친구 였다.
' 상처받았으려나......
엘은 대신관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음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혹시 내 말이 그 에게 커다란 상처를 줘 버렸을까 걱정되었다.
뻣뻣하게 앉은 채 슬쩍 눈치를 살
피고 있으니, 내가 건네준 티슈로 눈가를 닦던 엘이 피식 웃었다. 은 빛 눈동자 아래에 발개진 눈가가 지나치게 야살스러워 살짝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의뢰인과 고용인으로 만 나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슈슈 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어요."
아직 조금의 물기가 남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엘이 천천히 자기 손으로 내 손등을 덮었다. 커다란 손이 따뜻했다. 내 안색을 살피는 그의 시선은 내가 불쾌한지 확인하 는 것 같았다.
'이제 이 정도는 익숙하구나.'
스킨십이 많은 편은 아니었음에도 엘과의 접촉은 나쁘지 않게 느껴졌 다. 살짝 고개를 끄덕임으로 동의 를 표하니, 그가 내 손을 잡고 제 뺨에 대었다. 손바닥에 닿는 것은 사람의 온기 어린 뺨이 아닌 차가 운 가면이었음에도 기분이 이상했 다.
"꼭 엘이라고 불러줘야 해요. 미 르에게 그렇게 불리고 싶어요."
엘의 눈동자가 흐드러지게 휘어졌
다. 늘 생각하지만, 정말 악이라곤 조금도 모르는 순수한 천사 같은 얼굴이었다.
그의 따뜻한 손에서 전해진 온기 가 내 귀까지 닿은 건지, 나는 양 귀가 조금 달아오른 것 같다고 생 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먹지 그래요."
"괜찮습니다."
한바탕 난리 후에 이어진 것은 식 사였다. 헬레네에서의 식사는 늘
그랬듯 내가 먹어도 되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귀한 음식들뿐이었다.
"갈 때 카운터에서 음식 챙겨 가 는 거 잊지 말고요."
엘이 상냥한 목소리로 권고했다. 마른 나를 걱정한 엘은, 평소에도 잘 챙겨 먹으라며 나와 만남을 가 질 때마다 헬레네의 음식을 따로 더 포장해서 챙겨 주곤 했다.
처음엔 부끄러워 거절했지만, 받 지 않는다면 헬레네의 메인 셰프를 매일 내게로 출장 보내겠다는 소리 에 기겁하여 받기로 했다.
'나는 괜찮지만, 아리아가 먹었으 면 하니까.'
헬레네의 음식은 모두 산해진미들 뿐이다. 밥을 잘 먹지 않는 아리아 도 헬레네의 음식은 조금 손대곤 했으니, 이제는 안 준다고 해도 달 라고 빌어야 할 지경이었다. 어차 피 내게 자존심 같은 건 없었다.
"......늘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내가 해야죠. 내가 신의 귀한 뜻을 행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
화사하게 웃는 엘은 정말 빛나는 태양 같았다. 자애로운 태양신이 현현하면 엘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 다. 그 상냥함에 어쩐지 가슴이 뭉 클해져 나도 작게 웃고 말았다.
들어온 웨이터가 식탁을 깨끗이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다, 식탁에 준비된 물수건으로 두 손을 꼼꼼히 닦았다.
"지금 하시겠습니까?"
넌지시 물으니 엘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의자를 끌고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손을 잡아 주시겠습니까."
두 손을 엘 앞으로 뻗었다. 수줍 은 듯 눈을 내리깐 엘이 살며시 내 손을 잡아왔다.
그의 커다란 손은 내 손을 거뜬히 덮고도 남았다. 태양 신전의 대신 관답게 뜨거운 온기가 손을 가득 채웠다.
엘과 나의 기묘한 거래에서 가장 기묘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었다.
'정 보답하고 싶다면 내 손을 잡
아줄래요?'
거래가 세 번쯤 진행되었을 때, 과한 보수를 받는 것이 양심에 찔 려 더 해 드릴 건 없느냐고 물었을 때 이런 답을 받았었다.
손을 잡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 았으니 나는 별말 없이 수락했고, 이후엔 만날 때마다 손을 잡는 시 간이 추가되었다.
'신전에서의 생활이 많이 외로운 걸까.'
나 같은 용병 나부랭이에게 손을
잡아 달라고 부탁하는 엘은, 아마 많이 외로운 것 같았다. 흐}기야, 내 가 엘을 만나기 전까지 만나온 신 관들은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 으니, 어쩌면 순진하고 착한 엘은 신전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을지 도 몰랐다.
'어쩌면, 그 아이처럼.'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몇 년 전 일이지만, 나는 신전에 서 따돌림을 당하는 소년 하나를 구해 준 적이 있었다. 완전히 죽어
있는 검은 눈의 소년. 그때 일 때 문인지, 신전에 대한 내 인식은 그 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잘 있을까.'
사실 소년에 대한 기억은 그리 좋 기만 한 기억은 아니었다. 조금 슬 프고, 씁쓸한 기억이라면 모를까.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엘을 올려다 보았다.
계속 나만을 바라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로 보이는 건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가 유일했다.
다르다. 세상에 모든 불행을 끌어 안고 있는 것 같던 새까만 눈동자 와 선하고 순진하게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 한없이 착한 엘과 뒷골목 에서 살아온 티가 나는 더러운 성 격의 소년.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달랐다.
'하지만, 나는 왜 이리도 겹쳐 보 일까.'
경계심 많던 내가 엘에게 너무 쉽 게 마음을 열어 버린 건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어린아이와 엘이, 너무 겹쳐 보여서.
"엘. 혹시, 신전에서 당신을 괴롭 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물음을 건넨 것은 충동적이었 다.
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나 를 잡은 그의 손에 강한 힘이 들어 갔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더는 나를 괴롭힐 수 없어요, 미르."
순간 그의 입술 틈새를 비집고 나 온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에 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 다. 내 표정을 보곤 크게 흠칫한 엘이 황급히 웃었다.
"아, 나는...... 아니에요. 난 괜찮 아요. 아무도 날 괴롭히지 않아요."
단정 짓는 목소리가 상당히 딱딱 함을 내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 다. 기묘한 반응이었다.
'이런 말 싫어하는구나.'
허나 엘이 드러내기 싫어하는 걸
굳이 파헤치고 싶진 않았다. 최대 한 태연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말 없이 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눈 을 몇 번 깜빡인 엘이 짙은 숨을 뱉었다.
"나는 항상 이 순간을 기다려요. 아나요?"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내 귓가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나는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또 다쳤군요."
내 손을 내려다보던 엘이 속상한
듯 속삭였다.
'이게 아직도 안 나았나.'
넘어지며 전생을 떠올렸던 그때,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며 피부가 조 금 갈렸다.
'보통 소드 마스터는 이런 상처 따위 생기자마자 나았을 테지만.'
나는 소드 마스터임에도 회복력이 나 방어력이 상당히 떨어졌다. 체 력 단련 등의 수련도 없이 마수 때 려잡다 소드 마스터가 된 경우였으 니, 공격력만 월등히 높은 경우였
다.
'게임으로 치자면 모든 스탯을 공 격력에만 찍은 느낌이라고 할까.'
쉽게 피로해지는 몸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항상 치료해 줘도 또 다쳐서 오 네요."
옅은 한숨을 쉰 엘의 손에서 은색 빛이 터져 나왔다. 눈이 부셔 미간 을 좁히면서도 상처가 치유되는 경 이로운 광경을 두 눈에 똑똑히 담 았다.
'신성력으로...... 아리아도 치료할 수 있었다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리아의 병 을 고치기 위해 시도해 보지 않았 던 것이 없었고, 그 중엔 신성력도 있었다.
신전에서 치료를 받는 것은 통상 적으로 귀족들만 가능하다. 귀족들 만 가능한 것을 평민으로서 가능케 하기 위해선 막대한 돈을 들이부어 야 했다.
'아가씨에겐...... 신성력이 아예
통하지 않습니다.'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끌어 모아 간신히 만날 수 있었던 신관은 그 렇게 말했다.
요정이나 수인을 비롯한 몇몇 이 종족들은 신성력이 아예 통하지 않 으며, 인간 중에서도 몇몇 돌연변 이들은 신성력을 받아들이지 못한 다고 했다.
신성력은 신전의 상징.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지면 이 단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었다. 결 국 그 신관의 입을 막기 위해 돈을
더 써야 했고, 얻은 것은 없었다.
"항상 이렇게 안 해 주셔도 됩니 다."
별것도 아닌 상처에 대신관의 치 유를 받자니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 이니 그가 눈매를 늘어뜨렸다.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하 게 해 주면 안 돼요?"
'아, 진짜.'
말간 눈을 한 엘에게 거절의 말을 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눈
을 슬그머니 피하며 얌전히 치유를 받았다.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신성력으로 혼적도 없이 치료된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한 하늘.
'늦으면 아리아가 걱정할 거야.'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저는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느리게 눈을 깜빡인 엘이 아쉽다
는 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럼요. 피곤할 텐데 이만 들어 가 봐요."
엘은 참으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마주 웃고는 짧게 목례했다.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차근히 발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 다. 뒤통수로 진득한 시선이 따라 붙었다.
휴가는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