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
탁.
문이 닫히고, 엘의 얼굴에 걸려 있던 환한 미소가 천천히 걷혔다. 냉기가 감도는 은빛 눈동자는 시리 기만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성하."
제복을 차려 입은 성기사가 모습 을 드러냈다. 엘, 아니, 교황 엘리 오르는, 가면과 환영 마법이 걸린
후드를 벗었다.
태양 신전 교황의 상징과도 같은, 기다란 연하늘색 머리카락이 그의 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티 없이 하얗고 맑은 피부. 신의 현현과도 같은 지독한 아름다움과 성스러움 을 머금은 미모.
허나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은 섬 뜩한 차가움만 남아 인간 같지가 않았다.
엘리오르를 바라보던 성기사가 침 을 꿀꺽 삼켰다. 신의 사자라는 저 사람 앞에 설 때면 공기가 얼어붙
고 자신 또한 얼어붙는 것만 같았 다. 눈동자만 겨우 굴리던 성기사 는 어떻게든 이 분위기에서 벗어나 기 위해 입을 뗐다.
"......미르 님과 만남은, 즐거...... 컥!"
" 닥쳐."
아름다운 은빛 신성력의 줄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성기사의 목을 졸랐다. 숨이 막힌 성기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엘이 탁자 위의 레드와인을 오프너조차 없이 열었다.
"지금 회상 중인데, 방해되잖아."
초점 없는 눈이 카슈미르가 앉아 있던 자리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탁자 위 잔엔 시선조차 두지 않은 채 와인을 병째로 기울이는 엘리오 르는 정말 미친놈 같았다.
처음으로 엘리오르를 섬기게 된 성기사는 연보랏빛 눈동자의 대신 관 하나가 어째서 교황은 미친놈이 라고 노래를 불렀는지 알게 되었 다.
"보고해."
기어코 와인 한 병을 비운 엘리오 르가 붉은 피 같은 와인을 입가에 서 닦아내며 명했다. 드디어 목을 조르는 신성력에서 벗어난 성기사 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자신에게로 향하는 위압적인 은빛 눈동자가 허튼 소리를 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오늘 오전, 마수 토벌을 마 치신 미르 님이 자택으로 돌아가다 쓰러지셨습니다."
"뭐?"
쾅
은빛 신성력이 성기사의 오른편 벽을 무너뜨렸다. 은빛 눈동자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사람을 산 채로 찢어죽일 듯한 눈빛과 마주한 성기 사의 온몸엔 식은땀이 흘렀다.
"아, 아시다시피 미르 님께선 기 척에 예민하셔서 상당한 거리를 두 고 관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쓰 러지는 모습을 옆에서 보진 못했으 나, 외부에 의한 기절은 절대 아니 었습니다! 쓰러지신 미르 님을 병 원에 모셔다 드렸고, 진찰을 받으 시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다급하게 말을 잇는 성기사의 표 정이 초조했다. 엘리오르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성기사는 분노한 것보다 갑작스럽게 잔잔해진 은빛 눈동자가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쓰러진 이유가 뭐였지?"
성기사는 잠시 망설였으나, 그렇 다고 거짓을 말하면 더욱 더 수습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과로였습니다."
쾅
성기사의 왼편 벽이 박살났다. 성 기사의 커다란 어깨가 크게 튀었 다. 성기사가 덜덜 떨든 말든, 엘리 오르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대체 왜!'
카슈미르는 엘리오르의 도움을 받 으려 하지 않았다. 한 번쯤 못 이 긴 척 받아들일 법한데, 조금만 지 나치려고 해도 망설임 없이 그를 거절했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 강직한 모습 은 이런 면에서도 어김없이 작용했
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별거 안 되 는 돈을 내밀고, 사사로운 상처를 치료해 주며, 멀리서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침내 황제와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교황이 되었음에도, 엘리오르 는 지독한 무력감을 느꼈다.
서늘한 은빛 눈동자가 성기사를 응시했다. 엘리오르는 잠시, 화풀이 겸 저 머저리를 죽여 버릴까 생각 했다.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위험 을 느낀 성기사의 온몸이 굳었다.
'귀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 사람 은 타인의 귀천을 구분할 자격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의 사랑은 분명 이런 짓을 좋아하지 않겠지.
엘리오르가 짙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헬레네를 폭파시키고 싶은 충 동을 억누르는 건 오직 카슈미르 때문이었다.
"나가."
"네, 네!"
살았다는 생각에 숨을 크게 들이 쉰 성기사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방에서 거칠게 마른세 수를 한 엘리오르가 힘이 풀린 몸 을 등받이에 기댔다.
"왜...... 당신은 내게 기회도 주지 않아, 왜......
당신은 어찌 이리 날 비참하게 만 드는지. 나는 드디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올랐는데, 당신을 위해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지.
진분홍빛 태양이 저버린 하루는 너무 길다. 자신의 신을 잃은 엘리 오르는 늘 밤을 살았다.
"또, 밤이야......
짙은 갈망이 담긴 울림만이 빈방 을 가득 채웠다.
' 지친다.'
일이 끝난 하루는 고단했다. 무거 운 몸을 질질 끌며 걸어가다, 상점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발견했다.
정리할 새도 없어 이리저리 뻗친 긴 검은 곱슬머리. 눈두덩이 아래 로 짙게 자리 잡은 눈 그늘. 피곤 함에 절어 생기 없는 진분홍색 눈 동자.
과로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얼굴 이었다.
'아리아가 보면 걱정할 텐데.'
창백한 뺨을 쓸며 피곤에 찌든 인 상을 완화시키려 노력했지만 인상 이 더 일그러질 뿐, 진전은 없었다. 축축 늘어지는 발걸음을 골목 너머
로 옮겼다.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피 냄새.
"포위하라!"
골목으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그 대로 멈췄다. 빠르게 뒷걸음질 치 곤 골목의 동태를 살폈다.
칼에 찔려 피를 흘리는 남자, 무 장한 채 남자를 둘러싼 검은 복면 들.
오래 생각할 것도 없다. 암살하고 암살당하기 직전의 생생한 현장이
었다.
"너는 이제 독 안에 든 쥐다!"
살수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으하하 웃었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웃음소리 였다.
'오글거려.'
저런 대사를 실제 입 밖으로 낼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배후가, 누구냐.
상처가 고통스러운지 앓는 소리를 낸 남자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 의 눈빛이 죽기 직전의 사람 같지 않게 차갑고 올곧았다.
' 귀족이네.'
어렵지 않게 판단을 내렸다. 평민 행세를 한 것 같지만, 위급한 상황 에서도 잃지 않는 고고함은 추레한 행색으로도 감춰질 수 없었다.
'꽤 높은 작위까지도 생각해 볼 법한데.'
남자를 둘러싼 살수들은 모두 여
덟. 살수들은 모두 실력자임에도 남자에게선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 지 않았다.
'일반인 하나 처리하는 데에 돈을 많이 들였군.'
실력 있는 살수들은 절대 푼돈으 로 움직이지 않는다. 무력에 일가 견이 없는 남자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살수를 여덟이나 보냈다는 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었 다.
"오늘 죽을 놈이 배후는 알아서 무엇 하려고?"
살수들의 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빈정거렸다. 복부의 상처를 팔로 감싼 채 신음을 뱉은 남자가 허탈 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지나치게 써서, 보고 있는 내가 인상을 찌푸 렸다.
"그래. 나를 죽이려는 이가 친애 하는 어머니 말고 달리 누가 있을 까. 괜한 걸 물었군."
'• ...어마어마한 콩가루 집안인 모양인데.'
내 집안도 만만치 않은 콩가루였
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우리 자매 를 죽이려 들진 않았다. 이런 상황 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익숙하게 상 처를 틀어막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안쓰러움까지 느껴졌다.
"하하! 예리하군! 비상한 눈치가 안타깝지만 넌 여기서 끝이다!"
또다시 부자연스럽게 웃은 살수가 검을 높이 치켜들고 남자에게 성큼 다가갔다. 날카로운 검 끝을 응시 하다 체념한 듯 눈을 감는 남자는 못내 처연해 보였다. 그 모습을 모 두 눈에 담은 나는 짙은 한숨을 내 쉬었다.
이 상황에 대한 내 입장은 뻔했 다.
나는 망토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주머니에서 가면을 꺼내어 썼다.
'뒷일이 생기지만 않으면 좋으련 만.'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살수들과 엮여서 좋은 꼴은 나지 않는다. 이 일을 계기로 곤란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후에 무슨 대가
를 치르든 이 남자를 살릴 것이다. 또다시 이 순간이 온다고 해도 같 은 행동을 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 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내가 지나치면 이 남자는 반드시 죽으니까.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단 다.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어. 늘 잊지 마렴.'
내 이상향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사람이 살아 있
음에 이유가 필요 없듯이, 살리는 데도 이유가 필요 없었다. 아직 남 자는 살아 있고 내가 살릴 수 있으 니까.
딱 그뿐이었다.
거센 마나의 바람과 함께 가볍게 도약한 나는, 다친 남자 앞에 서서 살수들을 막아섰다.
"뭐, 뭐야! 넌 누구냐!"
살수들이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황
급히 내게 무기를 겨누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 누구냐고.'
상처 입은 남자를 곁눈질했다.
부상으로 인해 새하얗게 질린 얼 굴과 그 사이에서도 붉게 생기 도 는 입술. 남자임에도 미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외형.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
'위험에 처한 공주님 같네.'
필터를 거치지 않은 생각을 한 나
는 무심코 입술을 뗐다.
"백마 탄 왕자다."
주위가 삽시간에 냉랭해졌다. 한 순간에 공주가 돼 버린 남자가 미 간을 찌푸렸고, 긴장하던 살수들은 넋 빠진 표정을 지었다.
" 미친놈이군."
살수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완벽 히 미친놈을 보는 눈이었다.
'어차피 내 얼굴도 모르는 놈들인 데.'
뒤늦게 살짝 민망함이 들었지만 애써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이 나를 미친놈으로 보이든 말 든 별 상관 없었다.
'빨리 끝내자.'
나는 생각 없이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대다, 퍼뜩 손을 뗐다.
'시체 치우고 싶진 않으니까.'
실력자들이긴 하나, 소드 마스터 에 비할 바는 아닌 자들이다. 함부 로 검을 휘둘렀다간 죽을 게 뻔했
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머리를 긁적였다.
'검 말고 다른 무기가 있나.'
무기로 쓸 만한 게 있을까 싶어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무제 한 아공간은 아니라도 꽤 넓은 아 공간이라 주머니 안엔 별 잡동사니 들이 다 있었다.
나를 미친놈 보듯 바라보고 있는 주위 사람들을 무시한 채 계속 주 머니를 뒤적이다, 손에 잡힌 길고 매끄러운 무언가를 꺼내 올렸다.
그리고 당황했다.
'이런 게 왜 있지......?'
나는 손에 쥔 물체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내가 꺼낸 것은, 길고 매끈한 쇠 파이프였다.
"크하하하! 정말 미친놈이었군!"
살수가 찢어져라 웃음을 터트렸 다. 상처 입은 남자는 자신을 지키 려는 듯 나타난 내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한 건지, 포기한 표정을 지었
다.
'이 자식들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네 사지 에 직접 기어 들어와 명을 재촉하 는구나! 겨우 그런 것으로 우리를 상대할......•"
신나서 떠드는 수장 살수의 헛소 리를 굳이 반박할 것도 없었다. 나 는 그저 파이프에 기운을 불어넣었 다.
쐐액!
돌풍이 휘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흉흉한 칠흑색 오러가 파이프를 감 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