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화
상념에 빠져 멍하니 약초만 빻고 있으니 디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 다.
"......미르? 괜찮은가?"
"아, 네. 다 됐습니다. 상처를 좀 보겠습니다. 셔츠를 걷어 주십시 오."
퍼뜩 정신을 차리곤 휘휘 손짓했 다. 살짝 머뭇거리던 디디가 셔츠 를 느리게 걷어 올렸다.
상처는 복부 왼편. 다행히 장기들 은 다 빗긴 곳이었으나, 그래도 깊 었다. 상처를 대강 훑어보곤 쯧 혀 를 찼다.
"아예 벗는 게 편할 것 같군요. 옷 벗으십시오."
무심한 투로 벗을 것을 종용하니 디디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벗겨 드려야 합니까?"
빨리 안 벗고 뭐하냐는 눈빛을 보 내자 그가 헛웃음을 뱉었다.
"내게 그런 말을 하고도 살아남은 자는 그대가 유일할 걸세."
"아주 영광입니다."
대충 대답하니 디디가 헛웃음을 짓곤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길고 예쁜 손가락 사이로 단추들 이 풀려 나갔다. 마지막 단추까지 풀리고 나니 커다란 셔츠 아래 감 추어져 있던 단단한 몸이 드러났 다.
그의 맨몸을 보게 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 얼굴에 몸까지 좋으면 반 칙 아닌가.'
피로 붉어진 셔츠를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침대에 무방비하게 누운 미 인. 긴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눈을 내리깐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정밀하게 짜인 상체의 근육. 그의 튼튼한 복근은 그린 것 같았다. 비 쩍 마른 몸에 근육만 붙은 나완 다 르게 적절한 영양섭취와 갖춰진 운 동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디디의 몸은 차라리 조각상 같았다.
'환자다.'
일순 술렁인 마음을 정리하며 담 백하게 치료를 이어갔다.
정확히는, 담백하게 이어가려 노 력했다.
솔직히 환부에 손을 댈 때 어쩔 수 없이 만지게 되는 단단한 몸과 디디의 묘한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인간은 시각적 자극의 약했다. 악 마의 유혹을 받는 기분을 느끼며 붕대를 집어 들었다.
"앉으십시오. 붕대 감아 드리겠습 니다."
내 말에 누워 있던 디디가 상체를 일으켰다. 아슬아슬하게 어깨에 걸 쳐 있던 셔츠가 어깨선을 타고 흘 러내렸다.
'불쾌할지도 모르니까.'
지나치게 아찔해 계속 시선이 갔 지만, 그를 불쾌하게 하고 싶진 않
았다. 드러난 넓은 어깨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붕대를 풀었 다.
"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디디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의 커다란 몸에 붕대를 두르기 위해선 거의 그를 껴안아야 했다.
'동요하지 말자. 환자다.'
야심한 밤에 과년한 남녀가 부둥 켜안고 있으니 오두막의 공기가 묘 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디디의 체향이 바닐라 향이라는 새로운 사
실을 알아 버렸다. 짙은 바닐라 향 이 자꾸만 코끝을 스쳤다.
'어색해 죽겠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는 원체 어색함과 묘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 하는 사람이다. 뭐든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것이 좋았다. 어딘가 몽 글몽글한 지금 같은 상황엔 면역력 이 없었다.
"......여태껏 나를 보는 시선들은 딱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졌지."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디디가
염세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첫째는 내게 한계 이상을 기대하 던 경외의 시선. 둘째는 내가 실수 하기만을 기다리는 증오의 시선. 셋째는......
뜨겁게 나를 주시하는 시선에 결 국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다,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착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 어딘지 염세적이고 어두운 눈빛이 그의 인 생을 이야기했다. 디디가 나를 똑 바로 응시했다.
"......내게서 무언가를 얻어내려 하는, 욕망의 시선."
고막을 파고드는 음울한 목소리가 시렸다.
'귀족이나 평민이나 비슷하구나.'
참으로 우습게도, 내가 더러운 뒷 골목 생활 따윈 알지 못할 것 같은 이 고귀한 남자에게서 느낀 것은 동질감이 었다.
"현재까지 만나 온 이들 중 이 세 가지 부류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네. 모두 눈빛에 담겨 있으니
속을 읽는 건 쉬웠지."
디디의 커다란 손이 내 턱을 살짝 잡아당겼다.
무방비한 상태였던지라 힘줄 틈 없이 그에게 끌려갔다. 손으로 침 대를 짚었으나, 몸이 기울어져 그 의 가슴팍에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 다.
새파란 눈동자가 나를 해부할 듯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대의 눈에선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내게 무얼 바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당연하지. 바라는 게 없으니까.'
조금 억울해져 입술을 꽉 물자, 디디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부 드러운 갈색 머리가 내 얼굴 위로 닿았다. 달콤한 향취가 코끝을 찔 렀다.
"다시 한 번 묻겠네."
코앞에 색정적인 붉은 입술이 사 르르 열린다.
"날 살려준 이유가 뭐지? 뭘 원
하나?"
디디의 눈동자엔 불신만이 가득했 다.
'......당하고 살았군.'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여태껏 얼 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의심이 갈 만한 상황이긴 하 다. 모르는 이가 자신을 암살자에 게서 구해 주고는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상처까지 치료해 주고 있으 니. 심지어 그 대상이 용병인 미르
였으니,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 것 이 이상하기도 했다.
한숨을 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 다.
"애초에 뭘 바란 적도 없지만, 뭘 바란다고 하면 줄 겁니까?"
디디가 비릿하게 읏었다.
"소드 마스터인 그대라면 날 협박 해서라도 취할 수 있겠지."
'자식 참.'
턱을 잡은 그의 손을 부드럽게 쳐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가운 시선을 무시한 채 서랍장을 뒤적였 다.
"당신은 그냥 운이 좋았던 겁니 다. 피 보기 싫어하는 소드 마스터 를 만났으니까."
커다란 셔츠를 디디에게로 던졌 다. 내 셔츠들 중 제일 큰 사이즈 로, 내게는 편하다 못해 이불보를 뒤집어쓴 듯 넉넉했으나, 디디에게 는 좀 작을 것 같았다.
"그러니 헛소리하지 마시고 옷이
나 갈아입으시죠."
셔츠를 낚아채곤 나와 셔츠를 번 갈아 보던 디디는 끼는 셔츠를 걸 쳐 입었다.
"......그래. 용병 미르는...... 영웅 이라 불렸지. 마수에게서 사람들을 구하는 영응, 검은 재앙. 용병왕. 그런 이름으로 불리더군, 그대는."
마주한 디디의 얼굴엔 표정이 없 었다.
"하지만 나는 영웅을 믿지 않아. 대가 없이 베푸는 호의 같은 게 존
재할 수 있을 리 없잖나."
대가 없는 호의라곤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구는 디디는 내 오 해일까, 조금 슬퍼 보였다.
"끝까지 대답하지 않을 셈인가?"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계속 대답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 다.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 이유가 없었다. 지나가다 위험해 보이기에 도와줬다. 그 사
이에 어떤 이해관계가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저 얄팍한 호의, 그 이상 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 없이는 납득할 수 없어 보였으니, 나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미르는 혼히 그런 호 칭으로 불리곤 합니다."
나는 디디와 똑바로 눈을 맞췄다.
"하지만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
나는 영웅같이 거창한 것이 아니
었다. 내 단언에 디디가 미간을 찌 푸렸다.
"그럼 의도가•• ...
"제가 당신에게 했던 행동은 영웅 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했어야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는 건 알고 있었다. 눈앞에 사람의 생명보단 자신의 안전을 더 귀히 여기는 이들은 많을 것이다.
'그 무엇도 인간의 생명보다 먼저 가 될 순 없다. 잊지 말아라.'
허나 내 기준 아래 인간은 그런 존재였다. 내게만 주어지는 스스로 의 잣대 아래 나는 무엇보다 생명 을 중시했다.
"......결국 이유 없이 날 구해 줬 다는 소리군."
디디의 눈매가 날카롭게 섰다. 죄 인을 심문하듯 서늘한 목소리. 믿 음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불신의 태도였다.
"안타깝게도 그 소리를 하려는 게 맞습니다."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디디 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믿지 않네."
"그럼 믿지 마시죠."
"뭐?"
약초를 빻는 데 사용한 절구를 느 긋하게 씻고 있자니 그가 이를 갈 았다.
"빨리 원하는 걸 말하게!"
모든 것에 대가가 있다. 그 진리 에 대해선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나는, 늘 속고만 산 것 같은 이 남자에게 한 번쯤은 순수한 호 의를 보여 주고 싶었다.
"원하는 건 없습니다."
"믿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믿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 까."
계속 오가는 똑같은 문제. 혼란스 러운 듯 진동하는 파란 눈동자와 마주한다. 인간 불신과 염세적인 빛으로 가득 찬 눈빛이 누군가와 닮아 보였다.
나였다.
"믿지 말고, 계속 의심하십시오. 대체 뭘 요구할까 불안에 떠시고, 호의를 불길해하세요. 혼자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다, 마지막까지 의심을 품고 당신 발로 이 오두막을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 길로 무사히 당신 집에 도착하 면 그땐 믿어지겠죠."
새파란 눈동자가 호수 위에 커다 란 바위를 던진 것처럼 크게 일렁 였다.
"이제 주무시기 바랍니다. 환자에 게 충분한 수면은 필수니까."
"••••••왜?"
'너도 참 징하다.'
쯧, 혀를 차며 디디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상체를 굽혔다. 얼굴이 맞 닿기 전에 멈춰서 검지로 그의 이 마를 툭 밀었다. 디디의 몸이 기우 뚱하며 힘없이 침대에 눕혀졌다.
"살아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사 람을 살리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 까?"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뿐이었 음에, 이유 없는 호의를 보여 줄
뿐이다.
일순 그의 눈빛이 몽롱함으로 가 득 물들었다.
"그러니까 이제 좀 주무십시오. 나도 자게."
디디의 얼굴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어째서인지 바로 이불을 내리지 않던 그는, 한참 뒤에야 이 불을 얼굴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대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
야."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 새하 얀 피부에 발개진 양 귀가 눈에 띄 었다.
'이 인간 왜 이러지?'
살풋 미간을 좁혔다. 불신과 서늘 함으로 가득 차 있던 디디가 묘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 건 한순간 이었다.
'많이 졸린가?'
밤의 장막이 짙게 깔린 한밤중이 다. 환자를 너무 오래 잡아 뒀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전 다른 곳에서 잘 테니 편하게 주무시죠."
"잠깐, 그대 가려고?"
조금 차가운 손이 손목에 닿았다. 어쩐지 다급하게 손목을 붙잡는 디 디에 의해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 다.
"다른 곳에서 자고 아침 일찍 돌 아오겠습니다."
버리고 가나 걱정하는 건가 싶어 타일렀다.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디디는, 무언가 결심한 표정
으로 내 손을 턱 잡았다.
"가지 말게."
' ?'
떨떠름한 내 표정에도 그의 눈빛 은 강건했다.
" 왜요?"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하던 그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무섭네."
"••••••네?"
"혼자 있기 무섭단 말일세."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디디를 보 자니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전혀 무서운 기색이 아니었 다.
"정말 가 버릴 건가? 들짐승이라 도 나올까 두렵단 말일세."
울상을 지은 디디가 내 손을 꼭 잡아왔다.
'상관없긴 한데......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디디를 훑
어보았다. 그가 날카로운 눈매를 처연하게 늘어뜨렸다.
"날 놓고...... 가 버릴 텐가?"
미인의 표정 공격은 강력했다.
'하기야...... 환자를 혼자 두고 가 는 것도 불안하지.'
마음이 약해진 나는 눈을 굴렸다. 사실 디디가 불편해할까 봐 자리를 피하는 것뿐이지, 난 어디서 자든 하등 상관이 없었다. 나는 짙게 한 숨을 쉬었다.
"전 의자에서 자겠습니다."
디디의 얼굴이 환해진다. 다시 화 사해진 낯이 눈이 부실 지경인지라 비스듬히 시선을 돌렸다. 그가 침 대를 툭툭 두드렸다.
"같이 침대에서 자도 되네만."
"헛소리."
단호하게 일축하고 발걸음을 옮겨 문 옆 스위치를 내렸다. 오두막을 밝히던 등이 빛을 잃었다. 은은한 달빛만이 오두막을 비췄다.
어둠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자리
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뒤척이 는 디디의 기척이 느껴졌다.
"슈슈, 있나?"
" 있습니다."
야행성 짐승의 것처럼 어둠속에서 도 빛나는 디디의 푸른 눈과 마주 했다. 그의 손이 주위를 더듬거렸 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허공에서 멈춘 손이 소리를 따라 내 쪽으로 방향을 옮겼다. 디디의 손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손 "
" 손?"
작게 되묻자 푸스스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손잡아 주지 않겠나."
점차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는지, 그의 눈이 정확히 내게로 향했다. 디디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무서워서 그래."
무서워 보이긴커녕 즐거워 보였
다. 분명 어이가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음에도.
"겁쟁이군요, 디디는."
군말 없이 그의 손을 잡아준 것은 한순간의 충동 때문이었다.
상처와 굳은살로 뒤덮인 작은 손 과 흠집 하나 없이 예쁜 큰 손이 맞잡혔다.
' 조금은......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나.
닿아오는 온기가 그리 나쁘진 않 았다.
"잘 자, 슈슈."
몸을 뒤척여 내 쪽으로 누운 그가 속삭였다. 희미하게 웃었다.
"디디도, 잘 자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디디가 사라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