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화
'소드 마스터는 자연과 가장 가까 운 존재다.'
자연이 인간에게 선물하는 힘, '마나'. 그 마나를 한계까지 끌어올 려 '오러'라는 학살 무기를 창조해 내는 소드 마스터.
소드 마스터는 늘 자연을 느꼈다. 미세한 떨림과 스쳐 지나가는 살 기, 미묘한 이질감, 미미한 악의 드
역설적이지만, 소드 마스터는 너 무 예리하기에 도리어 무감각해지 고는 했다.
긴급 상황과 위기가 그들 앞에선 우스운 것으로 전락했다. 나 역시 한계를 뛰어넘은 강함에 도달한 뒤 부터는 많은 것에 무감해지기 시작 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저......
"도련님."
그렇기에 오두막에 밤손님이 찾아 왔음을 알고도 태연히 잠을 흉내
낼 수 있었으리라.
주위에 마나를 덮어놓고 자는 것 은 일종의 습관이다. 마수가 가득 한 산에서 야영하며 긴장을 놓았다 간 불시 침입한 마수에 의해 사지 가 찢기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주위에 쥐라도 한 마리 어슬렁거렸다간 바로 눈이 떠졌다.
"......도련님. 모시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소드 익스퍼트 수준의 실력자로 느껴지는 남자가 이 숲에 발을 들인 순간, 내 잠은 진즉 깼
다 이 말이다.
머뭇거리며 디디를 도련님이라고 호칭하는 남자에게 감각을 집중했 다. 무장은 했으나 공격을 할 기미 는 느껴지지 않았다.
'디디를 데리러 온 사람인가.'
의자에 기대 눈을 감은 채 시각을 제외한 감각들로 상황을 판단했다. 정황상 밤손님은 디디 가문의 기사 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자는......
"조용히 말하게."
'이미 일어나긴 했는데.'
이 상황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것 도 민망하다. 갈 때까지 자는 척하 기로 마음먹고 상황이 지나가길 기 다렸다.
"설마 저하,"
" 입."
"......도련님께 위해를 가한 자입 니까?"
스릉.
검집에서 검을 꺼내는 듯 쇠붙이
가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경계 태 세라도 취해야 하나 망설이던 찰 나,
"경거망동하지 마라. 내 생명의 은인이다."
디디가 서늘하게 저지했다.
그의 커다란 손가락이 내 손을 휘 감았다. 손을 타고 퍼져 오는 온기 가 낯설었다. 남자가 곧바로 검집 에서 손을 뗐음에도, 디디는 별말 없이 내 손만 만지작거렸다.
남자가 초조하게 말했다.
"도련님. 이제 슬슬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궁이......
"저택이 난리가 났겠지."
디디가 남자의 말을 성급하게 끊 었다.
'좀 이상한데.'
아까부터 무언가를 숨기려 하는 것 같은 그. 그런데 여기서 무언가 를 숨겨야 하는 대상은 나밖에 없 었다.
나 안 자는 거 알고 있나.
' 설마.'
자는 줄 알고 있다면 저런 식으로 숨기려 할 리가 없다.
내 손목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냥 눈을 뜰 까도 싶었지만, 귀찮은 일이 생기 는 건 싫었기에 일단은 버텨 보기 로 마음먹었다.
"도련님."
남자가 초조한 목소리로 디디를 재촉했다. 이젠 아예 양손으로 내
손을 주물거리기 시작한 디디가 느 릿하게 대답했다.
"그래. 가야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 다.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기분이 묘했다. 살려준 이유를 말 하라고 그렇게 날을 세웠으면서도 살려준 게 고맙긴 한 모양이었다. 그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옷이...... 너무 작지 않으
십니까?"
남자가 묘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셔츠를 단추도 채 못 잠그고 겉옷 처럼 걸친 채 자던 디디가 떠올랐 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옷 주인이 작아서 말일세."
'이 자식이.'
미간이 꿈틀거리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분명 내가 디디보다 머리 하나 반 정도는 작긴 했으나 그건 디디가 너무 클 뿐, 내 나이 평균 을 생각해 보면 그리 작은 키는 아
니었다.
잠시 나를 내려다보던 디디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정이 깃든 조심스러운 손길에 의아해하면서도 각오를 다졌다.
'만약 가면을 벗기려 하면.'
남자와 디디, 둘 다 제압해야 한 다.
가면을 벗기려는 디디의 손보다 디디의 목덜미를 내려치는 내 손이 훨씬 빠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 긴장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상황
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무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 잠깐 동안 나도 디디에게 정이 들었나. 웬만해선 그를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도련님."
"쉿."
나와 디디를 번갈아 보던 남자의 목소리가 묘했다. 설마 하는 것 같 기도 했고, 경악한 것 같기도 했다.
작게 숨을 내쉰 디디가 머리를 쓰
다듬던 손을 내 얼굴 위로 옮겼다.
가면으로 가려지지 않은 눈두덩이 위를 살살 더듬고, 가면에 덮인 콧 대를 타고 내려가 양 뺨을 조심스 레 매만지며, 드러난 입술 주위를 배회하는 손.
그의 손은 가면을 벗기려는 게 아 니라, 내 얼굴을 감각으로 기억하 려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구네, 진짜.'
손가락이 입술에까지 닿으니 기분 이 정말 이상해졌다. 차라리 빨■리
가 버렸으면 하는 마음에 깨려는 것처럼 살짝 뒤척이자, 디디가 멈 칫하며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이제 정말 가야 합니다."
정말 급한지 남자가 간청하듯 재 촉했다. 남자를 가볍게 무시한 디 디가 내 주위를 기웃거렸다.
"불편하겠군."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내 목 과 무릎 뒤로 단단한 팔이 들어왔 다.
몸이 순식간에 들어 올려졌다. 머 리에 닿는 단단한 가슴. 가볍게 날 들어 올린 디디가 혀를 찼다.
"너무 가벼운데."
이 남자가 왜 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다정한 태도와 걱정스 러운 목소리, 모두 내겐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딱딱한 매트리스가 등 뒤로 닿아 왔다. 내 신발을 벗기고 이불까지 꼭 덮어준 디디는 작게 웃었다. 그 가 덮었던 이불에서 옅은 바닐라 향기가 났다.
손가락을 뻗어 내 귀를 가린 머리 카락을 넘겨준 그가, 내 귓가에 느 리게 속삭였다.
"우린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슈슈."
쪽.
이마를 덮은 가면 위로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떨어진다.
' 미친.'
스킨십엔 딱히 감흥이 없는 편이
었음에도, 디디의 나긋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입맞춤은 날 경악하게 만 들기 충분했다.
"도련님......!"
"조용히."
봄바람처럼 나긋하게 속삭이던 방 금 전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 남자 와 나를 대하는 온도차가 봄과 겨 울 차이인지라 혼란스럽기까지 했 다.
"이제 가지."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경쾌하다.
얼어붙은 나와 남자를 뒤로하고 오 두막의 문을 연 디디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안녕, 슈슈."
'보고 싶을 거야.'
덧붙이는 작은 목소리와 오두막을 나서는 발걸음, 황급하게 뒤따라가 는 남자, 문이 닫히는 소리.
나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디디가 사라진 뒤에도 한참 굳은 듯 멍하니 누워 있었다. 해가 얼굴 을 드러내고 나서야 느지막이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벽에 기대앉아 느리게 침대를 쓸 어 보았다. 은은한 바닐라 향기가 여전히 코를 간지럽혔다.
'그 아이에게선 레몬 향기가 났었 는데.'
얼핏 오래된 추억이 머릿속을 어 지럽힌다. 몇 년이 훌쩍 지났음에 도 생생히 남아 있는 추억.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한 그 아 이.
'그때도 비슷했었지.'
이번 일과 비슷한 일이 예전에도 한 번 있었다.
'왜 날 살려준 거지? 원하는 게 뭐야.'
폭우가 쏟아져 내리던 한여름 밤 이었다. 중상을 입고 쓰러진 아이 를 발견한 나는, 그 아이를 이 오 두막으로 데려와 치료했었다.
'이유 없는 호의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거짓말 하지 마!,
디디가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세 상살이 찌든 어른이라면, 그 아이 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괴롭힘당하 고 상처받아 사람을 경계하는 길고 양이 같았다.
'슈슈 누나......•'
그럼에도 사람을 한 번 더 믿어 보고 싶어 하던 그 아이는.
'잘 살고 있을까.'
어느 정도 회복된 아이가 돌연히 사라진 이후,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은혜를 갚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지만 잘 살고 있는지 얼굴 한 번은 비쳐 주길 바랐는데 말이 다.
'뭐,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힘없이 머리를 기댔다. 너무 잘 살고 있어서 찾아올 새도 없는 거 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비적비적 일어나 잠자리를 정리했 다. 침구 사이로 풍기는 디디의 옅 은 바닐라 향. 아직도 선명하게 기
억나는 아이의 씁쓸한 레몬 향.
무감한 표정으로 이불을 개고 침 대보를 평평히 하다, 어느 순간 스 며드는 감정에 헛숨을 뱉었다.
'너무 무뎌졌구나.'
스스로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헛 웃음을 지으며 털썩 앉았다.
이래서 인간의 온기가 위험했다.
거대한 나무 그림자에 뒤덮여 아 침임에도 어두컴컴한 오두막 내부. 창문 새로 간신히 내리쬐는 한 줄
기 햇빛.
희미한 햇빛이 있어 더 외로워 보 이는 이곳은, 완벽한 정적이었다.
그림자에 파묻혀 스르르 눈을 감 았다. 혼자 붕 떠 있는 느낌. 우주 공간에 혼자만 남은 정적.
이 감정의 정체는 통상적으로 외 로움이라 정의되었다.
'참 이상하지.'
늘 혼자 있던 곳이었는데. 어쩌자 고 쓸쓸하다 느껴 버린 건지.
"슈슈 언니!"
능숙한 손길로 잠금을 풀고 문을 열자 작은 인영이 빠르게 뛰어와 사뿐히 품에 안겼다. 푸스스 웃으 며 마주 안았다. 헬레네에서 포장 해온 음식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 아리아."
휙 고개를 든 아리아가 내 허리를 잡고 늘어졌다.
"어젯밤엔 왜 안 돌아왔어? 진짜 걱정했단 말이야!"
잔뜩 울상을 지은 모습이 안쓰러 웠다. 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미안. 어젯밤에 조금 급한 일이 있었거든. 저녁은 잘 챙겨 먹었어? 못 차려 줘서 미안해."
"지금 내 밥이 중요해?"
순하던 눈매를 날카롭게 세운 아 리아가 앙칼진 표정을 지었다. 아 리아의 눈치를 보면서도 고개를 끄 덕였다.
"밥 잘 챙겨 먹어야지. 집에 먹을 게 별로 없었잖아."
"그럼 언니는? 언니는 저녁 먹었 어?"
눈을 부라리는 아리아 앞에서 입 을 꾹 다물며 어색하게 머리를 긁 적였다. 디디를 치료하느라 바빠 저녁을 걸렀기에 할 말이 없었다.
"슈슈 언니는 늘 이래. 항상 나를 걱정하면서 스스로는 돌보질 않잖 아. 항상 날 사랑한다고, 나밖에 없 다고 하면서 내게 숨기는 게 너무 많다고."
울컥한 아리아가 투덜거렸다. 원 망과 분노보단 체념에 가까운 어조 여서 더 가슴이 아팠다.
■아리아에겐 미안하지만.,
아리아에게 모든 것을 알려줄 순 없다. 내 비밀 때문에 아리아가 상 처받고 고뇌하는 걸 앎에도, 알려 줄 수 없었다.
■그건...... 진짜 못 말하겠다.,
나를 걱정하는 아리아에게 마수들 에게 짓밟히고 곤죽이 되며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알아.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거. 언니가 이유 없이 내게 무언가 를 숨기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고, 지금 되게 애 같은 투정 부리고 있 는 거 알고 있어. 그래도 언니가 걱정된단 말이야......•"
작은 중얼거림에 가슴이 미어졌 다.
아리아가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입술을 꾹 깨물다 아리아의 머리 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언니! 제발 정신 차려! 슈슈 언 니 제발 '
검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가 어렴풋이 생각난다. 처음으로 마수 토벌 원정을 나갔다가 곤죽이 되어 돌아온 날. 아리아는 집 앞에 서 쓰러지는 나를 발견했었다.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 알았어. 더는 안 물어봐.'
이후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다 겨
우 깨어난 내게 아리아는 다친 이 유를 물었지만, 내가 대답하지 못 하자 급히 입을 다물었다. 너무 빨 리 어른스러워진 아이였다.
"말해 주지 못하는 게 너무 많아 서 미안해."
너를 위해서 숨기는 거라고 말하 고 싶었지만, 이젠 그것조차 잘 모 르겠다. 무조건 숨기는 것만이 너 를 위한 것일까. 네가 이렇게 아파 하는데.
나는, 알 수 없었음에.
"오늘 언니 아무 데도 안 나가. 같이 시내 나가서 놀까?"
할 수 있는 거라곤 말을 돌리는 게 고작이었다. 내 품에 아리아가 움찔했다. 조금 붉어진 눈가를 벅 벅 닦은 아리아는 한없이 밝게 웃 었다. 나를 안심시키듯.
"응. 같이 놀러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