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화
마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시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혹여나 아리아와 떨어질까 염려하 며 아리아의 손을 꽉 잡았다.
"다가오는 사람들이 마수야?"
부딪치기라도 할까 봐 아리아의 주위를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으니, 아리아가 짓궂게 웃으며 면박을 주 었다. 마주 웃으며 장난스럽게 호 위무사 같은 자세를 취해 보였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폐하. 여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깔깔 웃으며 유치하다고 놀리는 아리아. 함께 웃으면서도 가슴 한 편이 아려왔다.
오랜만에 같이 나온 것이 좋은지 은은하게 달아오른 양 뺨과 내려갈 줄 모르는 입꼬리.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자주 데리고 나오는 건데.'
후회는 늘 늦는 법이다. 입술을
살짝 깨물곤 아리아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 금전적인 지원만이 전부가 될 수 없다. 아리 아를 위해 돈을 번다고는 말하지 만, 내가 나간 뒤 혼자 집에 남아 기다려야 하는 아리아가 얼마나 외 로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이 항상 죄업처럼 나를 괴롭혔다.
함께해 줘야 하는데. 외롭지 않게 해 줘야 하는데. 늘 바쁘다는 이유 로 눈 돌려야 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여전히 좋은 언니가 아니었
다.
"응? 왜 그래?"
길을 가다 멈추고 아리아의 목을 감싸 안으니 아리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먹먹해지는 기분 을 차근히 정리하며 작게 속삭였 다.
"언니가 꼭 행복하게 해 줄게."
고지가 멀지 않았다. 아리아와 프 레이야 백작의 만남이 성공적으로 성사되기만 하면 아리아는 행복해 질 것이다. 소설에서 그러했으니까.
'나는 네가••...
제국에 손꼽히는 부자인 백작의 양딸이 되었으면 좋겠어. 내가 주 지 못했던 좋은 환경과 좋은 식사 를 제공받고, 모든 이들에게 사랑 받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항상 널 속상하게만 하는 나를 잊고 행 복했으면 좋겠어.
"으응, 하지만 난 지금도 행복한 걸."
화사하게 웃으며 마주 안아오는 아리아를 보며 눈을 감았다.
그럴 리 없다. 혼자 집에만 머물 며 비밀 많은 음침한 언니를 기다 리고 있어야 하는 삶이 행복할 리 없다.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꿈꾸는 네 완벽한 행복에 나 는 없다. 나는 너처럼 완벽하지 않 으니까. 널 보낸 내가 최악의 최악 까지 떨어져 절망할지라도,
'너만은 행복하기를.'
모았던 손을 푼 아이가 신에게 비 는 마지막 소원이었다.
"나 정말 더 돌아다닐 수 있는 데......
"알아. 언니가 힘들어서 들어온 거야."
나와 창밖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리아에게 밝게 웃어주 었다.
몸이 좋지 않은 아리아는 장시간 활동이 불가능하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이 가팔라진 아리아와 시내 한복판에 찻집으로 들어온 참 이었다.
아리아를 이끌어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느지막한 오후여서인지 내부는 한적했다.
"뭐 마실래? 주문해 올게."
내 물음에 드레스 자락을 대강 정 리한 아리아가 메뉴판을 읽기 시작 했다. 아리아는 유행이 훌쩍 지난 프릴 드레스를 입고 있음에도 봄의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더 좋은 드레스를 사 주고 싶은 데.'
불쑥 고개를 드는 미안함에 입술 을 꾹 깨물었다.
현재 아리아가 입고 있는, 내가 아리아의 12번째 생일 선물로 선물 한 하늘색 프릴 드레스는 싸구려에 불과했다.
3년 전, 20일 동안의 마수 토벌 여정을 마쳤던 날. 좋은 선물을 사 주고 싶어 부러 무리한 일정을 소 화했던 그날.
그날은 하필 아리아의 생일이었 다.
'자정이 지나기 전에 선물을 챙겨 주고 싶었지.,
보통 속도로 갔다간 자정을 넘어 설 게 뻔했다. 이른 저녁에 여정을 끝마친 나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10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5시간 만 에 주파했다.
바람으로 산발이 된 머리. 후들거 려 걷기도 힘든 다리. 덜덜 떨리는 손
필사적으로 달렸음에도 시간은 늦 어 있었다. 나는 아리아의 생일 선 물을 사기 위해 이미 닫힌 옷가게
의 문을 두드리며 제발 나와 달라 진상을 부려야 했다.
열린 문 너머 잠옷 바람인 파울 아저씨에게 사람 여럿 죽인 꼴을 하고 드레스를 팔아 달라 간청했었 다.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던 파울 아저씨는, 내 처절한 애원에 별 질문 없이 드레스를 넘겨주었 다.
'옷가게 파울 아저씨와 아는 사이 였기에 다행이었지.'
20일간 마수에게 짓밟히며 번 돈 을 지불해 구매한 드레스를 조심스
레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때를 기 억한다.
고깃덩어리와 진배없는 상처투성 이 몸이 부끄러웠다. 흘린 피에 나 뒹굴며 일해도 줄 수 있는 선물이 드레스 한 벌뿐이라는 게 비참했 고, 생일 내내 함께해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슈슈 언니?'
그 순간을 기억한다. 식어 버린 밥상 앞에 홀로 앉아 있던 아리아 를. 속상한 낯을 하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애써 웃음 짓던 아리아를.
날 발견하자마자, 세상을 잃은 낯 으로 무너져 내리던 아리아를.
빛을 잃은 하늘색 눈동자 앞에서 차마 변명할 수 없었다. 피 묻은 손으로 잡지도 못한 선물상자를 조 심스레 내려놓으며, 버석거리는 입 을 열었다.
'......이런 것밖에 줄 수 없는 내 동생으로 태어나 줘서 고마워.'
그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들거리는 입꼬리를 자연스럽게 끌어 올렸던
가? 아니면 소리 없이 울었던가? 무표정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굳은 듯 멍하던 아리아는 대답 없 이 떨리는 손을 상자로 옮겼다.
열린 상자 앞에서, 아리아는 와르 르 무너졌다.
'......누가 이런 거 사 달라고 했 어?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선물 이고 건강한 몸이고 다 필요 없단 말이야! 언니는 왜 이렇게 나를 나 쁜 사람으로 만들어? 왜 이렇게 나 를 비참하게 해? 그래, 아주 가끔 은 예쁜 드레스를 입고 춤추는 걸
꿈꿨어. 건강한 몸으로 다른 사람 들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꿈 꾸기도 했어! 하지만 그 꿈을 언니 의 희생으로 이루고 싶지 않았어! 이런 거 바라지 않았다고! 왜 언니 가 나 때문에 아픈 건데......!'
아리아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내게 던졌다. 피부를 때리는 물건 들은 아프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날아오는 물건들을 묵묵히 맞다가 울분에 못 이겨 주저앉는 아리아를 안아들었다.
'내가 바라서 그래, 아리아. 내가 선택한 길이야.'
그러니 넌 마음껏 날 이용해. 한 줌의 뼈까지 너를 위해 사용할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늘 동일하 고, 지금까지 불변했다.
그날 아리아는 탈진 직전까지 울 었다. 어른스러운 아리아는 어째서 이런 꼴로 돌아왔는지, 부족한 우 리 사정에 어떻게 드레스를 샀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드레스를 소중히 옷장에 걸고, 가
끔 알 수 없는 복잡한 눈으로 드레 스를 들여다봤을 뿐.
'아리아가 프레이야 백작가에 가 기 전에...... 더 좋은 옷을 사 줄 까.'
오래되어 빛이 바랜 드레스를 보 며 생각했다. 물론 아리아는 프레 이야 백작가에서 더 좋은 옷을 입 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사 주고 싶었다. 마지막 선물로. 여유로워진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는 수익 90%가 요정 숲의
약수 값으로 나갔지만.'
이젠 아리아를 완치하는 방법을 알았으니, 요정 숲의 약수로 돈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더 좋은 것을, 사 줄 수 있었다.
'이번엔 가장 비싼 드레스를 사 줘야지.'
햇빛을 받으며 한 폭의 그림처럼 메뉴판을 읽고 있는 아리아를 보며 작게 웃었다.
"골랐어?"
내 물음에 아리아가 망설이는 기 색을 보였다. 잠시 우물거리던 아 리아는 옅게 웃으며 메뉴판을 접었 다.
"으응. 나는 커피."
'......너무 빨리 자랐구나.'
나는 아리아를 잘 알았다.
"......금방 주문하고 올게."
씁쓸하게 웃곤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앞에 섰다.
"커피 한 잔, 그리고 딸기 파르페 하나 주세요."
난 커피 이외의 음료를 즐기지 않 고, 아리아는 딸기를 좋아했다.
메뉴판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가 장 저렴한 커피와 값이 두 배 가량 차이 나는 딸기 파르페.
'나 때문이야.'
어린애는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데. 어린애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 는데. 삶이 너무 궁핍했던 탓에, 아 리아까지 돈을 걱정하게 만들어 버
렸다.
착잡한 마음을 갈무리하기 위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북적거리는 거리. 빠르게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평화로운 거리의 정경이었다.
맞은편 골목길에서 귀족 여성을 끌고 가려 하는 미친 새끼만 빼면 말이다.
' 어?'
이질적인 광경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 나가는 생각은 하나.
■요즘 내 앞에서 위험에 처하는 게 제국 유행인가?,
확실히 단언할 수 있었다. 나는, 선하지 않았다.
내가 꿈꾸는 것은 아리아의 행복 뿐이었다.
그뿐인 사람이었다, 나는. 내 주 위의 평화와 안녕만을 바라는 지독
히 이기적인 인간상. 용병 미르는 영웅이라 불렸으나, 아무리 생각해 도 영웅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 아리아."
"응? 벌써 나왔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아리아의 머리를 푹 눌렀다. 버둥거리는 아 리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언니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메 뉴 나오면 먼저 먹고 있어. 금방 돌아올게."
혼란스러워 보이는 아리아에게 방 긋 웃어 주고 몸을 돌렸다.
"슈슈 언니!"
작은 손이 팔을 붙잡는다. 마음만 먹는다면 단박에 부러트릴 수도 있 는 작은 손이었으나, 나는 종소리 만 들어도 침을 흘리는 개처럼 반 사적으로 몸을 돌려 상대에게 집중 했다.
"응. 듣고 있어."
몸을 숙여 얼굴을 가까이하자 아
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언 가 고민하는 기색. 창밖을 살피면 서도 아리아의 대답을 기다려 주 자, 마침내 아리아의 입이 열렸다.
"금방...... 올 거지? 다치지 않을 거지?"
주저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 무얼 하러 가냐고 묻고 싶었던 것이 분 명함에도, 결국 내가 곤란하지 않 을 질문만 던지는 아리아를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언젠가, 네게 모든 것을 말할 날 이 오겠지.'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날을 상상하 며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 다.
"......응. 커피가 식기 전에 올게. 다치지 않아."
꾸물꾸물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아 에게 방긋 웃어 주고 빠른 걸음으 로 가게에서 나왔다.
아리아가 볼 수 있는 거리에선 정 상적인 속도로 걷다, 귀족 여성과 남자가 들어간 골목길로 발을 들인 순간 마나를 방출하며 속도를 높였
다. 검은 망토가 거칠게 휘날렸다.
'이쪽으로 가면 바로 막다른 골목 이니까.'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기 직전 발을 멈추고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뒤적여 늘 소지하고 다니는 변장 도구를 꺼내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망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검은 가면을 착용했다. 목소리를 변조하는 반지를 착용하는 것도 잊 지 않았다.
어째서 계속 위기에 처한 사람들 을 구하느냐 묻는다면, 내 대답은 늘 동일했다.
이기적인 나는 위험에 처한 이를 내버려 뒀다는 죄책감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놓으라 하지 않았나! 감히! 감히 더러운 평민 따위가! 내가 누구인 지 알고!"
"크학! 네년이, 히끅! 누군지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여기서 죽을 텐 데!"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귓가를 가 득 메웠다.
'......저들 말고도 날 지켜보는 이 가 하나 있긴 한데. 괜찮겠지.'
골목 벽 너머에서 느껴지는 실력 자의 기운에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 면서도 상황을 살폈다.
휘황찬란한 드레스 차림의 여자는 남자에게 손목이 붙잡힌 채 새파랗 게 질려 있었고, 눈동자가 맛이 간 남자에게선 지독한 술 냄새가 났 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술 처마시고 정신 못 차리는 새 끼들은 어느 곳에나 있는 건가.'
더럽다 못해 경멸스러워 인상을 가득 구겼다. 검으로 아예 목을 댕 강해 버릴까 하다, 남자가 검을 잡 은 적 없는 일반인이라는 것을 느 끼고 심호흡을 했다.
'죽이지만...... 말자.'
자꾸 검으로 향하려는 손을 저지 하며 죽기 직전까지 패기 좋은 물 건을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였
다. 손에 잡힌 무언가를 휙 꺼냈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단단하며, 적당히 길쭉한 것.
'......또 이건가.'
쇠파이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