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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9화 (9/254)

9 화

쇠파이프를 휘두르던 어젯밤을 떠 올렸다.

'이러다 수도에 쇠파이프로 사람 패고 다니는 양아치가 있다고 소문 나는 거 아닌가.'

나는 작게 혀를 차곤 쇠파이프를 붕붕 휘둘러 보았다.

'어쨌든 검보단 나으니까.'

힘을 조금이라도 줬다간 즉사겠지 만, 조절만 잘 하면 죽진 않을 것 같았다.

"놔, 놔라! 뭘 원하는 건가! 돈을 원하나? 얼마든지 줄 테니 놓으란 말이다!"

"너희 귀족들은...... 히끅! 뭐든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 지. 끄윽, 안타깝지만 이번엔 돈으 로도 해결 못 할 거다. 크학!"

저열하게 웃으며 여자의 몸에 손 을 가져가는 남자. 파들파들 떨기 시작한 여자는 굳은 듯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쾅!

그런 남자의 발 앞에, 검은 오러 로 휩싸여 악령이 들린 것 같은 쇠 파이프를 내리꽂았다.

"히 익!"

기겁한 남자가 여자에게서 손을 떼고 뒷걸음질 쳤다. 당당하게 여 자에게 손을 댈 땐 언제고 바짝 겁 먹은 모습이 쥐새끼 같아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역겨워.'

쓰레기는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 이 치우는 것이 맞다. 깔끔하게 조 질 생각을 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누, 누구냐!"

놀란 남자가 내게 소리쳤다. 남자 를 무시한 채, 흉흉한 파이프에 덩 달아 놀란 여자에게 조심스레 다가 갔다.

"괜찮으십니까?"

마도구로 인해 괴이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골목을 메웠다. 여자는

흠칫하면서도 간신히 고개를 끄덕 였다.

"옷에 흙이 묻었군요."

여자를 진정시키려 부러 다정하게 드레스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 긴장을 풀어 주려 했던 것이었건 만, 여자는 어쩐지 더 굳은 기색이 었다.

'......이런 건 잘 못 하니까.'

어려서부터 마수를 잡으러 다니기 만 해서 사람과의 관계는 늘 어색 했다. 끄트머리만 남기고 땅에 깊

숙이 박힌 쇠파이프를 거칠게 뽑아 냈다.

"누구, 끅, 십니까! 히끅! 왜, 왜 이러는 겁니까!"

금세 존댓말로 바뀐 말투와 정처 없이 혼들리는 눈동자, 비굴한 표 정.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성향이 확연히 보여 더욱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걸 몰라서 묻나, 발정 난 개자 식아."

스산한 목소리로 읊조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몸을 사 시나무처럼 떨며 뒷걸음질 쳤으나, 그의 뒤는 막다른 벽이었다. 그가 새하얗게 질렸다.

"옷, 옷차림을 보니, 끄윽, 당신도 평민 아닙니까?"

궁지에 몰린 남자가 외쳤다.

"당신도 평민이면, 끄윽, 알지 않 습니까! 귀족 놈들이, 히끅! 우리 평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인간을 개돼지 취급한다고요! 저 여자도,

윽, 지나가다 날 보면서 더럽다고 했습니다!"

그가 여자를 삿대질했다. 여자가 크게 몸을 떨었다.

확실히, 이 제국은 신분제가 빌어 먹도록 또렷하다. 없는 평민들은 항상 없이 살고, 있는 귀족들은 늘 부유하게 살았다. 평민들은 귀족들 에게 함부로 말조차 걸어선 안 됐 고. 귀족들은 평민들을 노예 취급 했다.

더럽게 불공평한 세상이었다.

고개를 돌려 여자를 돌아보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여자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새파랗게 질려 고개 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더럽다고 하긴 했 지만......! 그건 저놈이 술 취해시 걸어가다 내 어깨를 쳐서......!"

"부딪쳤다고 해서 더럽다고 해도 되는 겁니까?"

'좀 너무하지 않나.'

내 반문에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무 는 여자.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 렸다. 푹 숙였던 고개를 치켜든 여

자가 표독스럽게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 나를 해칠 작정인가요?"

눈동자는 두려움을 가득 담고 있 음에도 말투엔 자존심이 뻣뻣이 세 워져 있었다.

'내가 태세를 전환해 자신을 해칠 까 두려워하면서도......

자존심은 버리지 못한다. 그녀는 완벽한 귀족이었다.

"저거 보세요! 끅! 사과할 생각도

없잖습니까!"

남자가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소 리쳤다. 힐끔 그에게로 시선을 돌 리니, 그가 신나게 떠들었다.

"귀족 놈들은 다 빌어 처먹을 놈 들입니다! 히끅! 우리가 자기들 발 핥는 개들인 줄 알죠! 평민으로 살 아왔다면, 끄윽, 아시잖습니까!"

광기에 가까운 분노 찬 말투. 그 가 평민으로서 당하고 살았다는 것 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그의 말을 듣

고 있으니, 그는 결국 해선 안 되 는 말까지 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내겐 귀족을 해할 자격 이 있습니다! 히끅! 저런 주제 모르 는 귀족 년들은, 끅, 험한 짓 좀 당 해도 된다고요!"

파이프가 남자의 얼굴 바로 옆에 박혔다. 화들짝 놀란 남자가 비명 조차 지르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았 다.

"읏기는 소리를 하는군."

개소리를 들은 귀를 닦아내고 싶 었다. 비소를 흘리며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형편없이 땅에 널브러진 남자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 다.

"왜, 왜!"

"네가 얼마나 귀족들에게 당해 왔 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지 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드득, 벽에 단단히 박힌 쇠파이프 를 단숨에 뽑았다. 남자의 눈에서 일렁이는 두려움. 발산되는 살기로 인해 몸이 굳어 얼굴조차 들지 못

하는 남자의 턱을 쇠파이프로 들어 올렸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나 또한 귀족들의 횡포엔 익숙했 다. 여정을 떠난 와중 귀족의 의뢰 가 들어와 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했던 적도 있었고, 날 동경한다며 자신의 잠자리로 들어오라고 강압 하던 귀족을 만난 적도 있었다.

귀족을 좋다, 싫다 중 양자택일로 고르라 한다면 난 분명 '싫다'를 고 를 것이다. 모든 귀족이 나쁘지 않 다 한들, 내가 만나 온 것은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이었기 때문에. 귀족이란 부류들에게선 정을 뗀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어떤 피해도, 또 다른 가해의 정당성이 될 수 없다는 것뿐이지."

그 무엇도, 가해의 정당성이 될 수 없다.

죄는 죄일 뿐이었다.

"하지만 가해자는 좀 고통스러워 야지."

주위를 에워싸고 뱀처럼 꿈틀거리 던 검은 오러가 사나운 기세로 남 자의 몸속에 들어갔다.

"끄아아아악!"

뭣도 모르고 오러를 삼킨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귀 따가운 비명이 듣기 싫어 오러로 그의 입을 속박 하고 온몸을 칭칭 묶었다. 옴짝달 싹 못 하는 그가 의미 없는 발버둥 을 쳤다.

자연 그 자체인 오러는 살기를 담 아 휘두를 땐 최고의 살상 무기가

되지만, 소드 마스터의 조정 아래 몸에 들어갔을 때는 독이 되지 않 았다.

'그저, 온몸에서 요동치며 지옥을 맛보게 할 뿐이지.'

충분한 훈련과 노력으로 다져지지 않은 신체에 오러가 들어갔을 땐 최악의 고통을 자아냈다. 과유불급 의 현상이었다.

•원래는 파이프로 조금 때려주기 만 하려고 했지만 불쾌해졌으니까.,

이게 내가 가해자에게 가하는 응

징이 었다.

휙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지켜보 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제가 마무리할 테니 이만 가 보 시죠."

귀족에게 사용하기엔 상당히 시건 방진 말투였지만, 도와준 것이 있 으니 정상참작이 되리라 생각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어쩐지 몽롱한 눈으로 날 뚫어져 라 응시한 여자가 뺨을 발그레하게

붉힌 채 입을 열었다.

"그대, 이름이 뭔가요?"

'가라니까 왜 이래?'

미간을 좁힌 채 의중을 묻는 눈빛 을 보내니 여자가 황급히 덧붙였 다.

"보상! 날 도와준 것에 대해 보상 을 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다급하게 덧붙이는 모습이 어쩐지 급조한 변명 같았다. 의아해하면서 도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보상을 바라고 한 것 이 아닙니다."

단호한 거절에 여자가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무섭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다가온 여자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 그럼 나랑 식사라도 할래요? 정말 고마워서 그래요."

"아쉽지만 선약이 있습니다."

'아리아가 기다리니까.'

여자는 날 붙잡고 싶은 것 같았지

만, 지금 내 머릿속엔 빨리 아리아 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 다.

'그런데......

잠시 날 붙잡은 손을 응시했다. 그녀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 다.

'안색도 너무 창백하고. 동공도 확장됐고.'

그러니까 이건 마치, 기절하기 전 초 증상 같았다.

'평생 귀족으로 살아온 사람이 겪 기엔 너무 거친 고초였지.'

여자는 아슬아슬하게 정신을 붙잡 고 있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기절할 것 같았다.

u~l -? 러 ...... "

-, -- O

쓰러진 사람을 바닥에 두고 갈 정 도로 모진 인간은 아니다. 여자를 정찰대에게 데려다주는 애프터서비 스는 해 줄 의향이 있었다.

쓰러질 낌새를 보이며 비틀거리는 여자를 잡아줄 생각으로 팔을 뻗을

때.

"내 이름은 르웰린 데카르도예 요."

멈칫.

"보상을 받을 마음이 생기면 데카 르도 후작가로......

털썩.

여자가 맥없이 쓰러졌다.

한참 굳어 있던 나는, 그제야 여 자의 외형을 또렷이 직시했다.

'찬란하게 굽이치는 장밋빛 머리 카락. 푸르른 여름날 나뭇잎처럼 선명한 녹빛 눈동자. 앙칼진 고양 이를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눈매. 누구든 보자마자 입을 맞추고 싶게 하는 사랑스러운 입술.'

클리셰스러운 악녀의 이미지를 그 대로 담은 외형.

'사교계의 황제, 르웰린 데카르 도.'

지금 쓰러진 그녀는, 소설 '요정 의 밤'의 메인 악녀, 르웰린 데카르

도였다.

'설마 그럼 지금까지 느껴지던 인 기척이......

온몸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 오랫동안 느끼지 못하던 섬뜩함이 몸을 지배했다.

명색이 소드 마스터인 내가 이 골 목에 타인이 존재함을 느끼지 못했 을 리 없다. 이곳에 발을 들인 순 간부터 강한 기운을 지닌 누군가가 이곳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 다.

그럼에도 내버려뒀던 것은, 그가 나보다 약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 에. 가면을 쓰고 이곳에 들어서기 전엔 타인의 시선이 나를 향한 적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맨얼굴을 들키지 않는 이상 누군 가 이 상황을 봐도 딱히 상관없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구한 것이 르웰 린이고, 이 상황을 본 것이 '그' 사 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져도 너무 달 라졌다.

'요정의 밤'의 메인 악녀, 르웰린

데카르도. 통칭 '돈을 먹는 장미'라 불리는 부의 정점, 데카르도 후작 가의 막내딸.

르웰린은 아리아가 등장하기 전까 지 사교계의 황제 자리를 지키며, 남주인공 중 하나인 '라이너 아인 하르트'를 짝사랑하는 역할이었다.

'짝사랑 상대인 라이너가 아리아 를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며 삐뚤 어진 사람이었지.'

전형적인 양산형 악녀였다. 착잡 한 시선으로 쓰러진 르웰린을 내려 다보았다.

'미래의 르웰린이 아리아를 괴롭 히는 건 상관없어. 내가 막을 수 있으니까.'

이미 아리아를 위해 살기로 마음 먹은 몸. 미래의 르웰린이 할 짓은 걱정되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지금 르웰린을 구해 버렸다는 것.'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식은땀이 흘렀다.

원작엔 르웰린이 라이너에게 반하

게 된 계기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 었다. 라이너가 정의감 넘치는 남 주라는 것을 어필하고자 했을 것이 다.

'원작에 쓰인 바, 르웰린이 라이 너에게 반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험한 꼴을 당할 뻔한 르웰린을 라이너가 구해 주면서였 다.

바로 지금, 르웰린이 라이너에게 반했어야 했다는 뜻이다.

"그대를 아주 감명 깊게 봤습니 다."

나 때문에 원작이 엉켰다.

벽 위에서 뛰어내린 누군가가 등 뒤로 착지했다. 확연히 느껴지는 존재감에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내게로 향하는 들뜬 발걸음 소리 에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침 을 꿀꺽 삼켰다. 이대로 증발하고 싶었다.

라이너 카르텔 르 노아 아인하르 트. 소드 마스터를 앞둔 실력자이 자, 아인하르트 후작가의 차기 후 작이며, 황궁 제2 기사단의 기사단 장인 동시에,

"그대, 소드 마스터더군요."

미쳐 버린 검 덕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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