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화
'저자는 소드 익스퍼트를 앞둔 검 사군요.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는 보통 오러를 꺼낼 수 있을 때를 기 준으로 하며......
'오러는 대자연이 인간에게 선물 하는 힘, 마나를 기반으로 합니다. 마나는 자연 그 자체이기에 사실상 인간에게 해를 가하는 형질은 아닙 니다. 하지만 실력자 경지에 오른 이들은 이 오러에 살기를 담기 때 문에 최강의 학살 무기로......
'좋은 검을 고르는 기준으론 철의
종류, 원산지, 대장장이의 실력, 담 금질 횟수, 마력 유무 등이 있으며, 보통 좋은 강철을 유통하는 지역 O '
그는 좋게 말하면 직업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검에 미친 놈이었다.
평소엔 과묵한 기사단장 포지션을 유지하다가 검에 관한 언쟁거리가 생기면 설명 기계로 변하는 사람. 그 태세 변환이 웃기고 귀여워 '요 정의 밤'에서 인기가 많던 남주인 공 후보였다.
나도 책을 읽을 땐 그런 모습이 귀여워 라이너에게 호감 표를 주었 건만.
'그런 놈을 소드 마스터로서 만나 게 되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화를 나 눌 수 있겠습니까?"
문제가 심각해진다.
탁
그의 발걸음이 등 바로 뒤에서 멈 췄다. 광기까지 담긴 듯한 목소리
에 쉬이 몸을 돌릴 수 없었다.
검에 미친 놈인 라이너 아인하르 트는 자신보다 경지가 높은 이를 만나면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그 것이 문제였다.
'••...괜찮아.'
여차하면 치고 튀면 된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가 완연한 소드 마스터로 각성 하는 후반부라면 몰라도, 소드 익 스퍼트 경지에 머무는 지금이라면 확실히 내가 제압할 수 있었다.
여러 번의 심호흡 끝에 몸을 돌렸 다.
"무슨 일입니까."
가까이 다가와 있던 라이너와 정 면으로 마주했다. 그와 내 거리는 한 뼘이 채 되지 않았다. 키 차이 로 시선을 가파르게 올려야 마주치 는 눈동자. 순간 숨을 멈췄다.
'한밤중을 비추는 은빛 달처럼 찬 란한 은회색 머리칼. 먹이사슬 최 상위 맹수의 것처럼 나른하게 번득 이는 금빛 눈동자. 맹수처럼 치솟
은 눈매와 강직하면서도 권태로운 인상. 무심한 눈빛.'
라이너는 남주인공답게 빌어먹도 록 잘생긴 얼굴의 소유자였다.
'저 정도면 디디랑 맞먹는데.'
아직도 확연히 기억나는 디디의 잘난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 다. 갑자기 극한의 아름다움과 마 주한 눈이 잠시 초점을 잡지 못했 다.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그대의 오 러를 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검에 대한 이야기 부터 꺼낸 라이너가 눈을 빛냈다. 맹수의 그것과 닮은 금안이 광기에 가까운 흥분을 담아 번득였다.
'이 자식 키워드가 집착남이었던 가.'
분명 만사에 무심하지만 내 여자 에게만은 다정한 포지션이었던 걸 로 기억하건만. 그의 눈은 맛이 간 상태였다.
"그런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억눌렀다. 라이너의 눈동자가 번득 였다.
열렸다 다물어지기를 반복하더니, 어느새 사르르 올라가는 입꼬리. 화사하게 피어나는 미모에 감탄하 다 사뿐히 열리는 산호색 입술에 잔뜩 긴장했다.
"혹시 그대, 용병왕 검은 재앙 미 르입니까?"
'젠장•..."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쳐 버린
검 덕후가 내 오러를 본 이상 들키 는 것은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있었 지만, 그럼에도 머리가 아파 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무려 원작의 남주인공이, 내가 누 구인지 알아버렸다.
'이게 내가 너무 유명해진 탓이겠 지.'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공식적으 로 소드 마스터라 알려진 이들에겐 오러의 색깔을 본딴 이명이 붙었 다. 카이사르 크리시스의 경우는 '붉은 검귀'였고, 용병 미르의 경우
는 '검은 재앙'이었다.
검은 재앙 미르가 되어 이렇게까 지 유명해진 것은 절대 내 의도가 아니었다.
'죽어라 일하다 보니 소드 마스터 가 되어 버린 걸 어떡해!'
처음 얼굴을 감추고 '미르'라는 가명을 쓴 건 어린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였다.
'대강 위장을 하면 남자 청년으로 알아서들 오해하곤 했으니까.'
키가 너무 작은 게 문제이긴 했지 만, 그걸 걸고넘어지는 이들의 무 릎을 꿇려 날 올려다 보게 만들다 보니 논란은 금세 잠잠해졌다.
돈을 위해 용병 미르로 일하며 미 친 듯이 마수를 도륙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는 새 유명해졌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미르 님이 오지 않으셨다면 저희 마을은 마수 떼로 폐허가 됐을 겁 니다. 준비한 사례가 얼마 되지 않 음에도 와 주셔서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른 용병들은 사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오지 않아 서 ...
'미르 님! 저희 마을을 구해 주셔 서 감사해요! 저는 커서 꼭 미르 님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저희 마을은 늘 미르 님을 환영 합니다. 혹여나 도움이 필요한 일 이 생기신다면 망설이지 말고 우리 마을을 찾아 주세요! 마을의 보물 을 팔아서라도 도와 드리겠습니다!'
소드 마스터 경지에 올랐다는 이 유로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 단 보통 용병들이 보수가 적다는 이유로 가지 않는 마을들의 마수 토벌을 도우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
다.
'......내버려둘 수 없었으니까.'
내가 직접 느끼지 못하는 불특정 다수의 불행과 가난, 세계 평화 같 은 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 했다. 허나 용병으로 일하며 가난 한 마을들이 마수의 침범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들은 직접 눈으로 봐 야 했다.
'아악! 살려 주세요!'
'으앙! 엄마! 아빠! 일어나요!'
'미르 님! 제발, 제발 도와주십시 오.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마
을은 전멸 당할 겁니다!'
마수에게 부모를 잃고 눈물을 터 트리는 아이들과, 내게 도움을 애 원하는 사람들.
직접 본 이상 지나칠 수 없었다. 돕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약하다면 나약한 내 천성이었다.
'그렇다고 돈을 아예 벌지 않을 순 없으니까.'
나는 영웅이 아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요정 숲의 약수를 구매 하는 일이었다.
이에 스스로 규칙을 세웠다. 돈을 벌기 위한 일을 한 번 하고 난 뒤 엔 보수가 낮더라도 위험한 마을들 을 도와주기로.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용병왕이 라고 불리기 시작하더니......
제국의 공식적인 소드 마스터 중 하나로 자리 잡으며, '검은 재앙'이 라는 이명까지 생겼다. 사람들은 나를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영웅으로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명성을 얻은 뒤로 일은 잘 들어
와서 좋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가십을 좋아하는 이들이 내 정체를 추적하기 시작했 다는 것.
'내 정체는 밝혀져도 상관없지만, 만약 내 약점으로 아리아가 잡히 면......
끔찍한 상상에 몸서리쳤다.
나쁜 짓을 하고 다니진 않았으나 소드 마스터가 된 직후 폭포수처럼 쏟아진 여러 조직의 러브콜을 모두 거절한 전적이 있었다. 소속되는
조직이 생기면 정체를 밝혀야 할뿐 더러, 소드 마스터에겐 적이 많았 으니까.
러브콜을 거침없이 거절했던 탓에 내게 원한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 은 편이었다.
'혹시 라이너도...... 내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기억하기로 아인하르트 후작가에 서 러브콜이 온 적은 없었다. 라이 너가 내게 원한을 가지진 않았을 거란 생각에 안심하다, 일순 떠오 른 기억에 흠칫했다.
'황궁 기사단에서 왔던 러브콜은 한 다섯 번 거절했는데......
라이너는 황궁 제2 기사단 기사 단장. 러브콜을 거절한 내게 악감 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원작에서 그런 캐릭터가 아 니긴 하지만
역시, 잘 모르는 사람이니 불안했 다. 조금 눈치를 보며 라이너를 올 려다보았다. 한 점의 악의도 없는 반짝이는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악의가 없는 것 같긴 한데• ...•'
"미르가 아니라고 하면 믿을 겁니 까?"
"아뇨."
곧바로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흥미로 반짝거리는 금안이 어이가 없어 한 번 더 웃었다.
"그나저나 스스로 소개조차 하지 않고 대뜸 질문이라니, 무례하십니 다."
우선 다른 건 둘째 치고 이 한 뼘
남짓한 거리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살짝 뒷걸음치며 예의를 지적하니 라이너의 어깨가 움찔했다.
작중 검에 관련된 것만 등장하면 눈이 돌아가는 미친놈으로 서술되 나, 라이너는 기본적으로 예를 중 시하는 기사였다.
"......황궁 제2 기사단의 기사단 장, 라이너 아인하르트입니다. 무례 를 용서하십시오."
익히 알고 있는 소개가 그의 입에 서 흘러나왔다. 고개를 작게 끄덕 이곤 쓰러진 르웰린과 실신한 남자
를 번갈아 가리켰다.
"기사단장님이시라면 저 두 사람 의 처우를 맡겨도 되겠군요. 기절 한 르웰린 데카르도 영애께서는 저 치에게 험한 일을 당하실 뻔했습니 다. 가해자에게 강한 처벌을, 피해 자에게 친절한 대우를 부탁드립니 다."
그들과 나를 번갈아 본 라이너가 묘한 눈을 했다. 그의 뜨거운 시선 을 비스듬히 피했다.
'웬만해선 원작이 더 엉키지 않길 바라니까.'
내 개입으로 르웰린 데카르도와 라이너 아인하르트의 첫 만남이 뒤 틀리게 됐다. 이대로 르웰린이 라 이너에게 반하지 않는다면, 원작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는 것이다.
'나를 붙잡으려 하던 르웰린이 걸 리지만.'
일어났을 때 라이너가 있다면 원 작의 억지성을 따라 라이너에게 반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나비효과라는 게 있으니까.
나비의 날갯짓은 작은 날갯짓으로 그칠 수도 있지만, 폭풍을 일으키 기도 한다.
'르웰린이 아리아를 괴롭히게 되 는 건 싫지만 그로 인해 생겨나는 에피소드까지 사라지면......
한 번 목줄을 놓친 개를 잡을 수 없듯, 미래는 내가 붙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튀게 될 것이다. 나는 그 것을 경계했다.
"이제 당신도 스스로를 소개해 주 시죠."
저 구석에 처박힌 남자를 질질 끌 고 와 쇠파이프로 툭툭 건드리기까 지 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건만, 라이너는 떠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 다.
'자식. 그냥 좀 갈 것이지.'
"슈슈입니다."
" 아니잖습니까."
요새 가명으로 밀고 있는 이름을 입에 올리니 곧바로 반박이 날아왔 다.
" 맞습니다만."
'내가 맞다고 하는데 어쩔 거야.'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무심 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는 묘한 기색을 한 라이너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당신 미르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 습니다."
'이 자식, 내가 미르인 걸 알면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내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기다리 는 아리아에게 빨리 가야 하는 지 금, 라이너는 귀찮은 방해물에 불 과했다.
"그대, 오러가 검은색이었습니 다."
라이너가 손에 쥔 쇠파이프를 가 리켰다. 쇠파이프는 오러를 감당한 대가로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오러가 검은색인 이들은 꽤 많을 텐데요."
"그들은 검은 계열일 뿐, 완벽한 검은색의 오러를 사용하는 이는 검
은 재앙 미르가 유일합니다."
라이너가 내 반박을 가볍게 맞받 아쳤다. 입을 닫았다.
'맞는 말이긴 하지.'
오러는 검사의 정체성이다. 공식 적으로 알려진 이론이 아니라서 많 은 이들이 모르지만, '요정의 밤'에 따르면 모든 검사의 오러는 미묘하 게라도 색깔이 달랐다.
'검은 계열 오러는 많아도 나처럼 새까만 오러는 없었지.'
꽤 많은 검사를 만나봤다고 자부 할 수 있지만, 단 한 번도 나만큼 어두운 오러를 본 적이 없다.
내가 한계에 부딪혀 찾아냈던 답 은 그만큼이나 어두웠으니까.
"......원하는 게 뭡니까?"
어차피 라이너는 내 정체를 확신 하고 있다. 더 끌어봤자 시간 낭비 일 뿐이었다. 반박을 포기한 채로 날카롭게 의의를 물었다. 그의 눈 동자가 전에 없이 찬란하게 반짝였 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하 고선, 히어로를 만난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는 것이 이질적이었다.
"그대가 누군지 알고 싶습니다."
'이미 알았으면서.'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 럽게 말했다.
"용병 미르입니다. 이제 속이 시 원합니까?"
"그거 말고."
라이너가 성큼 다가왔다. 흥분으
로 점철된 눈빛을 한 그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휘었다.
'아리아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웃 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냉혈한 기사라며.'
더러운 골목길을 아기 천사들이 나팔 부는 낙원으로 착각하게 만드 는 화사한 웃음에 배신감이 들 정 도였다.
캐해석에 패배를 맛보고 충격으로 굳어 있는 그때, 그의 입술이 천천 히 열렸다.
"미르의 진짜 이름을 알고 싶습니 다."
입 안 가득 꿀을 문 것 같은 달콤 한 목소리. 귓가를 간지럽히는 낮 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이 자식이 왜 이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