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아무리 라이너의 캐릭터 해석에 실패했다 한들, 소설 속에서 본 라 이너는 아리아를 제외한 타인에게 이렇게 달콤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 니었다.
'내 동생한테나 그러란 말이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느낌. 어떤 소설의 에필로그를 보지 못한 것처럼 찝찝했다.
'분명 검에 대해서나 주야장천 물 어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이너는 내 검술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를 집요하게 주시하는 단내 나는 눈빛과 사르르 올라간 입꼬리가 이를 입증했다.
그는 나 그 자체에 대해 궁금해하 는 것 같았다.
'너 나 알아?'
그래. 그의 태도는 마치 오랫동안 만나고자 했던 동경하는 위인을 눈 에 담은 사람 같았다.
"내가 누군지는 알아서 뭐 하려 합니까? 미르의 정보를 캐오라는 의뢰라도 받았습니까?"
그럴 리 없음에도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카슈미르로서의 내 정체는 아리아의 안전과도 직결되어 있었 기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잔뜩 날을 세운 채 두어 걸음 물 러서자, 웃음을 지운 그가 무뚝뚝 하게 말했다.
"......저는, 검은 재앙이 아닌 당 신이 궁금할 뿐입니다."
'너 라이너 아인하르트 아니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 라이너.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나는 미궁에 빠졌다.
'소설 속 미친 검 덕후가 소드 마 스터에게 검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용병이 아닌 내가 궁금 하다고?'
해석할 수 없는 라이너는 내 경계 심을 가증시키기 충분했다.
"검은 재앙이 아닌 나는 왜 궁금
한 거죠?"
라이너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간 다. 그의 웃음은 여전히 그림 한 폭처럼 아름다웠지만, 화사하다 못 해 화려하던 조금 전과는 달랐다.
'......왜 슬퍼 보이는 거지.'
씁쓰름함을 가득 문 듯 처연하고 씁쓸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눈매를 축 늘어트린 그가 작게 한 숨을 쉬었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죄책감을 건드렸다.
가슴 한구석을 간지럽히는 이상한 감각. 조금 전부터 내 직감을 건드 리던 무언가.
' 기시감.'
왜?
내가 라이너에게 기시감을 느낄 일이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눈앞 의 라이너도, 그 앞에 선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의 단정한 산호색 입술이 다시 금 열리며 내 사고를 마비시켰다.
"......네가 말해 주겠다고 했잖아, 카슈미르."
쾅!
굉음과 함께 라이너의 등이 골목 벽에 부딪쳤다. 라이너가 놀란 눈 을 깜박이는 사이, 초월적인 속도 로 발도한 검이 그의 하얀 목에 닿 았다.
옅게 베인 그의 피부가 붉은 피를 흘렸다. 천천히 그의 얼굴 옆 벽을 짚었다. 머릿속이 미친 듯이 울렸 다.
"너 뭐야, 새끼야."
라이너 아인하르트가 내 정체를 알고 있다.
누군가, 용병 미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묻잖아. 너 뭐냐고."
살의를 감추지 않은 거친 말투가 목을 울렸다.
흉흉한 살기가 온 골목을 메운다.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살기
가 당장이라도 라이너를 덮칠 듯 난폭하게 넘실거렸다.
검에 가로막혀 꼼짝달싹 못 하는 라이너의 몸이 덜덜 떨려온다. 소 드 마스터가 작정하고 푼 살기를 맨몸으로 받아내는 것에 대한 생리 적 현상이었다.
모든 감정을 지운 무감한 눈으로 그의 금안을 마주했다. 몸은 사시 나무처럼 떨리고 있음에도 눈은 혼 들림 없이 나를 주시하는 것이 신 경을 거슬렸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 라이너
가 있다. 조금 빨라진 그의 숨결이 선명하게 귓가를 울렸다. 하얀 목 덜미가 날 선 칼날에 베여 울컥 피 를 흘렸다.
예민한 소드 마스터의 후각이 직 감을 간지럽힌다. 여러 악취가 뒤 섞인 이 뒷골목에서, 내 후각을 강 하게 건드리는 냄새들이 있었다.
진하게 풍겨오는 비릿한 혈 향. 검 특유의 강철 냄새.
라이너에게서 은은히 피어나는 로 즈우드 향.
'......맡아 본 적 있는데.'
수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라이너에게서 느껴지는 기 시감, 알 수 없는 그의 태도.
어떻게 그는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건지, 나는 왜 그에게서 익숙함을 느끼는 건지.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나지 않는다.
답답함에 짜증스러운 한숨을 뱉으 며 서늘하게 읊조렸다.
"그 목 위에 붙은 것을 귀히 여길 줄 안다면 대답하는 게 좋을 거
야."
칼날이 더 깊숙이 스며든다. 가랑 비처럼 떨어지던 핏방울이 장마철 굵은 빗줄기처럼 길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올라오는 피 냄새가 역 했으나 이를 악물어 구역질을 참았 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안 거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그는 살기에 몸을 떨면서도 알 수 없는 빛을 담은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응시할 뿐이었다.
'......왜 저항을 하지 않는 거지?'
그는 소드 마스터를 앞둔 강력한 검사. 그가 마음먹고 내게 대항하 려 든다면 이기진 못한데도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저항하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순종적으로 내리깔린 눈꺼풀과 허리춤에 찬 검에서 멀리 떨어진 두 손이 그것을 증명했다.
일순 속이 울렁인다. 기억의 편린 한 조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 다.
'강해져서 다시 만날 그날엔 당신 에 대해 알려줄 건가요?'
마수의 피를 뒤집어쓴 작은 인영. 나를 우러러보던 검은 눈동자. 첫 사랑을 닮은 풋풋함과 동경이 가득 담긴 눈빛.
'......그럴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그때 그 아이가 라이너 일 리가 없었다. 그 아이는 자기 입으로 평민이라고 말했을 뿐더러, 생김새도 라이너와.......
'......다른가?'
머릿속에 번개가 튀는 것 같았다. 눈앞의 라이너를 해부하듯 관찰했 다. 날카로운 시선 아래에서도 그 는 묵묵히 침묵할 뿐이었다.
검은 머리와 파란 눈에 조용하던 소년. 은회색 머리, 금빛 눈에 무심 해 보이는 라이너.
'말도 안 돼.'
동공에 파문이 일었다. 입을 살짝 벌리다, 쓸데없는 생각이라 단정 지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의 감
이 좋다 한들 이번엔 지나친 도약 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요.'
'그때 그 아이가 라이너일 리 없 어. 라이너는 귀족이잖아. 그때 그 곳에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소설에 나오지도 않고.'
라이너의 얼굴 위에 겹치는 소년 의 얼굴을 지워내며 냉정을 되찾으 려 애썼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으 니 머리가 계속해서 망상을 펼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용감한 기사단장님께서는 죽음도 두렵지 않으신가 봅니다."
부러 더 서늘하게 낯을 굳히고 그 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라이너 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내가 검은 재앙 미르라는 것을 안다면, 당신 정도는 가볍게 죽일 수 있음도 알 텐데......
눈을 내리깔며 하얀 살갗 위로 흐 르는 붉은 피를 검지로 천천히 쓸 어내렸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라이너가 제 입술을 깨물었다.
검은 재앙으로 이름을 날린 이후 부턴, 미르에 대한 괴담들이 생겨 났다.
'의뢰비를 충분히 지급하지 못한 마을에선 그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대가로 가져가 삶아 먹는다는 소문 도 있던데.'
사람들은 검은 오러로 마수들을 도륙하는 나를 동경하면서도, 그 재앙이 언젠가 자신들에게로 향할 까 두려워했다.
검은 재앙 미르는 사람들에게 두
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이제 슬슬 입을 열 때도 됐는데.'
이렇게까지 위협을 했는데도 라이 너의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 았다. 보통 사람들은 협박할 것도 없이 검만 꺼내 들어도 다 나불대 곤 했기 때문에 길게 이어지는 그 와의 대치가 어색했다.
가면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을 미 간을 좁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꿀이라도 발라놓은 듯 꿈쩍도 하지 않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개인적으로, 그대에게 관심 이 있어 뒷조사를 했었습니다. 미 안합니다."
감정이 배제된 딱딱하고 무뚝뚝한 말투. 처음 나를 보았을 땐 찬란하 게 반짝이던 황금빛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원하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껄끄러 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 이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라이너와 난 전에 만난 적이 없으
니 당연히 뒷조사로 내 이름을 알 아냈을 터였다. 그것밖엔 방법이 없으니까. 그와 내가 만났을 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찝찝한 거지.'
여전히 무표정함에도 어쩐지 처연 해 보이는 라이너의 얼굴이 눈에 걸렸다.
혼란스러움에 얼굴을 구기면서도 그의 목을 압박하던 검을 순순히 내렸다.
"정보의 출처는 어딥니까."
어찌 되었건 제 입으로 뒷조사를 했다고 하니 믿는 수밖에 없다. '요 정의 밤'에 등장하는 라이너는 침 묵할지언정 거짓말을 할 캐릭터는 아니니 의심을 거두기로 했다.
"어쩌다 알게 된 것뿐입니다. 저 말고 미르의 실명을 아는 이는 없 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입니까?"
"네."
'••...진짜겠지?'
눈을 가늘게 떠 그의 의중을 살폈
다. 라이너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 해 뜻을 읽기 힘들었지만, 직감이 그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속삭 였다.
'애초에 라이너가 남의 비밀을 함 부로 말하고 다닐 치는 아니니까.'
소설 속 그는 완벽한 기사였다. 딱딱하지만 올곧은 사람.
가지각색의 캐릭터들이 범람하던 소설계에선 밋밋하다 싶은 성격이 었지만, 특이함의 범람 속에서 오 랜만에 보는 정석이었기에 오히려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캐릭터였다.
'내게 악의를 가진 것 같지도 않 으니까.'
가라앉은 황금빛 눈동자에 악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보 이는 것은,
'슬픔, 분노, 욕망, 그리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 섞여 만들어 낸 어두운 눈빛뿐.
결국 검을 집어넣었다.
"라이너 아인하르트."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라이너가 휙 고개를 들었다.
"그대의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라이너의 동공이 파문을 일으켰 다. 그의 양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희미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왜인지 그는 기뻐 보였다.
"그러니 함부로 경거망동해선 안 될 겁니다. 용병 미르의 실명은 무 덤까지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아."
냉랭하게 갈무리하니 살짝 올라갔 던 그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원위치 를 찾았다. 라이너가 입술을 꾹 깨 물었다.
"......네."
조금 처진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 럽 혔다.
'왜...... 실망한 것 같지......?'
내 착각인지, 그는 협박을 듣고 시무룩해 보였다. 이상해지려는 기
분을 갈무리하곤 한숨을 쉬었다.
"검을 들이민 건 미안합니다. 이 부분엔 민감해서."
"괜찮습니다. 먼저 뒷조사를 한 제 잘못입니다."
형식적으로나마 사과를 주고받았 다. 여전히 동일한 무표정임에도 어쩐지 전보다 훨씬 울적해 보이는 라이너가 신경 쓰였다.
'......무슨 상관이야.'
풀리지 않은 것들이 많았지만 더 는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얼른 아
리아에게 가봐야 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뒷 일을 부탁합니다."
끝은 정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대강 예의를 갖추고 등을 돌렸다.
"잠시만."
라이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살짝 고개만 돌리자, 입술을 깨물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그가 보였다. 무 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기다 려 주니 그가 느리게 입술을 열었 다.
"그대는...... 내 오랜 동경의 대상 이었습니다. 난 그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하지만 그 런 고백을 하는 라이너도, 듣는 나 도 진지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요.'
정말 어이없게도, 나는 또다시 그 때 그 소년을 그와 겹쳐 보았다.
'......머리 아파.'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멈추려 해도 계속 떠오르는 가설 하나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길게 한숨을 쉬곤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여 손수 건을 꺼냈다.
"지혈."
라이너에게 손수건을 던졌다. 손 수건을 가볍게 잡아챈 그가 나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대체 왜 나를 저렇게 보는 건지, 왜 나를 닮고 싶다는 건지 모르겠 지만.'
"나는 당신이 나보다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요."
'너는 나보다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걸.'
그때 소년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한 것은, 그래. 충동이었다.
그대로 고개를 돌린 나는 그의 표 정을 볼 수 없었다. 내가 골목을 빠져나와 카페로 돌아갈 때까지, 골목에선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