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화
카슈미르가 사라진 골목길에 남은 라이너는 그녀의 혼적이 남은 골목 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라이너는 카슈미르의 손가락이 닿 았던 상처를 느리게 쓸어내렸다. 욱신거리는 상처보다 쉴 새 없이 뛰는 심장이 더 아팠다.
' 당신은......•'
여전히 강하고, 여전히 올곧으며,
여전히, 곁을 내주지 않는다.
가지런한 치열이 입술을 무참하게 짓씹었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찔린 입술에서 새빨간 핏줄기를 뱉어냈 다.
꾹꾹 누르고 또 누르던 감정이 풍 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울렁이는 속과 정박을 모 르고 뛰는 심장이 경박하게만 느껴 졌다.
'내가 그때 그 아이라는 걸 말했 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건네받았던 손수건이 행여나 구겨 질까, 그는 손수건을 쥐지도 못하 고 간신히 끝을 잡아 올렸다. 심장 이 쉴 새 없이 울렁거렸다.
'당신을 만난 이후부터 잠들지 못 하는 새벽이 많아졌지.'
그때를 기억한다. 나보다 작은 당 신이 날선 검을 들고 내 앞을 지켜 서던 그때를. 싸우는 당신을 지켜 볼 수밖에 없던 그날을. 그 작은 등이 세상 무엇보다 커 보이던 그 순간을.
이젠 청년이 돼 버린 소년은, 여
전히 첫사랑을 앓고 있었다.
'당신보다 강해지고 싶었는데.'
참을 수 없는 자기혐오에 이를 악 물었다. 손수건을 잡지 않은 반대 쪽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선명 한 손톱자국이 물들었다.
그날 이후 수도로 돌아온 라이너 는 모든 걸 내려놓고 검술 연습에 만 매진했다. 미친 사람처럼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날 보았던 그 등을 넘어서기 위 해. 그녀와 등을 마주 대고 싸우기
위해.
다시는, 좋아하는 이 뒤에서 무력 하게 보호만 받지 않기 위해.
'하지만 당신은.'
뼈가 으스러져라 쥔 주먹 틈새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당신은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속 도로 성장해 이제는 재앙이라 불리 고 있었다.
카슈미르는 라이너 아인하르트에 게 있어 뛰어넘어야 할 기준선이
자, 갈망이고, 동경조차 닿지 않는 머나먼 우상이었다. 그가 아무리 미친 사냥개처럼 추적해도 그녀는 언제나 라이너를 앞서 있었다.
'당신은 왜 이리 무자비하게 다정 한지.'
작은 자수조차 없는 흰색 민무늬 손수건.
라이너는 카슈미르의 손이 닿았던 손수건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아인하르트의 재력으론 수만 개도 더 살 수 있는 흔한 손수건이었으
나, 그녀가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소중해 견딜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골목길을 느리게 훑던 라이너의 시선이 르웰 린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구한 사람.'
금빛 눈동자가 해저에 다다를 듯 깊게 침잠했다.
무자비하게 다정한 당신의 자비는 내게만 향하지 않는다.
라이너는 운 좋게 카슈미르의 동
정을 받은 다수 중 하나일 뿐, 그 녀의 유일함이 아니었다.
'분명, 그럴 텐데.'
황금빛으로 빛나던 두 눈동자가 질끈 감긴다. 라이너는 그를 기대 하게 하는 그녀의 모든 것들을 잊 으려 노력했다.
한없이 난폭한 기세로 내뿜어지면 서도 그의 숨통을 본격적으로 막진 않던 살기를. 목에 핏줄기를 내면 서도 깊게 들어오지는 않았던 검 을. 무언가 떠오른 듯 동요하다가 도 애써 냉정을 가정하던 낯을. 저
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면 서도 순순히 믿고야 마는 물렁함 을. 짜증스럽게 앓는 소리를 내며 무심한 듯 손수건을 건네주던 다정 함을,
'나는 당신이 나보다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요.'
'너는 나보다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걸.'
무언가 아는 것처럼 그날과 비슷 한 말을 읊조리던 변조된 목소리 를.
영혼에 새겨진 것은 잊을 수 없
다.
음습한 갈망과도 같은 무언가가 그의 속을 뒤집었다.
달려가 그녀를 잡고 싶었다. 당신 이 의심하는 대로 그때 그 아이가 나였다고. 당신에게 무력하게 지켜 진 뒤로 당신과 같은 자리에 서기 위해 노력했다고. 오랫동안 당신을 동경했고,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다 가오던 당신을 그리워했다고.
'......아직은 아니다.'
라이너는 짙은 숨을 뱉어 범람하
는 감정들을 삼켜 냈다.
오랫동안 굴려진 눈덩이처럼 커지 고 또 커져 더는 부정조차 할 수 없는 욕망을 짓이기듯 누르는 건 라이너에게 습관과도 같은 일이었 다.
카슈미르와 헤어진 그날 이후, 그 녀를 찾지 못해서 그리 살았던 것 은 아니다.
'나한텐 동생이 있어. 그 아이가 행복하길 바라면서 일생을 살아 냈 지. 우린 수도 가까이에 살고 있 고......
다정한 당신은 당신을 궁금해하던 아프고 약한 평민 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그 정보들 을 기반으로 당신을 찾으려 했다면 찾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찾지 않았던 것은. 매일 밤 그리움을 누르며 새벽을 지새웠 던 것은,
당신이 등을 맡기고 싸울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당신과 재회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와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만날 그날엔 강해져 있겠다 고 했으니까.'
당신과 같은 곳에 서기 위해 노력 했다. 어느새 소드 마스터 경지에 올라 검은 재앙으로 이름을 날리는 당신의 명성을 듣고 조급해져 밤새 도록 검을 휘두르던 날들은 셀 수 도 없었다.
그 수많은 나날을 인내하고, 흐르 지 않는 새벽을 견뎠는데,
'당신 얼굴 한번 봤다고 무너져 버리면 어쩌라는 건지.'
채워지지도 삼키지도 못할 갈망이 참혹하다.
방울진 피가 떨어지는 손으로 거 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라이너의 하얀 얼굴에 새빨간 핏줄기가 묻어 났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신보다 강해질 순 없을지라도 당신과 비슷한 경지엔 갈 수 있다.'
소드 마스터의 고지가 눈앞에 있 음을 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그때가 다다르면 당신을 찾아가 자 신이 그때 그 아이였음을 고백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진 참아야 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불안정한 황 금빛 오러가 그의 주위에서 일렁였 다. 이 오러의 색조차도 당신에게 서부터 비롯된 것.
라이너의 모든 것은 이미 카슈미 르로 물들어 있었다.
다시금 이를 악문 라이너는 느리 게 심호흡을 하곤 기절한 르웰린을 안아 들었다. 정의로운 그는 원래 도 르웰린을 도왔겠으나, 카슈미르 가 부탁한 이상 더욱 확실히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쓰레기에게...... 과분한 흔적이 남았군.'
라이너는 몸 위에 검은 오러의 혼 적이 남은 남자를 서늘하게 내려다 보다 자신의 오러로 남자를 한 번 더 속박했다. 빛나는 황금빛 오러 가 남자의 몸을 뱀처럼 휘감았다.
'당신의 부탁이니까.'
뒷일을 부탁한다는 카슈미르의 말 을 거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신의 전부는 감히 꿈꾸지도 않 으니, 다시 만날 그날엔 당신의 마 음 한 조각이라도 받을 수 있기를.'
그것이 라이너 아인하르트가 바라 는 전부였다.
르웰린을 구하고 라이너와 대면했 던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원작의 주요 인물인 둘과 거하게 엮였으나, 내 일상에 변화는 없었 다.
'나흘 동안은 프레이야 백작가에 대해 조사했지.'
아리아가 가게 될 가문이다. 혹여 소설에 쓰이지 않은 비리나 어두운 부분이 있을까 싶어 정보 단체까지 방문해 프레이야 백작가의 모든 것 을 캐낸 후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소설과 동일했 다.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프레이야 백작가는 수많은 사업을 진행하고 있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뒤가 깨끗 했다. 백작과 백작 부인 모두 선량
한 이들이라고 하니 안심하고 아리 아를 맡겨도 될 것 같았다.
'아리아가 안정적으로 백작가에 정착을 하면
나는, 혼자 남게 되겠지.
기쁨과 슬픔, 걱정과 외로움, 그 리고 절망이 점철되어 더는 색을 알아볼 수 없게 된 감정의 응어리 가 사무치며 속을 뒤집었다.
'이기적인 새끼. 기뻐해야지.'
그저 기뻐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역할 정도의 자기혐오를 느꼈다.
아리아는 그곳에서 행복해질 것이 다. 좋은 부모 아래서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나 같은 건 차마 바라볼 수조차 없는 높은 곳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 완벽한 이야기에 내 자리는 없 었다.
'결심했잖아. 아리아의 행복을 위 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절대 욕심 부리지 않겠다고, 한 자락의 그림자로 남기로 했잖아.'
혼들리는 마음을 다시금 다잡았 다.
백작 영애가 된 아리아의 곁에서 알짱거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적이 많은 용병 미르는 아리아에게 방해물만 될 테니까.
'멀리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 러다 가끔 위험에 처한 아리아를 도와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감히 더 바라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았어.'
다행히도 소설엔 아리아가 백작가 로 가게 되는 날이 언제인지 자세 히 기록되어 있었다.
'눈꽃 축제의 시작일로부터 하루 가 지난, 눈 내리던 날.'
눈꽃 축제는 제국의 겨울을 대표 하는 성대한 축제였다. 황궁에선 한 해의 끝을 자축하며 무도회가 열리고, 평민들의 거리엔 화려한 노점상들이 들어섰다.
'눈꽃 축제를 구경하러 가다 외진 골목길에서 쓰러진 아리아를, 집에
돌아가던 프레이야 백작이 우연히 발견한다.'
이것이 원작의 시작점. 아리아 인 생의 분기점이 될 사건이 이제 일 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원작대로 흘러가야 하지만, 아리 아가 위험해도 안 돼.'
이미 나 때문에 원작이 뒤틀어졌 다. 원작과 달리, 아리아에겐 나라 는 보호자가 있었다. 어떻게 흘러 갈지 예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조작을 거쳐서라도 원
작을 타야지.'
프레이야 백작의 일거수일투족은 이미 뒷조사로 알아낸 뒤였다.
결전의 그날, 나는 출근하는 프레 이야 백작과 실수인 척 부딪치며 그의 몸에 위치 추적기를 붙일 것 이다. 마력으로 작동되는 초소형 위치 추적기는 상당히 비쌌으나, 아리아를 위해 못 할 것은 없었다.
'어떻게든 프레이야 백작이 아리 아와 만나게 해야 해.'
아리아가 요정 숲의 약수를 정기
적으로 복용하게 되며 몸 상태가 원작과 사뭇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 았다. 과연 그날 쓰러질지조차 확 신할 수 없었다.
'......목덜미를 쳐서라도 기절시켜 야지.'
아리아를 공격할 생각에 마음이 심란해졌지만 원작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만큼 마음을 굳게 먹었다.
'기절한 아리아를 프레이야 백작 의 이동 동선 위에 내려주면.'
계획은 완벽하다.
생각을 정리한 뒤, 검은 망토의 후드를 꾹 눌러쓰고 건물 위에서 뛰어내렸다.
'용병 길드'
눈앞에 나무 건물로 발걸음을 옮 겼다.
'그러고 보면, 이곳을 셋이서 함 께 들어갈 때도 있었는데.'
내가 처음부터 혼자서 일했던 것 은 아니었다.
마수 토벌은 무척이나 험난한 일. 동료와 함께했을 때도 있었다. 무 려 둘과 함께.
'다 옛날이야기지만.'
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 좋지 않 은 기억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우울해져 고개를 흔듦으로 생각을 흐트러트렸다.
휴가는 끝났다. 미르로 일해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