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화
끼익-
거대한 나무문이 오래된 경첩 특 유의 소리를 내며 밀렸다.
술집 형태의 용병 길드 내엔 언제 나 사람들이 바글댔다. 익숙한 광 경을 지나쳐 게시판 앞에 섰다. 내 등장과 함께 일대가 잠시 고요해졌 다.
"......저거 미르 아녀?"
"미르야 늘 이쪽으로 의뢰지를 찾 으러 오니 가끔 볼 수야 있다 만...... 요즘은 미르를 사칭하는 자 들이 워낙 많으니 진짜인지 구분할 수가 있어야지."
'일주일 내에 끝낼 수 있는 마수 토벌 의뢰로.'
피부 위로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 한 채 조건이 맞는 의뢰를 찾아 게 시판을 뒤적였다. 다닥다닥 붙은 의뢰서들을 헤집고 또 헤집다, 작 게 붙은 의뢰지 한 장으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루주 마을의 겨울 마수 토벌을 도와달라고.'
루주 마을은 크리시스 공작가의 영지로, 북부와 가까운 변방에 위 치해 끊임없는 마수의 침범을 받는 지역이었다. 만년설 지역과 가까워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늘 식 량 부족과 빈곤에 시달리는 마을이 라고 들었다.
'출몰하는 것들도 죄다 하라바나 나 바쿠스같이 난폭하고 토벌하기 어려운 마수들이란 말이지. 게다가 지금은 겨울인데.'
쯔
혀를 찼다. 추운 날씨에 야영하는 것은 무척 고된 일인 데다, 겨울이 되면 거대 마수들이 활발하게 활동 하기에 겨울 마수 토벌은 특히 더 어려웠다. 때문에 가난한 변방 마 을들은 겨울이 되면 수백 구의 시 체를 치우곤 했다.
난 보상금 액수와 의뢰지 모서리 에서 반짝이는 금빛 방패 문양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보상금은 백 골드. 겨울 마수 토 벌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턱없이 부
족하다 못해 이 세계에 노동청이 있었다면 곧장 신고당했을 만큼 양 심 없는 금액이었다. 가난한 루주 마을로서는 힘겹게 모은 보상금이 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황금 방패면.'
최고위 용병들만 지원 가능하단 소리였다.
용병들에게도 등급이 있다. 의뢰 성공률과 의뢰인들의 만족도, 성과 등을 총합하여 매겨진 등급이었다. 용병들은 이 등급에 따라 지원할 수 있는 의뢰가 제한되었다. 보상
금이 두둑하나 난이도가 높은 의뢰 는 높은 등급의 용병만 지원할 수 있는 식이었다.
'등급의 기준은 방패.'
하급 용병에겐 철 방패. 중급 용 병에겐 동 방패. 상급 용병에겐 은 방패. 의뢰 성공률 90%를 넘기는 극소수의 용병들에게만 금 방패가 부여되었다. 금 방패쯤 되는 용병 들은 웬만한 금액이 아니면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등급을 금 방패로 제한하 고 보상금이 겨우 백 골드면.'
모집을 할 생각이 없다는 것과 다 름이 없었다.
'용병계의 생리를 모르는 사람이 작성한 모양이군.'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내가 아는 금 방패 용병들 중, 이 더럽게 어려우면서 의뢰비는 눈물 나게 짠 악덕 의뢰를 지원할 만한 호구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내가 지원한다."
나였다.
뜯어낸 의뢰지를 바 위에 올려놓 자, 바 뒤에서 술을 섞던 하울이 의뢰지와 날 번갈아 보았다. 그의 입가에 그럴 줄 알았다는 웃음이 피어났다.
"이 의뢰지를 붙여 놓을 때부터 자네가 맡을 거라고 확신했지. 이 런 의뢰를 맡을 호구가 미르 말고 또 있겠나."
"헛소리 말고 접수나 하지 그래."
짜증스럽게 재촉하니 크게 웃은 하울이 의뢰지를 낚아챘다.
용병으로 일한 지 어언 5년. 그동 안 이곳에서 의뢰를 접수하는 하울 과는 꽤 친분을 쌓았다고 할 수 있 었다. 하울 또한 미르를 사칭하는 수많은 이들 중에서도 내가 진짜 미르라는 걸 확신할 정도로 내가 익숙해진 듯했다.
"황금 패는?"
" 여기."
주머니에서 꺼낸 패를 던졌다. 황 금 방패가 세심하게 새겨진 패를 잡아챈 하울이 형식적으로 위조 검 사를 하고는 내게 돌려주었다.
"접수됐네. 지금 바로 출발해야겠 어."
"지금 바로?"
"그 의뢰 마감이 오늘까지라서. 게다가 이 의뢰에 참가할 다른 이 들이 곧 출발할 거거든. 같이 가려 면 바로 준비해야 할 거네."
"......나 말고 지원한 사람들이 더 있다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미간을 찌푸 렸다. 내가 만나 본 황금 방패 용 병들은 하나같이 욕심과 거만함에 찌든 치들이었다. 이 값 싸고 어려 운 의뢰에 응해 줄 인물은 떠오르
지 않았다.
"용병은 아닐세. 우리 용병 길드 에 이런 의뢰를 자원할 호구가 자 네 말고는 없다는 거 알지 않나."
"내가 검 뽑는 꼴을 보고 싶나 보 지?"
"크흠! 이번 의뢰엔 기사들이 참 여할 걸세."
"기사들?"
생뚱맞은 소리에 멀뚱히 선 채 눈 을 깜빡였다. 하울이 설명을 덧붙 였다.
"크리시스 공작가가 자기 영지엔
극진하지 않나. 루주 마을로 보낸 지원단이 마수의 습격으로 전멸한 게 여러 차례이니, 이번엔 아예 기 사들로만 지원단을 꾸려 마수 토벌 까지 하고 온다는군."
"으 "
"이번에 루주 마을이 단독으로 의 뢰한 마수 토벌에도 지원하는 용병 이 있다면 함께 데려가겠다고 기다 리고 있네. 허나 이 저렴한 의뢰에 누군가 지원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 더군. 자네가 가면 엄청 놀랄 거 야."
신나서 떠드는 하울과 별개로, 난 머리가 지끈거렸다.
'크리시스 공작가면...... 내 친아 버지 가문이잖아.'
내가 크리시스 공작의 혼외 자식 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 도 조금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었 다.
'뭐...... 별일이라도 있겠어.'
토벌에 참가하는 건 크리시스 공 작가의 기사들뿐이니 공작가와 직 접적으로 엮일 일은 없을 터였다.
"짐은 싸 왔으니 식사만 하고 바
로 출발하지. 어디로 가면 되나?"
"공작가 저택으로 가면 되네. 사 실 자네가 그 의뢰에 지원할 줄 알 고 자네가 오자마자 공작가로 전보 를 쳐 놓았어."
"아주 재밌지?"
"에이, 내가 자네 아끼는 거 알면 서 어찌 그러나."
장난스레 검집 위로 손을 올리자 하울이 너스레를 떨었다. 서로 알 고 지낸 지가 5년. 친구라고 부르 기엔 어려운 사이였으나, 얼굴을 봐 온 시간이 있는 만큼 하울과 나 는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밝은 웃음에 나도 어쩔 수 없
다는 뜻을 담아 옅은 웃음을 흘렸 다.
"저 비리비리한 게 용병 미르라 고? 말도 안 돼! 키가 작다는 소문 이야 들었지만 저건 완전 꼬맹이 아닌가!"
"저 정도면...... 나도 이길 수 있 지 않을까?"
귓가를 스치는 헛소리들을 반대편 귀로 흘렸다.
'오늘은 물이 더럽군.'
이곳에서 일해 온 용병들이라면
나를 두고 저리 함부로 입을 놀리 진 않을 텐데, 오늘은 주제를 모르 고 혀를 놀리는 놈들이 많았다. 기 묘함에 길드 내를 느리게 훑어보다 이유를 찾아내었다.
'해외 용병단이 곧 한 번 방문한 다더니, 그게 오늘이었나.'
이국적인 얼굴들이 많다 싶었는데 해외 용병들인 모양이었다. 해외 용병들이라면 내가 이전에 시비를 거는 용병들을 상대하다 이 용병 길드를 반파시켰던 사건을 모를 테 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자네 진짜 미쳤나? 제발 좀 닥 치게! 난 휘말리고 싶지 않단 말일 세!"
"제국인들은 원래 다 겁쟁이인가? 저 꼬맹이가 뭐 무섭다고 벌벌거리 는 겐가!"
떠벌거리는 놈들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지하는 이들이 있긴 했지 만, 그럼에도 잡소리는 점점 커져 만 갔다.
'뭐, 알아서 생각하라지.'
내게 저 정도 모욕쯤은 애들 장난 같을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문한 말린 해 파리 샌드위치를 태평하게 우물거 리고 있으니, 도리어 하울이 안절 부절못했다.
"......우리 길드는 얼마 전에 내부 공사를 했네. 낡은 의자랑 탁자들 을 싹 새로 갈았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제발 안에서 싸우지 말게......
한탄하듯 부탁하는 하울을 보며 옅게 웃은 뒤 남은 샌드위치를 한 입에 꿀꺽 삼켰다.
"걱정 마. 내가 애도 아니고. 괜 히 싸울 필요는......
순간 튀어 오르는 감각. 나는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무언가를 피해 재빨리 고개를 젖혔다.
콰직!
얼마나 세게 던진 건지, 날아온 것은 분명 유리잔이었음에도 부딪 친 벽에 구멍이 났다. 산산조각 난 잔과 바깥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구 멍 뚫린 벽을 무감한 눈으로 바라 보다 한숨을 쉬었다.
'마나를 담아 던졌군.'
보통 유리잔이 나무 벽을 깰 수 있을 리 없었다. 내 머리를 향해 마나를 담아 물건을 던졌다는 건, 날 조지겠다는 의미임이 분명했다.
"이 꼬맹이가 용병왕 미르라고?"
일대가 고요하게 가라앉고 하울이 짜증으로 얼굴을 구긴 가운데, 남 자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몸집에 우락부락한 인상, 이국적인 얼굴. 타국의 용병으로 보이는 남자는 내게 확연한 악의를
품고 있었다.
그가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하하! 어이가 없군! 무슨 이런 매가리 없는 몸으로 검을 쓴다고! 검을 들다 손목이 부러지게 생겼구 먼!"
내 옆으로 다가온 남자가 크고 두 꺼운 손으로 내 어깨를 거칠게 밀 쳤다. 날 넘어트리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했으나, 남자가 잔을 던진 직 후 시비를 예감하고 마나로 휩싼 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내가 멀쩡하니 당황한 그를 뒤로 한 채 태연하게 하울에게 말을 걸 었다.
"목마르니 얼음물이나 한 잔 내오 지 그래."
무력의 경지가 낮은 하울은 옆에 있다가 봉변을 당할지도 몰랐다. 그를 대피시키기 위해 필요하지도 않은 얼음물을 부탁하자, 하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네, 설마......
"말로 하지."
"젠장...... 싸우려면 나가서 싸우
게......
가게를 근심 가득한 눈으로 둘러 본 하울이 송장 치우기 싫다고 중 얼거리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이익! 이 자식이!"
내가 꿈쩍도 안 하자 분한 모양인 지 남자가 이를 갈며 제 등에서 도 끼를 뽑아 내게 겨누었다. 난 날 선 도끼에 시선도 주지 않고 남자 를 덤덤히 응시했다.
"뭐가 문제지?"
"난 너 같은 놈이 용병왕이라는
걸 인정할 수 없다! 너 같은 꼬맹 이는 황금 방패인데 내가 은 방패 라고? 여기서 널 이기면 내가 금 방패겠지!"
'열등감에 찌든 인간이었군.'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가 은 방패 라는 발언이나 도끼를 잡은 폼을 보아 실력이 그렇게까지 허접한 인 간은 아닌 듯했지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열등감이 찌들어 있었 다.
"싸울 생각 없네."
"하! 무서운가 보지?"
'힘 조절 실패해서 네가 뒤질까 봐, 멍청아.'
성가심에 속으로 앓으며 싸울 마 음이 없다는 뜻으로 남자에게서 몸 을 돌려 앉았다. 그 행동이 자신을 향한 무시로 느껴졌는지, 격분한 남자가 도끼로 바닥을 쾅 내리쳤 다.
"이 새끼가! 감히 날 무시해?"
쉬익!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날 향해
휘둘러지는 도끼를 살짝 고개 숙여 피했다. 그리 빠른 속도도 아니었 다. 그러자 분한 표정의 남자가 도 끼를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 다.
쾅! 콰쾅!
남자의 도끼질에 기물들이 마구 파괴되었다. 난 새하얗게 질릴 하 울이 떠올라 혀를 차면서도 날아오 는 공격들을 가볍게 피했다. 이 정 도는 내게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거칠게 들 이쉬던 남자가 분에 겨워 내게로 도끼를 던졌다.
'멍청한 놈. 무기를 제 몸에서 떨 어트리다니.'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이상, 용병은 절대 제 몸에서 무기를 떨 어트려선 안 됐다.
혀를 차며 날아오는 도끼를 피해 뛰어올랐다.
쾅
내가 있었던 자리에 도끼가 박혔 다. 다음 순간, 난 바닥에 꽂힌 도 끼의 손잡이를 도약대 삼아 밟고 훅 날아올랐다.
당황한 남자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 순간 나는 일대로 살 기를 뿜어냈다.
"히 익!"
독 안개 같은 검은 연기가 건물 안을 가득 채웠다. 모두가 숨을 참 는 가운데, 나는 남자에게로 살기 를 집중시켰다. 남자의 근육들이 거대한 기운을 감당치 못하고 마구
요동쳤다.
"앞으론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누 구인지 제대로 알고 덤비는 게 좋 을 거다."
무감각하게 중얼거리곤 검은 장갑 을 낀 손으로 거칠게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을 뒤덮은 검은 오 러가 미친 듯이 날뛰며 남자의 입 으로 들어갔다.
내 오러가 그의 뇌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신경 하나를 건드렸다.
"나는 미르니까."
쾅!
거대한 인영이 속절없이 무너졌 다.
나는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일대 를 가로질러 의자에 걸터앉았다.
용병왕 미르. 그 이름은 더없이 무거웠다.
'비록 돈을 위해 시작한 일이지 만. 이리 대단해지고자 하는 바람 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검을 사랑하고, 이 이름에 자부심을 품었다.
검을 사랑하는 것은 내게 불가항 력이었다. 나는 날붙이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친애했고, 검 끝에 서 이글거리는 검은 오러를 애증했 으며, 검으로 내 소중한 이를 지키 고 있음에 기뻐했다.
내게 '미르'라는 이름은 소중한 사람을 필사적으로 지켜 온 세월의 증거와도 같았다.
" 미친••••••
얼음물을 들고 나오다 도끼로 패 여 엉망이 된 건물 내부를 본 하울 이 입을 떡 벌렸다. 나는 넋이 나 간 그에게서 잔을 낚아채 단번에 잔을 비우곤 히죽 웃었다.
"난 피하기만 했어. 피해 보상은 저 자식한테 물려."
꾸깃꾸깃한 돈을 바 위에 올려두 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고해, 하울."
내게로 집중된 시선들을 가벼이 넘기며 건물을 나섰다.
"......이, °1 개자식이!"
누구에게 향한 것일지 모를 하울 의 울부짖음이 등 뒤로 쩌렁쩌렁하 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