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화
마나를 이용한 주파로 5분 만에 도착한 공작가 저택을 눈에 담은 나는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황궁이고 신전이고 다 저리 가라 군.'
크리시스 공작가가 황궁과 신전의 대척점이 될 만큼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궁전을 방불케 하 는 저택을 이리 직접 보고 있자니 놀라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주저하며 저택 앞으로 다가갔다. 문 앞은 무장한 기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기사들이 날 들여보 내 줄까 고민하던 찰나.
"헉! 미르 님이십니까?"
내 고민이 무색하게도, 서성거리 는 날 발견한 기사들이 반색하며 날 맞이했다.
"......맞습니다."
"연락받았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따라오시죠. 안으로 모 시겠습니다!"
떨떠름하게 긍정을 표하니 흥분한 듯 얼굴이 발그레해진 기사들이 꼬 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신나서 나를 안내했다. 예상보다 호의적인 반응 에 주춤거리면서도 순순히 그들을 따랐다.
"루주 마을 마수 토벌을 도와주신 다는 말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 다! 미르 님을 정말 만나 뵙고 싶 었거든요!"
"......그러셨군요."
"사실 전 마수 토벌이 처음이라 걱정하고 있었는데, 미르 님이 함 께해 주신다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 릅니다!"
"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두 기사는 가는 내내 수다스러웠 다. 쏟아지는 칭찬들에 어색하게 동조하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기사들은 용병을 싫어하는 게 보 통인데.'
긴 수련을 거쳐 어렵게 작위를 받 는 기사들은, 오직 돈을 위해 검을
휘두르는 용병들을 경멸하곤 했다.
'기사단과 동행한다고 하니 눈칫 밥 먹는 걸 각오했건만......
지금 만난 두 기사는 내게 악의가 없다 못해 나에 대한 칭찬으로 대 서사시를 쓸 기세였으니 당혹스러 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가면에 가려진 얼굴은 이미 빨개 졌으나, 여기서 칭찬을 더 듣다가 는 드러난 목까지 붉게 달아오를 것 같아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아. 말씀을 못 드렸군요. 지금은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고 있습니 다."
"응접실이요?"
'정체도 모르는 평민 용병을 공작 가 응접실에 안내한다고?'
귀족들이 용병을 얼마나 천시하는 지 아는 나로선 당혹스러운 일이었 다. 놀란 나를 향해 갈색 머리의 기사가 방긋 웃었다.
"공작님께서 미르 님을 만나고자 하십니다."
넋을 놓고 홍차가 담긴 찻잔을 만 지작거리다, 흠집이라도 낼까 싶어 황급히 잔을 내려놓았다.
난 응접실 의자에 뻣뻣하게 앉은 채, 내 옆을 지키고 선 남자를 곁 눈질했다. 자신을 공작가의 총괄 집사 테일러라고 소개한 노년 남성 은 나와 눈이 마주치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그의 눈에 담긴 호의가 어색해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공작님께선 왜 저를 만나려고 하 시는 겁니까?"
멀거니 앉아 있다가 어색함을 풀 기 위해 넌지시 물었다. 테일러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저는 명령을 따를 뿐이 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미르 님 께선 공작님과 같은 소드 마스터이 시니 호기심을 가지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악마 공작이? 내게 호기심
아무리 총괄 집사의 말이라지만 믿기지 않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 다.
제국의 군 통솔권을 쥐고 있는 무 (武)의 정점이자, 황궁 기사단과 맞 먹는 수준의 검은 용 기사단을 거 느린 카이사르 크리시스 공작.
그는 악마 같은 성정으로 아주 유 명했다.
'분명 공작의 잔인함 때문에 공작 가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간 다고 했는데.'
저택 내 분위기를 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나는 얼굴에 평온함이 가득한 테 일러를 힐끔거리다 한숨을 푹 쉬었 다.
공작이 보자는데 평민 용병인 내 가 거절할 권한은 없으므로, 이 만 남은 불가피했다. 다만 나를 보고 자 하는 공작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긴장될 뿐이었다.
'보자마자 제국 최강의 소드 마스 터는 나라며 검을 휘두르지만 않았 으면 좋겠는데.'
힘의 강약을 가리기 좋아하는 호 사가들이 꼽는 현 대륙의 최강자들 은 총 10명. 그중 소드 마스터로 최강자 후보에 오른 이가 5명인데 제국에서 공인한 소드 마스터가 3 명이었다.
'붉은 검귀, 금빛 정의, 검은 재 앙.'
차례대로 카이사르 크리시스, 노 아 아인하르트, 그리고 나였다.
'제국의 소드 마스터로서 승부를 보자고 할지도 모르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덧없 는 걱정들만 늘어난다. 나는 짙게 한숨을 쉬었다.
원작에서도 크리시스 공작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적었다. 남주의 아버 지라는 애매한 포지션인 데다, 그 는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 아 죽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제국에서 도는 소문으론 세상에 둘도 없는 악마라는데......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는 것 같지 만 저잣거리 소문은 헛소문이 많아
믿기가 애매했다.
'어쨌든 위험한 사람인 건 확실하 지.'
꿀꺽 침을 삼켰다. 나도 모르게 긴장으로 입매가 굳었다.
카이사르 크리시스는 가는 곳마다 붉은 길을 만드는 검귀라고 불릴 정도로 살육에 능한 자라고 했다.
성정이 난폭하고 잔인하다는 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확신할 수 없 었으나,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 지 않는 법• 날 만나자마자 난폭하
게 굴지도 몰랐다.
'무조건 수그리자. 무조건 꿇는 거야.'
허리춤에 찬 검에 잠시 시선을 주 다, 오늘은 절대 뽑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미르 님."
"네, 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여전히 온화한 표 정의 테일러가 부드럽게 웃었다.
"갑작스러운 질문 죄송합니다만, 미르 님께선 선대에 크리시스 공작 가의 일원을 두신 적 있으십니까?"
' 어떻게?'
테일러가 나긋한 목소리로 거대한 폭탄을 던졌다. 나는 당혹스러움에 표정을 굳혔다.
내 아버지가 카이사르이니 아마 나는 그를 닮았을 것이다. 허나 지 금 나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테일 러가 생김새로 내 혈통을 짐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입을 작게 벌 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 테
일러가 나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표정을 정돈했다.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평민입니다."
"그러십니까. 하지만...... 기묘하 군요."
세월의 지혜를 머금은 노인의 눈 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피하고 싶 다는 생각이 들 때쯤, 테일러가 부 드러이 웃었다.
"그 눈은 쉬이 나올 수 없는 눈인 데 말입니다."
'•...눈?'
설핏 미간을 좁혔다. 난데없이 눈 을 언급하는 테일러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아무 렇지 않게 웃고 있는 테일러를 살 피고 있을 때.
강자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몸 이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재빨리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칵.
그리고 문이 열렸다.
몸을 단단하게 조이는 검은 제복. 등장만으로도 공기를 압도하는 강 한 기운. 배부른 맹수처럼 나른하 고도 위협적인 분위기. 짧고 검은 곱슬머리.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 아래로 박혀 있는, 루비처럼 박힌 새빨간 눈동자.
숨이 멎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섬뜩하리만치 차가웠다.
"예를 갖춰 주십시오. 카이사르 크리시스 공작님이십니다."
카이사르 크리시스. 내 아버지였
다.
삶에 싫증을 느낀 맹수처럼 나른 하게 뜬 붉은 눈과 정면으로 마주 했다.
지독한 무감각을 붉게 빚어낸 것 만 같은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고 있자니 뼛속까지 시린 느낌이었다.
"허."
카이사르가 잇새로 헛웃음을 닮은 숨을 뱉었다. 나를 바라보던 카이 사르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의 지긋한 시선에 딱딱하게 굳어 있다
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용병 일을 하고 있는 미르입니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상체를 숙인 채 예의를 차리는데, 카이사르에게 서 대답이 없었다. 뭔가 싶어 슬며 시 고개를 드니, 느리게 눈을 깜빡 인 그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일어나라. 앉아도 좋다."
짧게 목례하곤 잔뜩 긴장한 채로 의자에 앉자, 카이사르가 내 맞은 편에 앉았다.
"그럼 전 나가 있겠습니다."
카이사르의 눈짓을 예민하게 잡아 챈 테일러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응접실을 나섰다. 나와 카이사르, 단둘이 남게 된 응접실의 공기가 한없이 무거웠다.
"너."
부담스러울 정도로 날 응시하기만 하던 카이사르가 느리게 입술을 열 었다.
"눈이 예쁘군.
"••••••네?"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끔뻑였으 나 정정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이 사르는 묵묵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 다.
'......갑자기? 눈을 칭찬한다고?'
테일러도 그렇고, 카이사르까지 눈 타령을 하는 것이 기묘했다.
'내 눈이 공작가에서 잘 먹히는 눈인가......
별 쓸데없는 생각까지 다 들었으
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눈은 예쁘 지 않았다.
'소름 끼치는 형광 분홍빛으로 기 이하게 번뜩이지.'
내 주위에서 붉은 계열의 눈동자 를 가진 이는 내가 유일했다. 눈 색이 이상하다는 소리를 한두 번 들었던 게 아니었기에, 카이사르의 말은 고도의 비꼼 같기까지 했다.
"감, 사합니다."
허나 명색은 칭찬이었던 만큼, 불 쾌한 티를 낼 순 없었다. 난 평민
용병에 불과하고, 그는 공작이었으 니.
어색하게 감사를 표하니, 나를 지 그시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옅게 숨 을 뱉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널 부른 것은 아니니 긴장은 풀어도 좋다."
여전히 차갑기 짝이 없는 얼굴이 었지만, 긴장을 풀어 주려는 노력 은 꽤 상냥하게 들렸다. 검이 날아 오면 어떤 각도로 피해야 정중해 보일지 고민하던 나로선 머쓱한 일 이었다.
'역시 소문은 과장된 건가......
자연스럽게 찻잔을 기울이며 카이 사르를 관찰했다. 소문에 의한 카 이사르는 대마왕에게 영혼을 팔아 이 세계를 파괴하려는 악마 새끼였 기에, 소문이 진실이라면 그게 더 놀라웠겠지만. 잔을 내려놓은 카이 사르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를 찾은 건 묻고자 하는 게 있 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카이사
르가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니,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한 참 내 눈동자에 시선을 두던 그가 입술을 열었다.
"왜 이 의뢰에 지원한 거지?"
" 네?"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이니, 카이사르가 덧붙 였다.
"루주 마을 마수 토벌이 어렵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거기에 이번 의뢰는 보수가 좋지도 않다. 다른 용병도 아닌 미르가 다른 일이 없
진 않을 텐데 이 의뢰에 지원한 이 유가 뭐지?"
'......호구라고 놀리는 건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주저 하고 있으니, 카이사르가 덧붙였다.
"널 시험하고자 하는 질문은 아니 다. 이전부터 궁금했을 뿐이다. 용 병 미르는 돈 없는 마을들의 마수 토벌을 돕는 영응이라는데, 어째서 그런 일을 하는지."
'이전부터라는 건, 날 알고 있었 다는 거겠지.'
그가 날 이전부터 알고 있다는 것 에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야 카이사르가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알 고 관심 가지기 시작했다지만, 그 는 자신의 딸도 아닌 용병 미르에 게 관심을 가졌다는 게 신기했다.
"넌 어째서 귀찮은 짓을 자처하 지?"
카이사르의 무심한 눈동자에 들어 찬 것은 정말 순수한 궁금증이었 다. 그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 다.
'그러게. 왜일까.'
새삼 고민했다. 나는 어째서 이렇 게 살고 있는 것인지.
잠시 간극 끝에 느리게 입을 열었 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살았고, 그러다 보니 강 해졌고...... 강해지고 나니 주위의
약한 자들이 보였습니다. 용병을 많이 고용해 매해 겨울을 안전히 보내는 마을도 보았고, 용병을 고 용하지 못해 끊임없이 송장을 치우 는 마을도 보았습니다."
현 황제와 교황은 성군이라 칭송 받았고, 수도는 늘 평안했지만, 그 렇다고 제국이 유토피아는 아니었 다.
법의 형태상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이들. 귀족들의 비리로 인해 받아 야 할 지원을 받지 못하는 변방의 마을들. 평화롭다 칭송되는 세상에 서, 이방인처럼 동떨어진 사람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제국의 높으신 분들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고...... 저는 무고 한 이들의 피를 못 본 척할 만큼 굳건하지 못합니다."
다른 세상에서 태어났다면 무언가 다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난 현재의 세상이 인류의 최선으로 만들어진 세상임을 알고 있었다.
그 최선이 악할지라도 최선은 최 선이었다.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에 책임이 있습니다. 이게 제가 해야 할 일입 니다."
카이사르의 붉은 눈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세계평 화를 도모하진 못할지언정 눈앞에 인간이 죽지 않게 지키는 것. 이것 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이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