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화
"아, 제가 쓸데없는 말을......•"
"되었다."
어쩌다 보니 높으신 분들 소리까 지 했다는 걸 깨닫고 정정하려는 것을 그가 저지했다. 내 대답을 들 은 카이사르는 무언가 깊이 생각하 는 기색이었다.
'설마...... 화난 건 아니겠지?'
표정이 얼굴로 드러나지 않으니
알 길이 없었다. 그의 생각하는 시 간이 길어져 내 온몸이 식은땀으로 가득해질 때쯤,
똑똑.
"대화 나누시는 중에 송구합니다 만, 기사단이 출정을 나갈 채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내겐 구세주와도 같은 테일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각하. 송구합니다만, 전 이 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일 어나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
까?"
슬슬 카이사르의 눈치를 보며 물 으니, 눈을 감고 수심에 빠져 있던 그가 느리게 눈을 떴다. 잠시 대답 이 없던 카이사르는, 제 커다란 손 을 펴더니 엄지에 끼고 있던 반지 를 빼내었다.
피가 고인 것같이 새붉은 루비 반 지였다.
"가져가라."
"••••••네?"
"백 골드가 마수 토벌 보상금으로 얼마나 터무니없는 금액인지는 잘
알 텐데. 애초에 루주 마을이 값을 지불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이게 공작가에서 주는 보상금이다."
입매가 굳었다. 날 향해 뻗어진 큰 손 위의 루비 반지를 내려다보 다 고개를 지었다.
"받을 수 없습니다."
" 왜지?"
나는 날 응시하는 붉은 눈을 올곧 이 마주했다.
"약속된 것은 백 골드니까요. 그 이상은 받을 수 없습니다."
받으면 근 몇 년간의 생활이 윤택 해질지도 모른다. 카이사르에겐 이 루비 반지가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을 테니, 이 거절이 어찌 나 미련한 짓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가 곧 백작가로 갈 테니까. 혼자 사는 데에 많은 돈은 필요 없어.'
아리아와 쭉 함께 산다면 잠시 고 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리아 는 백작가에 입양될 테고, 난 내 입에 풀칠만 하고 살아도 만족했 다.
내 입을 윤택하게 풀칠하고자 약 속되지 않았던 보상을 받는 건, 내 자존심도, 양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넌 정말 이상하군."
카이사르가 제 입을 가린 채 팔꿈 치를 허벅지에 얹고 상체를 굽혔 다. 그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감 정은 읽을 수 없을 만큼 미묘했다. 난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입가를 긁적였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엔 당연한 것을 모르는
이들이 너무 많지."
'카이사르...... 진짜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풍문으로 들어 상상하던 이미지와 는 너무 달라 괴리감이 들 지경이 었다.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옅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제 나가 보도록. 곧 출발해야 할 것 같으니."
"아. 네. 감사합니다."
가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 으로 여정 준비를 마친 기사들이
보였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국의 검에게 불멸할 영광을."
귀족들과 몇 번 일했던 경험을 살 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오기 전에 하울에게 급한 대로 배웠던 크리시스에게 하는 인사말을 뱉었 다. 카이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행운을 빌지."
나는 카이사르에게서 돌아서 응접 실을 나섰다.
여정을 떠날 시간이었다.
"루주 마을 마수 토벌에 미르가 지원했다고?"
원정대가 떠나기까지 30분을 남 겨 둔 시각에 용병 길드에서 들어 온 전보는 놀라웠다. 황궁으로 출 발하기 전에 제복을 차려 입던 카 이사르는 단추를 채우다 말고 미간 을 좁혔다.
"네. 미르 님께서 지원을 하셨다 는군요."
"칼이 미쳐 있는 그 용병왕 미르 가 말인가?"
"황금 방패 용병 중 미르라는 이 름을 가진 이는 검은 재앙이 유일 하니, 그 미르가 맞을 것으로 예상 됩니다."
공작가의 오래된 사용인으로서 평 정을 유지하는 데 도가 튼 테일러 조차 미르를 발언할 땐 조금 흥분 된 기색을 띠었다.
"그자가 왜?"
단추를 마저 채운 카이사르가 지 극히 합당한 의문을 제시했다.
루주 마을의 주민들은 순박한 이 들이었다. 그들은 검은 용 기사단 이 토벌을 도우러 온다는 소식에 폐만 끼칠 수 없다며 자기들 임의 로 토벌을 도와줄 용병을 모집하고 자 했다.
그들이 제시한 것은 황금 방패 용 병 한정, 보상금 백 골드. 지나치게 높은 조건에 터무니없는 가격이었 다. 변방에 사는 이들이라 수도 용 병들의 생리를 모르는 것이 분명했 다.
공작가 사람들은 이 의뢰에 아무
도 지원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 다. 이번 일로 크리시스 공작가와 연을 만들어 보려는 야비한 족속들 이 있을까 싶어, 용병 길드에 함부 로 크리시스의 이름을 거론하지 말 라고 단단히 일러두기까지 했다.
그런데 출발하기 직전에 용병왕 미르라는 거물이 뚝 떨어졌으니 놀 랍지 않을 수가.
"우선 공작가로 오라고 일러두었 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테일러가 조심스레 물었다. 카이 사르가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미르는 평소에도 가난한 마을들 의 마수 토벌을 돕는 걸로 유명하 니 허튼 마음을 품고 오는 것은 아 닌 듯합니다. 영웅에 용병왕이라는 별칭들이 괜히 붙은 건 아닐 겁니 다. 마수 토벌 분야엔 두말할 것 없는 일인자이니, 미르의 도움을 받으면 토벌에서 발생할 피해도 줄 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 만...... 그의 정체에 대해선 밝혀진 것이 없으니 조금 꺼림직하긴 합니 다."
테일러의 말은 모두 타당했다. 카 이사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용병 미르는 드래곤 같은 존재였 다. 마수 토벌에서 보이는 흉흉한 강함은 괴담처럼 전해져 왔으나, 유령이라도 되는 양 그의 정체를 아는 이가 전무했다. 그러는 한편 미르에게서 도움을 받은 가난한 마 을들은 미르에 대한 미담들을 쏟아 냈으니, 검을 잡는 이들에게 미르 는 존경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자기 발로 돕겠다고 오는데 거절 할 필요는 없지. 확실히 그가 참여 한다면 토벌이 한결 쉬워질 테니."
" 네."
"다만...... 그가 오면 응접실로 안
내해라. 내가 보고자 했다고 전해."
카이사르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 갔다. 테일러는 만사에 무심하던 그의 주인이 무언가에 관심을 가졌 음에 놀라워하면서도 노련하게 표 정을 정리했다.
"어떤 놈인지 궁금해졌다."
카이사르의 눈동자에 옅은 흥미가 감돌았다.
카이사르 크리시스에게 용병 미르
의 첫인상을 묻는다면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대답할 것이다.
기묘했다고.
허나 이는 그가 표현하는 것에 서 툴렀기 때문에 나온 대답일 뿐이 며,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용병 일을 하고 있는 미르입니다."
문을 열고 진분홍빛으로 반짝이는 두 눈과 마주하는 순간.
카이사르는 아주 깊은 곳에 있던,
삶 속에서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 낸 적 없는 무언가가 싹을 틔우는 것을 느꼈다. 본능이라 불리는 원 초적인 감각이 뒤틀리고, 직감이 미친 듯이 울려댔다.
달에 치인 것 같은(Moonstruck) 기묘한 느낌.
그의 생에 최초로 느껴 보는 격렬 한 감정이었다.
'눈동자가 붉은 계열이라고?'
처음 느끼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하 기도 잠시, 카이사르는 그 감정을
놀라움으로 치부하며 얼굴을 찡그 렸다.
제국엔 건국 신화가 있다. 이는 하늘에서 무질서한 대륙을 굽어보 던 태양신 라가 대륙을 평정하기 위해 세 마리 용을 땅으로 내려보 낸 것에서 시작된다.
지배의 권능을 가진 황금 용은 제 국을 세웠다. 그 황금 용의 후손은 현재 솔라티네 황가. 직계들은 대 대로 금발을 지닌다.
정화의 권능을 가진 은빛 용은 마 기에 물든 제국의 터를 정화했다.
그 은빛 용의 힘을 물려받아 신성 력을 운용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신전. 교황은 대대로 하늘색 머리 칼을 지닌다.
살육의 권능을 가진 검은 용은 적 들을 베어 제국을 지켰다. 그 검은 용의 후손은 현재 크리시스 공작 가. 직계는 대대로 붉은 눈을 지닌 다. 검은 용의 눈은 원래 파란색이 었으나, 과도한 살육으로 영혼이 마기에 물들며 눈이 붉어졌다는 것 이 전승이었다.
황가와 교황에게 이어지는 외향은 저잣거리 아이조차 알고 있다. 허
나 공작가의 직계만이 붉은 눈이라 는 것은 공작가나 황가의 직계, 교 황쯤 되지 않으면 모르는 사실이었 다. 크리시스가 대대로 마기에 물 들어 태어난다는 것은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제국 내 눈 색이 붉은 계열인 족 속은 크리시스 공작가의 피를 이은 이들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면 사이로 빛나는 미르 의 눈은 확연한 붉은빛을 품고 있 었으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설마••••••
카이사르는 머릿속을 스치는 말도 안 되는 가정에 미간을 좁혔다. 미 르가 슬며시 고개를 들 때쯤이 돼 서야 그는 정신을 다잡고 의자에 앉았다.
카이사르는 눈앞의 작은 인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미르가 몸집이 작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항 이지만 이렇게까지 작을 줄은 몰랐 다.
'뼈와 가죽만 남아서 서 있는 게 고작이잖아.'
왜 이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모 르겠다.
검은 잡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앙상한 손목. 못 먹고 자란 듯 작 은 키와 몸집. 가면에 가려져 있음 에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작은 얼 굴과 대체 몇 년을 입었을지 짐작 하기도 힘들 만큼 해진 망토.
잔뜩 긴장한 몸과 갈피를 잡지 못 하는 사랑스러운 분홍빛 눈동자까 지.
'......사랑스러워?'
카이사르는 조금 전 자신이 느꼈 던 감상을 되짚으며 눈썹을 꿈틀거 렸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너."
순진하게 깜빡이는 눈이 그의 속 에 있는 생소한 무언가를 건드렸 다.
"눈이 예쁘군."
"••••••네?"
평소답지 않은 간지러운 말을 뱉
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감, 사합니다."
어색하게 버벅거리는 것조차 사랑 스러운 것을 보니 미친 게 분명했 다.
"너를 찾은 건 묻고자 하는 게 있 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카이사르는 일렁이는 감정을 다잡 기 위해 차를 들이켜고 말문을 텄 다. 정말 궁금했던 것을 묻기 위해.
"왜 이 의뢰에 지원한 거지?"
" 네?"
"이전부터 궁금했을 뿐이다. 용병 미르는 돈 없는 마을들의 마수 토 벌을 돕는 영웅이라는데, 어째서 그런 일을 하는지."
인간은 이기적이다. 본성 자체가 그랬다. 세상의 더러운 면을 수없 이 마주한 카이사르는 영웅을 믿지 않았다. 이득 없이 사람을 돕는 일 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생에 딱 한 번 있긴 했지
만.'
딱 한 번, 정확한 이유 없이 사람 을 도운 적이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인생에 딱 한 번 있었던 일 이었다. 그런 미련한 짓을 반복하 며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 어도, 그에게는.
"넌 어째서 귀찮은 짓을 자처하 지?"
소드 마스터는 아주 쉽게 삶의 싫 증을 느낀다. 정상에 올라선 카이 사르는 만사에 공허함을 느꼈다. 그에겐 모든 것이 쉬웠으니까.
분명 미르 또한 그와 같은 소드
마스터로서 끝없는 허망함을 느꼈 을 터인데, 어떻게 그리 살 수 있 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그의 시선을 피하던 분홍 색 눈동자가 처음으로 카이사르를 올곧게 응시했다.
카이사르는 잠시 숨을 멈췄다.
오래 전부터 인간들은 눈이 그의 영혼이라고 여겨 왔다. 두 눈은 오 래 쳐다본 것을 고스란히 담기에, 검은 동공 아래엔 그의 생이 도사
리고 있다고 했다.
만약 그 말이 진실이라면, 미르의 영혼은 진탕에 잠겨 있을 게 분명 했다.
"열심히 살았고, 그러다 보니 강 해졌고...... 강해지고 나니 주위의 약한 자들이 보였습니다. 제국의 높으신 분들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 어 보였고...... 저는 무고한 이들의 피를 못 본 척할 만큼 굳건하지 못 합니다."
그에게 대답하는 잔잔한 눈동자엔 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지옥의 밑
바닥을 본 사람처럼 피와 재로 자 욱했다. 세상을 경험하다 못해 세 파에 찌들어 버린 여린 영혼이라 니.
차분히 죽어 가며 부패하기 시작 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믿을 수 없 을 만큼 선하게 반짝이는 두 눈은 모순적이 었다.
'어떻게 저러는 거지?'
카이사르는 지극히 정당한 의문을 품었다.
카이사르는 저런 눈을 하는 이들
을 간혹 만나 보았다. 밑바닥에 떨 어져 더 떨어질 곳도 없는 인간들 의 눈. 그들은 대개 오래가지 못하 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자들이 악에 겨워 발악하는 모습은 몇 번 봐 왔건만, 저런 눈 으로 선함을 말하는 이는 생소하다 못해 최초였다.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에 책임이 있습니다. 이게 제가 해야 할 일입 니다."
단순하고 미련하다. 그렇기에 찬 란했다.
그 자신과 지독히 다른 마음가짐, 정반대의 삶의 방식. 그럼에도 같 은 소드 마스터에 같은 붉은 계열 눈.
다르고 닮았다. 카이사르는 진정 으로 눈앞에 존재에게 마음이 요동 침을 느꼈다.
"아, 그, 제가 쓸데없는 말을
"되었다."
할 말은 다 해 놓고 뒤늦게 난감 해하는 미르를 제지하며 느리게 턱
을 괴었다. 그는 진심으로 눈앞에 있는 존재가 궁금해졌다.
" 가져가라."
"......네?"
크리시스 공작의 상징인 가주의 반지를 넘겨준 것도 순전히 그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낡고 해진 망토를 입은 미르는 누 가 봐도 가난해 보였다. 카이사르 는 그가 황급히 보석을 낚아채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받을 수 없습니다."
돌아온 미르의 대답은 예상했음에 도 놀라웠다.
" 왜지?"
"약속된 것은 백 골드니까요. 그 이상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미 련하고, 단순하고, 멍청했다.
'하지만 그래서......
마음에 든다.
카이사르는 이 무식하도록 올곧은
용병 나부랭이가 마음에 들었다,
카이사르는 손으로 제 입을 덮었 다. 이상하게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넌 정말 이상하군."
그의 중얼거림에 머쓱한 듯 입가 를 긁적이는 것까지 마음에 들었 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엔 당연한 것을 모르는
이들이 너무 많지."
깔끔하게 잘라낸 카이사르가 옅게
숨을 뱉었다.
"그래. 이제 나가 보도록. 곧 출 발해야 할 것 같으니."
"아. 네, 네. 감사합니다."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는 미르의 모습을 빤히 눈에 담았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국의 검에게 불멸할 영광을."
카이사르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귀족들의 인사말을 뱉는 미르를 보며 잠시 웃음을 참았다.
"행운을 빌지."
미르가 등을 보인 채 방을 나선 뒤, 카이사르는 한 가지 생각에 붙 잡혔다.
'저 재밌는 것을 어떻게 내 앞으 로 잡아오지.'
바야흐로, 39년 동안 모든 것에 무심하던 카이사르 크리시스가 호 기심을 요동치게 만드는 존재를 만 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