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화
테일러의 안내를 따라 나온 마당 엔 여정 준비를 마친 기사들로 가 득했다. 내가 들어섬과 동시에 떠 들썩하던 주위가 고요해지고 시선 이 집중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토벌을 함께하 게 된 용병 미르입니다."
쏟아지는 시선 사이에서 어색하게 인사했다.
"미르 님이십니까?"
갑옷으로 무장한 중년의 남성이 타고 있던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내 앞에 섰다. 강직한 갈색 눈동자 에 익숙하지 않은 호의가 가득했 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허 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영응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 다. 검은 용 기사단의 기사단장, 파 르베 로만입니다."
기대하지 않은 정중한 인사에 당
황하며 황급히 허리를 마주 숙였 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 립니다."
'작은 마을 마수 토벌을 돕는데 기사단장까지 참여한다고?'
조용히 놀랐다. 루주 마을은 수익 도 얼마 내지 못하는 가난한 마을 이었기에 기사나 대여섯 명 정도나 딸려 보내고 말 거라고 생각했건 만. 정말 공작이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마수와 마주해 본 경험이 전무한 기사들도 많아서 이번 마수 토벌에 염려가 많았습니다만, 미르 님께서 동참해 주신다니 참으로 안심입니 다. 미르 님은 마수 토벌에 있어 일인자이지 않으십니까."
"......과찬이십니다."
"겸손하기까지 하시군요. 사실 개 인적으로 미르 님과 정말 만나 보 고 싶었습니다. 제국 내에서 크리 시스 공작님께 대항할 수 있는 검 사는 아인하르트 후작을 제외하곤 미르 님뿐이라고 다들 입 모아 말 하니 말입니다."
"제가 어찌 공작님과......
"얼마 되지 않는 보상금만 받고
가난한 마을들을 도우신다는 걸 듣 고 정말 본받아야 할 기사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부끄러워......
과묵하고 엄격한 인상의 기사단장 은 엄한 표정으로 날 칭송했다. 끊 임없는 칭찬 세례에 얼굴이 홧홧해 졌다.
분명 기사들은 용병들을 돈 밝히 는 쓰레기로 생각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다가올 악의에 단단히 각오 하고 왔건만, 기사단장까지 나서서 호의를 퍼부으니 어떤 반응을 보여
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 로만 경. 좋은 말들 감사합 니다만, 이젠 토벌이 어떻게 진행 될지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쏟아지는 칭찬과 주위의 수군거림 에 견디다 못해 한마디 하자, 여전 히 엄한 표정으로 탄식을 뱉은 파 르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제 감정에만 집중했군요.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토벌 계획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로만 경께서 직접 설명해 주 십니까?"
'보통 용병 나부랭이한테 설명해 주는 일은 말단 기사가 맡지 않 나?'
의문 서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 보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다른 놈들에게 넘기면 기사단장이 된 보람이 없 죠."
" 2"
"미르 님께서 만나 보셔야 하는 분이 계십니다. 가는 길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에 갸 웃하면서도 잠자코 파르베를 따라 갔다.
"이동은 말과 공간 이동 마법진을 번갈아 사용하려 합니다. 마법사 다섯이 동행해서 마법진을 발동시 킬 겁니다. 오늘은 수도와 루주 마 을의 중간 지점인 숲으로 공간 이 동해 그곳에서 야영을 하고, 다음 날은 마법사들의 마력이 회복되기 전까지 말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마법사들이 회복을 마치면 한 번 더 공간 이동을 이용해 루주 마을 로 가게 될 겁니다."
공간 이동은 상당한 마력을 소모 하는 고위 마법이다. 대략 서른 명 쯤 되어 보이는 토벌단을 머나먼 루주 마을로 이동시키려면 마법사 다섯이 붙어도 죽어날 테니, 하루 쉬었다 가는 것은 현명한 계획이었 다.
"토벌단의 수가 조금 적어도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동행해 주 시는 한 분께서 정신계 마법의 귀 재시거든요. 그분께서 마수들을 혼 동시켜 주시면 토벌이 한결 쉬울 겁니다."
'정신계 마법사?'
나는 그의 말에 원작에서 정신계 마법을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었던 인물 하나를 떠올렸다.
"원래는 함께 갈 계획이 없었지 만......
"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계속 가시 죠."
어두워지는 파르베의 안색을 보며 의아해하자 그가 황급히 고개를 저 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은 누굽니 까?"
복잡한 생각들을 지우려 고개를 휘젓고 물었다.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한 그가 긴장한 듯 낯을 굳혔다.
"......도착하실 시간이군요. 직접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화악!
일순 커다란 마력이 응집하며 마 당 일대를 진동시켰다. 붉은 연기 가 터져 나왔다.
'침입인가.'
스릉.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재빠르게 검을 발도하자 파르베가 황급히 날 제지했다.
"적이 아닙니다! 검을 넣어 주십 시오!"
파르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 다. 감이 이상하게 울렸지만 일단 적이 아니라 하니, 난 얼굴을 일그 러트리면서도 검을 도로 집어넣었
다. 누군가 공간 이동 장치를 사용 한 것 같았다.
"누가 온 겁니까?"
"나 말인가?"
뚜벅뚜벅.
낮은 목소리가 파르베를 대신해 대답했다. 붉은 연기를 가로지르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모 습을 드러냈다.
붉은 연기에 휘날리는 짧고 검은 머리카락. 카이사르와 소름 끼치게 닮은 얼굴. 미의 신이 영혼을 담아
빚은 듯 숨 막히는 외모와 소름 끼 치게 번뜩이는 핏빛 눈동자.
"오셨습니까, 칼 도련님."
굳은 듯 멍해진 내 옆에서 파르베 가 잔뜩 긴장한 채 예를 갖춰 허리 를 숙였다.
그러니까 이 인물은, 크리시스 공 작가의 첫째 아들이자, '요정의 밤' 의 남주인공 중 하나이며, 내 이복 오라비.
칼 하이마 드 카이사르 크리시스 였다.
' 미친.'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칼 크리시스는 내가 가장 만나기 싫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요정의 밤'에선 역하렘답게 남주 인공들이 다수 등장했다. 남주인공 은 총 다섯. 작가가 남주인공들의 캐릭터성이 겹치지 않도록 노력한 듯 남주인공들은 하나하나가 다 독 특했다.
그중 남주인공 칼 크리시스는, 등 장할 때마다 소설의 장르를 스릴러 로 만드는 장르 파괴자였다.
'어떻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까. 네 정신을 조종해...... 미치게 만들 어 버리면. 넌 나만 볼까? 대답해 봐, 아리아 프레이야.'
'네 사랑 따위 필요 없어. 난 널 손에 쥐기만 하면 되거든.'
'요정 혼혈이라니, 재밌군. 장기의 구성은 인간의 것과 똑같은가? 궁 금한데......
그는 말 그대로 미친놈이었다.
사실 칼을 남주인공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가 아리아에게 품은 감정은 사랑 처럼 달콤한 것이 아니라 재밌는 장난감을 보는 것 같은 광기 어린 흥미와 소유욕이었으니까.
'아리아가 칼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지.'
그래도 좋아하긴 하는 건지 아리 아를 직접적으로 해한 적은 없었지 만, 만날 때마다 광인의 눈을 하고 선 자기 흥미만 풀어 댔으니 원작 의 아리아는 칼을 버거워했다.
'내가 공작가에 오지 않은 큰 요 인 중 하나가 이놈이지.'
정말 웬만해선 아리아와 칼이 마 주치지 않게 하고 싶었다. 아리아 가 조금도 힘들지 않기를 원했으니 까.
"마탑에서 돌아오자마자 출발하셔 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피곤하진 않 으십니까."
"쓸데없는 걱정을."
멍한 날 사이에 두고 파르베와 대 화를 나누던 칼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생각보다 정상적인데?'
그와 눈을 맞추며 의외의 인상에 눈을 끔뻑거렸다.
'마기에 물든 것처럼 사악하게 번 뜩이는 붉은 눈동자. 광기 스민 소 름 끼치는 눈빛이라더니.'
소설 내 칼은 정신 고문을 취미로 삼고, 범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를 넘어선 미친 새끼였다.
허나 현재 내가 마주한 칼은 냉랭 해 보이긴 해도 광인의 기색은 보
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데......
예상과 상이한 상황에 눈을 가늘 게 뜨며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분명 그는 정상적으로 보였으나, 위험한 사람을 만나면 예외 없이 울리는 직감이 살짝 울리고 있었 다. 직감상 내게 위험을 끼칠 이는 아니나, 그라는 사람 자체가 위험 한 사람이었다.
'파르베는 왜 저러는 거지.'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문득 파르베 의 안색이 무척 좋지 않다는 걸 깨 달았다. 그의 공포 서린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다, 칼의 지긋 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이 자가 미르인가?"
"네! 미르 님이십니다."
카이사르와 똑 닮은 눈동자가 날 날카롭게 해부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공자님을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 니다. 용병 미르입니다."
"너."
날 응시하는 칼의 눈빛이 일렁였 다. 먹잇감을 잡은 듯 번뜩이는 눈 동자엔 광기와 비슷한 흥미를 담고 있었다. 순간 섬찟 소름이 돋아 본 능적으로 살기를 흘리니, 기묘하던 기색을 지운 칼이 혀를 찼다.
"키가 작다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 다 훨씬 작군. 못 먹고 자랐나?"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닙니 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땅딸막해서 는 뼈랑 가죽만 남아서 서 있는 게 고작인데."
훅 들어오는 공격에 울컥하여 반 박하니 그가 코웃음을 쳤다.
'이 새끼가?'
분함에 이를 악물었다. 습관처럼 검집에 손을 댔으나, 여기서 검을 꺼냈다간 조져지는 건 나뿐이었기 에 재빨리 손을 내렸다.
"저 같은 것을 걱정도 해 주시고, 아주 다정하십니다."
애써 썩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날 응시하던 칼이 휙 고개를 돌렸 다. 왜인지 그의 귓가가 붉었다.
"바로 출발하지. 준비는 마쳤나?"
"준비는 마쳤습니다. 마법사들이 공간 이동 마법진만 완성하면 출발 하려 합니다."
' 어?'
"......크리시스 공자님께서도 토벌 에 함께 가십니까?"
설마 싶어 물었다. 파르베가 고개 를 끄덕였다.
"네. 제가 말한 정신계 마법사가 바로 도련님이십니다."
' 미치겠네.'
칼과는 엮이고 싶지 않았건만. 계 속 일이 꼬이는 느낌이었다.
"공자님께서 함께 가시기엔...... 여정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평범한 귀족들은 마수의 '마'도 모르고 안전하게 살아간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정신계 마법사라 한 들, 공작가의 공자가 가난한 마을 의 토벌을 도우러 갈 필요는 없었 다.
그런데 내 질문을 오해한 건지, 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칼의 심 기가 불편함을 본 파르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왜, 귀하게 자란 공작가 도련님 은 함께 가면 도움 안 되는 짐만 될 거라고 생각하나?"
" 네?"
칼의 자존심이 건드려진 모양이었 다. 귀족 모욕죄로 경을 치기 딱 좋은 소리였기에 황급히 부정을 표 하며 정중히 사과했다.
"오해십니다. 보통 귀족들은 이런
일을 천히 여기는데 공자님께서 함 께하신다고 하니 놀라웠을 뿐입니 다. 공자님께서 뛰어난 마법사시라 는 것은 이미 들은 바 있습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내가 만나 본 칼은 놀랍게도 미치 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정상적인 건 또 아니었기에 말 한 마디 한 마디 가 조심스러웠다. 알 수 없는 눈으 로 나를 바라보던 칼이 휙 고개를 돌렸다.
"......루주 마을이 피해가 상당하 다기에 직접 살피러 가는 것뿐이 다."
칼의 대답을 들은 파르베의 얼굴 위로 어이없다는 기색이 범벅되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잘못 본 건가 싶었다.
'......공자인데도, 영지의 피해를 살피러 간다고? 나쁜 놈은 아닌 가?'
아리송해 고개를 기울였다. 현재 칼은 원작 칼과의 괴리감이 심했 다. 보이기엔 무뚝뚝해도 선한 사 람으로 보였으니 혼란에 빠질 수밖 에 없었다.
"쯧. 실없는 놈."
멍하니 생각만 하고 있으니 혀를 찬 칼이 자기 어깨로 내 어깨를 밀 치고 나아갔다. 몸이 살짝 밀렸다.
'••••••뭐지?'
시비와도 같은 그에 몸짓을 따라 어깨에서부터 시원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부딪치는 순간 칼이 마력 을 방출한 것 같았다.
'저주는 아닌데?'
지쳐 있던 몸에 생기가 돌고 기력
이 생겨남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으 니, 파르베가 슬쩍 내게로 다가왔 다.
"예전부터 도련님께서 미르 님을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 2"
"자신은 축복 마법이랑 안 맞는다 며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으시는 데...... 껄끄러움도 감수하고 미르 님께 축복을 걸어 주신 걸 보면 미 르 님을 정말 좋아하시는 모양입니 다."
'날 좋아한다고?'
믿기지 않는 말에 미간을 좁히면 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 용병으 로 이름을 알리며 날 추종하는 이 들이 없잖아 생겼기 때문이었다. 칼도 그중 하나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그냥...... 불쌍해서 좀 관심을 준 정도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칼이 '정말' 나 를 좋아했을 리는 없기에, 파르베 의 과장으로 치부하고 생각들을 지 워 냈다.
"기사단장님! 마법진이 완성됐습
니다! 곧바로 출발할 수 있다고 합 니다."
"그렇다는군요. 바로 출발해도 괜 찮으시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곤 파르베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