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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7화 (17/254)

17화

거대하게 그려진 마법진 안엔 기 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 가운 데 선 칼의 지긋한 시선이 날 따라 오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마력을 모았다. 주변으로 마력이 응집되는 것이 느껴졌다.

" 텔레포트!"

세찬 바람과 함께 공간이 뒤틀렸 다.

공간 이동 특유의 역한 느낌과 함 께 눈을 뜨자 우거진 숲이 보였다. 주위에 위험한 것이 있는지 재빨리 살핀 뒤 파르베를 돌아보았다.

"여긴 어딥니까?"

"트라슈 지방의 산입니다. 오늘 부지런히 움직이면 하르텐 산에서 야영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른 오후쯤 트라슈 지방에서 출 발한 것이었는데 저녁이 돼서야 하 르텐 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르텐 산 부근부터는 북부 한파 의 영향을 받아 온도가 확연히 낮 아졌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기모가 있는 검은 망토를 꺼내 입을 때 칼 이 검은 옷밖에 없냐고 한마디 한 것을 제외하곤 이동 중 별일 없었 다.

"여기서 야영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해가 산등선 너머로 기울기 시작

할 무렵, 주위를 살펴본 파르베가 야영 위치를 잡았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터 자체는 괜찮지만......

주위 나뭇잎을 확인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 더 가서 짐을 푸는 게 어떻 겠습니까."

"음? 이유가 있습니까?"

파르베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으로 물었다. 칼도 덩달아 날 돌아 보았다. 기사들이 내게 시선을 집

중했다.

"자세히 보면 주위 나무들의 잎이 은은히 붉은빛을 띱니다."

"정말...... 그렇군요."

"하르텐 산에 가장 많이 서식하는 마수 키피라가 자주 머무는 곳은 나뭇잎 색이 붉게 됩니다."

사람들이 놀란 듯 입을 벌리며 금 시초문이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세세한 것들은 마수 토벌에 오랫동 안 종사한 용병들이나 아는 정보였 으니 그들이 모르는 건 당연했다.

키피라는 무리를 지어 사는 야행 성 마수였다. 날개를 펄럭일 때마 다 환각을 일으키는 붉은 가루를 날리는 탓에 그들의 서식지 주변 나무들은 나뭇잎이 붉었다.

'키피라쯤이야 처리하기 쉽지 만...... 괜히 피해를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까.'

"붉은빛의 농도가 옅은 걸 보니 그들의 주 서식지에선 많이 벗어난 것 같습니다만. 조금만 더 가면 아 예 서식지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안장 위에서 몸을 일으켜 나뭇잎 을 하나 따다 만지작거리는데, 사 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내게로 향했 다. 나는 떨떠름하게 눈을 깜빡였 다.

"어...... 제가 너무 주제넘었습니 까?"

"아.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토벌을 나 서기 전에 마수를 꽤 연구했음에도 처음 듣는 정보라서 말입니다. 대 단하시군요."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서야 알아 내기 힘든 정보입니다. 이게 제 일 이니 당연합니다."

나는 담담히 대답하곤 고삐를 살 짝 당겼다.

"조금만 더 가 보죠. 곧 적합한 장소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렇게 10분쯤 이동했을까, 나뭇 잎이 정상적인 빛을 띠는 평지에 도착했다. 주위에 바위도 적어 뱀 형태의 마수들도 없을 것 같았다.

그곳에 기사들을 도와 막사를 쳤 다. 도우려고 다가가기만 해도 기 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하니 조금 당 혹스럽긴 했지만. 무제한 아공간

주머니에서 툭툭 튀어 나오는 물건 들을 배치한 뒤엔 어느덧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야영진 중심에 모닥불이 피워졌 다. 나는 무리에서 떨어진 외딴 바 위 위에 앉아 멍하니 불길을 바라 보았다.

"먹지 그래."

"아, 감사합니다."

기사들이 배식받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을 때, 성큼 다가온 칼이 내게 스튜가 담긴 그릇을 건 넸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에 털

썩 주저앉은 칼의 손에도 스프가 들려 있음을 확인한 나는 조금 떨 떠름하게 물었다.

"......공자님께서도 이걸 드십니 까?"

"난 혼자 스테이크라도 썰 줄 알 았나?"

솔직히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봐 온 귀족들은 죄다 평민과 같은 것 을 먹으면 죽는 줄 아는 개복치들 이었으니까.

내 표정에서 은근한 긍정을 읽은 건지 칼이 한숨을 쉬었다.

"날 어떤 인간으로 생각한 건지 모르겠군. 야영에서 혼자 호화를 즐길 정도로 되먹지 못한 놈은 아 니다."

'원작의 넌 그런 되먹지 못한 놈 이었어......

원작 칼의 만행을 떠올리며 입꼬 리를 늘어뜨렸다. 일하는 중인 만 큼 괴리감을 잊으려 노력하고 있지 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칼은 원작과 너무 달랐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그 미친 칼이 여태껏 미친 짓을 한 번도 벌이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 나.'

칼이 토벌에 함께한다는 사실을 들은 뒤 사지 멀쩡히 돌아가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건만, 이건 예상과 너무 달랐다.

'칼이 미치지 않았다면 다행이지 만......

"용병이 아니라 학자인가? 하루 종일 생각만 하는 것 같군."

"......아."

칼의 비꼼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희미하게 퉁명스러운 기 색이 보였다.

" 심심하십니까?"

"내가 5살 먹은 어린애로 보이 나?"

설마 싶어 물으니 조금 발끈한 기 색을 보인 그가 사납게 대답했다.

'안 놀아 준다고 토라진 어린애 같은데......?'

나는 뒤늦게 칼이 말을 붙이고 싶

어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칼에게 서 보리라곤 상상치도 못했던 풋풋 한 행동이었다.

'하긴. 이제 겨우 19살이니까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칼은 내 오라비였으나, 이제 겨우 19년을 산 그가 전생을 떠올리며 도합 5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게 된 나보다 어른스러울 리 없었다. 툭하면 사람을 미치게 만들던 원작 의 칼이 상당히 이상했을 뿐, 정상 적인 19살이라면 이러는 게 맞았

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다만 제 가 꽤 심심해서...... 괜찮다면 공자 님께서 저와 어울려 주셨으면 합니 다. 혹시 제게 궁금한 건 없으십니 까?"

고민은 뒤로하고 처음 만난 오라 비와 어울려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칼을 돌아보 았다.

잔잔히 불타는 모닥불. 쌀쌀한 겨 울밤의 정취. 코를 간지럽히는 칼 의 나긋한 체향. 무리와 떨어져 앉

은 탓에 멀리서 들려오는 떠드는 소리를 제외하곤 주위가 고요했다. 조금 노곤해져 답지 않게 몸의 긴 장을 풀었다.

"......넌 어쩌다 용병이 되었지?"

마찬가지로 조금 노곤해진 기색의 칼이 느리게 물었다. 캐물으려는 기색도, 내 정체를 알아내려 하는 기색도 아니었기에 난 문득 정말 순수하게 용병이 된 이유를 생각하 게 되었다.

"돈 때문이었죠."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아주 단순했으니까.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싶었습니 다.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돈을 버는 것밖에 없더 군요."

새삼스레 심장이 아려 왔다. 나는 사랑하는 것이 죽어 간다는 끔찍한 무력감과 자괴감 속에서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 그 의미 없는 발버둥 에 아리아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했고, 그 의미가 날 살아가게 했다.

적어도 검을 휘두를 때만큼은 내 가 하늘 아래 끈질기게 살아 있음 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음을 실 감할 수 있었다.

"전 이 일을 살아갈 이유로 삼았 던 것 같군요."

그랬다. 난 아리아를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을 살아갈 이유로 삼았 다.

어쩌면 피로 물들어 검은 핏자국 으로 가득한 미르라는 이름이 날 살게 했을지도 몰랐다.

"그렇군."

담담한 긍정이 돌아왔다. 몰이해 도, 과한 공감도 아닌, 지극한 무덤 덤함.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 들 어서도 안 되는 완벽한 타인의 삶 에 다만 긍정만을 표하는 칼의 태 도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불 편하지 않은 정적이 이어졌다.

"돈을 벌기 위해 용병 일을 시작 했다고."

"......네."

"그럼 왜 영웅이 된 거지?"

'그러게. 왜 영응이 됐을까.'

스르륵 눈을 감았다.

이런 돈도 안 되는 일, 그저 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실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기 때 문입니다."

한 사람의 얼굴이 내 머릿속을 스 쳐 지나간다. 한없이 빛나던 내 이 상향. 내가, 상실해버린 이. 떠올리 는 것만으로도 내 속에 무언가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슬픔을 억누른 눈으로 칼을

마주했다.

나는 소중한 것을 상실하는 것이 지독히 두려웠다. 상실을 느껴 본 적이 있었기에, 떠나간 소중한 이 를 그리워하고, 지나간 과거를 끝 없이 후회한 적이 있었기에 그 고 통을 앓았다.

누군가의 빈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울 수 없다. 빈자리는 영원히 빈 자리일 뿐이고, 채워지는 것은 다 른 자리이다. 소중한 것을 상실한 다는 건, 삶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빈칸 하나를 만드는 것과 똑 같았다.

나는 이를 알았기에, 다른 사람들 이 상실을 겪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마수에게 덧없이 죽어갈 수많은 이들은 누군가에겐 소중한 사람이 겠죠. 저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누 군가를 잃는 걸 보고 싶지 않았습 니다."

내 대답에 칼의 눈빛이 일렁였다. 마치 기묘한 무언가를 보는 것 같 은 눈동자였다. 한참 동안 무언가 를 생각하던 그가 느리게 입을 열 었다.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삶은 어떻지?"

목소리에 묻어나는 것은 지독한 무지였다. 그는 사랑을 몰랐다.

칼은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사랑 을 몰랐고, 굳이 알려 들지 않았다. 사랑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그 는 태어나기를 그러했다.

그랬던 그가 내게 사랑을 물은 것 은 상당히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 었다.

내가 살아온 삶을 천천히 되새긴

다. 아리아를 살리겠다는 일념 아 래 치열하게 살아왔던 삶을. 아리 아는 설원에서 아스라이 사라진 그 사람처럼 되게 하지 않으려 노력했 던 시간들을. 사랑도, 생도 버거웠 던 순간들을.

상념을 애써 지우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 절망스럽습니다."

"절망스럽다?"

"네. 끔찍이 절망스럽습니다. 힘 겹고 버겁습니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만 큼 괴롭습니다. 상실이, 두렵습니

다."

내 사랑은 늘 진탕을 뒹구는 칠 흑. 내 오러를 닮은 색이었다.

"다만...... 그 절망은 사람을 살아 가게 합니다."

절망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 고, 실제로 많은 이들을 죽이지만, 어떤 이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생의 의미를 찾는다. 독약과 약은 늘 한 끝 차이였다.

"그 절망을 꾸역꾸역 끌어안고, 어찌되었건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행복해지더군요•"

절망을 버티다 보면 살아 있는 것 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행복해지는 순간이 왔다. 죽지 않고 버텼기에 느낄 수 있는 행복이었다.

"그냥,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했다 는 자각이 들어 황급히 말을 마쳤 다. 칼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표정도 읽기 힘들어 내가 그의 신 경을 거슬렀던 건 아닌가 걱정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신기하군."

나와 눈을 맞춘 그가 느리게 웃었 다.

"나도, 날 그렇게까지 사랑해 주 는 사람을 만나 그렇게까지 사랑해 보고 싶군."

아마 이때였을지도 모른다.

칼 크리시스가, 자신의 동생 카슈 미르 크리시스를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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