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화
" 텔레포트!"
공간이 뒤틀리고, 새로운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드디어 루주 마을이었다.
"......세상에."
펼쳐진 마을의 광경 아래 모두가 말을 잃었다.
"라이시여......
누군가 신을 불렀으나 대답은 없 었다. 자애로운 태양신이 등을 돌 려 버린 것 같은 이곳엔 침묵만이 가득했다.
무너진 건물보다 성한 건물을 찾 아보기가 더 어렵다. 피비린내와 재 냄새가 자욱하고, 새하얀 눈에 뒤덮인 폐허는 비참했다.
무언가 거대한 것들이 짓밟고 간 것만 같은 혼적들.
살아 있는 존재가 살아가고 있다
는 것이 믿기지 않는 공간이었다.
"토벌단 나으리들이시군요!"
모두가 할 말을 잊고 주위를 살필 때, 폐허 한편에서 한 무리가 우르 르 몰려왔다. 그 무리의 수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일어나십시오, 어르신!"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저흰 모 두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방울진 눈물을 뚝뚝 흘리는 노인 의 볼은 패여 있었고, 몸은 뼈가
보일 만큼 야위어 있었다. 모두 참 혹한 얼굴로 쉬이 말을 잇지 못했 다.
'수도 기사들에게 이런 광경은 처 음이겠지.'
북부와 한참 떨어진 수도엔 마수 의 침범이 없었으니, 마수는 그들 에게 먼 나라 얘기였을 것이다. 그 들이 마수에게 짓밟혀 폐허가 된 마을에 충격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거운 침묵 사이, 혼자 덤덤한 내가 찬찬히 마을의 상태를 살폈
다.
'그래도 성한 건물이 꽤 남았고. 싸움이 가능한 사람도 몇몇 있네. 무기도 있긴 하고.'
마을을 한 번, 몰려온 무리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래도 마을의 구 색은 갖추고 있었고, 경비대처럼 보이는 장정 무리는 모두 무기를 쥐고 있었다.
'이 정도면 최악은 아니네.'
마수의 습격으로 돌 위에 돌 하나 얹히지 않은 완벽한 폐허에서 임시
움막을 짓고 살아만 있는 경우도 본 사람으로서, 놀랄 것은 없었다.
내게는 인생의 일부인 익숙한 상 황이었다.
"바닥이 찹니다. 일어나시죠."
손을 뻗어 노인을 일으켜 주고 짧 게 허리를 숙였다.
"의뢰를 받고 찾아온 용병 미르입 니다."
무리 일대에 소란이 일었다.
"......미르? 그 용병왕 미르 말인 건가?"
"미르가 왔다고?"
열댓쯤 되어 보이는 야윈 남자들 이 놀란 얼굴로 수군거렸다. 믿기 지 않는다는 눈으로 날 힐끔거리는 그들에게 못을 박아 주었다.
"황금 방패 용병 미르입니다."
내 이름을 도용하는 용병들이 꽤 많다고 들었으나, 황금 방패라는 등급까지 위조할 순 없었다. 내 확 언에 내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은 노인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와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 다! 이번 겨울에 꼼짝없이 모두 죽 는 줄 알았는데...... 미르 님께서 와 주셨다니 안심입니다!"
안도가 어리는 노인의 얼굴에서 안심과 부담을 함께 느꼈다. 영웅 이란 거창한 칭호가 붙은 뒤론 어 깨에 생명들을 진 기분이었다. 날 향한 믿음과 기대들. 이제는 익숙 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무거웠다. 가끔은 이 부담을 벗고 도망치고 싶었으나.
"이제 마음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이후부턴 누구도 피 흘리지 않을 겁니다."
난 이것을 지고 갈 것이다. 이것 이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피를 흘 리는 건 나 혼자로 충분했다.
엉엉 울기 시작한 노인을 간신히 달래고 마을로 들어섰다. 자신을 이 마을의 이장 허베라고 소개한 노인이 우리를 마을 사람들이 모였 다는 광장으로 이끌었다.
"오, 라이시여......
몇몇 기사들은 이 광경을 보지 못
하겠다는 듯 두 손에 얼굴을 묻었 고, 어떤 이들은 눈물을 훔쳤다.
오십여 명이 넘을까 싶은 적은 수. 아이고 어른이고 끔찍한 상처 를 달고 있었고, 사람들의 영양과 위생 상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 욱 "
티를 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한 것 같았으나. 결국 고개를 튼 채 제 입을 틀어막은 칼의 표정엔 충 격이 담겨 있었다.
'......처음 보겠지.'
공작가의 공자로 태어난 그가 이 런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을 리 없 었다.
아무 말 없이 망토를 벗어다 칼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붉은 눈동 자가 내게로 향했으나, 나는 그저 광장만 바라보았다. 검은 와이셔츠 위로 불어오는 눈 섞인 바람이 유 난히 차가웠다.
"저희 마을이 원래부터 이랬던 것 은 아닙니다. 마수의 습격으로 척 박하고 고되긴 했었지만...... 대부 분 작은 마수들의 습격이었기에 마
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뭔가 이상했습니다! 마수들이, 마수 들이 미친 것 같았습니다!"
'전쟁이 다가오고 있구나.'
마수들의 난폭화. 원작에서도 명 시된 내용으로, 전쟁의 전초전과 같은 현상이었다. 다가오는 재앙을 새삼 실감하며 입술을 앙 물고 이 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원래라면 조금만 겁을 줘도 도망 갈 놈들이 피에 미친 괴물처럼 사 람들에게 달려들고 농장에 침범해
작물들을 헤집어 놓았습니다! 그래 도 근근이 버텼는데...... 일주일 전 에, 으흑...... 데베라가 마을을 침 범했습니다!"
"데베라요?"
미간을 구겼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데베라. 지옥에서 기어오는 사냥 개. 개의 시체에 마기가 깃들어 언 데드가 된 상태로, 몸집도 거대하 고 성정이 난폭한 마수였다.
'다만 상당히 희귀해서 보기 힘든 데......•'
데베라의 개체수가 많았다면 생태 계가 박살나고 인간들도 멸종했을 게 뻔했으나, 신의 안배인지 북부 끝 부근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마수였다. 데베라가 제국까지 넘어 오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네! 데베라 세 마리가 침범해 마 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때 싸움이 가능한 청년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어서 전투 도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허베의 표 정이 처참했다.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에게 아무 말 없이 손수 건을 건네주었다. 주변 공기가 무 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니...... 제발, 도와주십시 오."
처절한 간청이었다.
토벌단이 충격에서 벗어나고 나선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였다. 기사들 은 보급품을 배급하고 무너진 건물 들의 재건을 도우며 우리가 묵을 막사를 준비했다. 마법사들은 공간
이동 이후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 음에도 자진해서 마을 주위에 방어 막을 쳤다.
그 가운데 나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교육을 시작했다.
"마수와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오 면 절대 먼저 공격해선 안 됩니다. 지금의 여러분은 마수를 이길 수 없어요. 섣불리 공격해 봤자 마수 만 흥분시킬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날개가 달린 마수를 만나면 무조 건 물로 뛰어드세요. 날개 달린 마 수는 날개가 젖으면 날지 못하니
물을 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몸 집이 작은 마수들의 경우, 그 자체 론 그렇게 위험하지 않으나 이빨이 나 발톱 등에 독을 품은 경우가 많 습니다. 해독제는......
주위 마수들을 토벌하면 한동안은 괜찮겠지만 마수의 씨를 말리는 건 불가능한 노릇. 이곳에 살아가는 한 이들은 마수와 공존해야 했다.
'맞서 싸울 방법을 알려줘도 소용 이 없으니까.'
모두 검을 들기조차 힘든 이들이 다. 싸워서 이기는 건 기적에 가까
웠다. 용병으로서 일하던 경험들을 총동원해 살아남는 방법에 대하여 말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적어 가 면서까지 열심히 경청했다.
"공자님은 어디 계십니까?"
교육을 마치고 기사들이 짐을 나 르는 걸 도와준 뒤 한숨을 돌리는 데 주위에 칼이 보이지 않았다. 마 침 옆을 지나가던 파르베에게 물으 니 그가 마을에서 그나마 제일 성 한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 중환자들이 머무는 병동에 계십니다."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던데.'
조금 전 칼의 상태가 떠올라 걱정 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낡고 작은 건물의 문을 열었다.
공기 중에 드리운 죽음의 향기. 소독약 냄새와 피비린내. 어린아이 부터 노인까지 수많은 이들이 상처 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 데......
코끝에 스미는 죽음의 향기에 호
흡을 참았다. 여전히,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은 보기 괴로웠다. 죽음 을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악몽이 있었기에.
새하얀 눈이 뒤덮인 설원과, 설원 위로 퍼지는 붉은 피.
그 중심에,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한 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 해지는 기분이다. 나는 잠시 숨을 참고 생각을 지워내려 노력했다.
'죽음에 무뎌지지 않은 것은, 내
가 아직 인간이란 증거겠지.'
인간은 죽음에 대해 무뎌질 때 비 로소 괴물이 되기 시작한다. 아직 그 정도가 아닌 게 다행이었다. 나 는 숨 막히는 공기를 느끼며 주위 를 살폈다.
불이 꺼진 병동 안을 오직 달빛만 이 비추었다. 창가에 앉은 소년의 초점 없는 붉은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공자님."
그는 창가 곁 병상에 누운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의 반을 붕 대로 두른, 열 살은 될까 싶은 어 린 소녀.
재앙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찾아 왔다.
"몰랐다."
"이렇게...... 심각할 줄 몰랐다. 나는, 마수가 인간의 생을 이렇게 까지 파괴해 놓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 줄, 몰랐다."
더듬거리는 칼의 동공이 쉴 새 없
이 떨리고 있었다. 초점이 사라진 눈에 죄책감이 물들었다.
순간 인위적인 듯한 이상한 느낌 이 들긴 했지만, 그렇게 당당하던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는 안쓰러움 에 생각을 지워 냈다.
'모를 수밖에.'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존재하는 법. 허나 칼은 위대한 태양 제국의 가장 따사로운 볕이 드는 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볕에서 만 살아온 이들은 그림자의 존재 자체를 모르곤 했다.
나는 빛 한 점 없는 그늘 아래 서 서, 달빛을 받아 빛나는 칼을 멀찍 이 바라보았다.
죽음의 향기가 자욱한 이곳은 칼 의 세계가 아니다. 그는 마음만 먹 으면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었 다.
그럼에도 칼의 눈엔 혼란이 담겨 있었기에. 그의 산호색 입술이 떨 리고 있었기에. 그의 손끝이 답을 찾아 방황하고 있었기에. 내게로 향하는 붉은 눈동자가 간절했기에.
그가 이 재앙을 자신의 일이 아니 라는 이유로 외면하지 않았기에,
나는 그에게 손을 뻗을 수밖에 없 었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채, 일렁이는 동공을 향해 단언했다. 그의 눈빛이 혼들렸다.
"이곳이 공작가의 영지긴 하지만 공자님은 아직 어리시니까요. 모르 실 수도 있는 겁니다. 아무도 공자 님을 탓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목 소리로 속삭였다. 입술을 꾹 문 채 주먹을 꽉 쥐던 그가 고개를 떨궜 다.
"......이곳은 내 영지다."
"공작가의 영지고, 공자님은 공작 이 아니시죠."
"나도 공작가의 일원이다."
"하지만 아직 어리시고요."
"만약,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았 다면...... 뭔가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질끈 감겼다.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칼의 머리 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평민이 귀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건 크게 처벌받을 일이었으나, 괴로운 표정을 한 그의 눈동자는 온기를 갈급해했기에 걱정은 뒤로하고 부 드러이 온기를 나눠 주었다.
"만약은 최고의 독약입니다. 무의 미한 가정들은 서서히 인간을 죽이 죠."
내 살을 파고들어 옥죄던 모든 가 정들은 하나같이 덧없었다. 결국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들. 불필요 한시간 낭비였다.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하느냔 겁니다."
허공을 맴돌던 붉은 눈동자가 내 게로 초점을 잡았다. 나는 답을 찾 아 헤매는 그 눈동자를 올곧이 마 주했다.
"무지는 죄가 아니나, 외면은 죄 가 됩니다. 알게 되었다면 외면하 지 말아 주세요. 태양이 비추지 않 는 그림자 너머에도 사람이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주시길 바랍니 다."
슬프게 눈을 휘었다.
내가 뱉은 것은 어쩌면 애원이었 다.
지금 칼은 어리다. 아직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허나 그가 좀 더 자라 작위를 물려받을 때가 오면, 그림자 속에 사는 사람들은 외면할 것인지, 그들까지 구해 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것 이었다.
나는 그때 칼이 외면을 택하지 않 길 바랐다.
"이제부터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그거면 충분할 겁니다."
칼을 향해 밝게 웃어 주었다. 눈 동자에 일렁이던 죄책감이 잦아들 고, 갈피를 잡지 못하던 동공이 제 자리를 찾았다. 망망대해에서 나침 반을 찾은 사람처럼 선명해지는 눈 빛
얼핏 기묘한 간악함이 스쳤던 것 도 같았다.
천천히 평소에 침착한 낯을 되찾 은 칼이 쓰게 웃었다.
"......정말 그거면 될까?"
문득, 그가 아직 어리면서도 성숙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타인의 고 통에 죄책감을 느낄 만큼 여리면서 도, 그 고통에 책임감을 느낄 만큼 어른스러웠다. 그는 아이와 어른의 중간 경계에 서있었다.
'어린놈이 참.'
칼은 내 오라비였으나, 아무리 생 각해도 오빠보단 동생 같았다. 19 살밖에 되지 않은 그가 공작가의 공자로서 지고 있을 짐들을 상상한 나는 쓰게 읏고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칼이 내 팔을 꾹 잡더니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허리에 팔을 둘러 안아 주었다.
부디 내 또 다른 혈육이 너무 괴 로워하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