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화
북부의 겨울은 매섭다. 해가 지며 점점 매서워지던 바람은 눈을 몰고 왔다. 바닥 위로 눈이 쌓이기 시작 했다.
밤의 장막이 깊게 드리웠음에도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지는 뒤척임 소리에 느리게 눈을 감았다.
수도에 살던 기사들에게 오늘 본 루주 마을의 광경은 충격이 컸을 터. 아마 오늘은 많은 이들이 잠
못이룰 듯했다.
툭.
"정말 이틀 내리 보초를 서도 괜 찮은 건가."
뜬눈으로 아침 해를 살피는 이들 중엔 칼도 포함되는 모양이다. 전 혀 졸린 기색이 보이지 않는 칼이 내 어깨 위로 담요를 얹어 주고는 잔을 건넸다. 따뜻한 김이 오르는 우유였다. 우유 위로 눈송이가 내 려 앉았다.
' 아.'
눈을 보고 있으면 섬찟 소름이 돋 는다.
나는 눈이 싫었다. 모든 것을 빨 아들이는 그 한없는 순백이 싫었 다. 구겨지려는 얼굴을 애써 정돈 한 나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사방이 눈이라 의미 없는 짓이었 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소드 마스터는 잠 좀 안 잔다고 죽지 않습니다- 제가 보초를 서는 편이 합리적입니 다."
짧은 감사 인사와 함께 잔을 받아 들고 홀짝거렸다. 향긋한 꿀과 고 소한 우유가 입 안에서 섞여 들었 다.
'쯔 '
혀를 찬 그가 내 옆에 걸터앉았 다.
흰 눈송이가 세상을 덮는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 칼을 곁눈질했다. 중환자들을 확인한 이후 아무 말 없이 제 막사에 들어갔던 그의 안 색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
끄러워 안심이었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흐르는 사이 칼이 입을 열 었다.
"내일이면 마수 토벌을 나가겠 지."
"그렇죠."
" 나는••••••
"마수 토벌이 두려워졌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칼에게 들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솔직한 고백이었다. 칼이 내게 이런 말까 지 하게 되었음에 놀라워하면서도 조용히 경청했다.
"마수가 이렇게 두려운 존재일 줄 몰랐다. 이렇게까지 인간의 생을 망쳐 놓을 줄 몰랐어."
거대 마수가 한 번 지나간 마을은 쑥대밭이 된다. 그것은 재앙이었다.
"너는 어떻게 마수들과 마주해 온 거지? 여태껏 두렵지도 않았나?"
그의 물음에 눈송이가 떨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속절 없이, 하얀 하늘의 파편들이 세상 을 침몰시킬 듯 쏟아지고 있었다.
"......두렵죠. 여전히 두렵습니 다."
단 한 번도 두렵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검을 잡을 땐 온몸이 긴장 했고, 마수를 앞에 두면 공포로 심 장이 뛰었다. 재앙과 맞서는 것이 두렵지 않을 리 없었다.
"다만 제 죽음보다 두려운 게 있 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내 두려움도 뒤로 하고 지 켜야 할 게 있었기에.
나는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칼에
게 느리게 웃어 주었다.
"두려운 게 당연한 겁니다• 정 버 거우시다면 몸이 아프다고 하고 빠 져 버리세요."
포기를 종용하는 내 말에 그가 놀 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힘내라는 말들이나 늘어놓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에게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한 멋 진 이야기들이나 거창한 조언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난 어려서부터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해 싸워야 했다. 싸움을 피해 도, 싸움에서 져도 죽었기에 살기 위해선 싸움에서 이기는 수밖에 없 었다. 늘,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 다.
오직 정도(正道)만을 걷는 인생은 인간을 강하게 만드나, 동시에 메 마르게 만들었다.
"두려우면 도망치세요. 공자님께 선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나의 또 다른 형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길 바랐다. 그에겐 싸움을
피한다는 선택지가 있으니, 두렵다 면 그저 도망치길 바랐다.
칼이 날 빤히 응시했다. 가라앉는 분위기를 느끼며 부러 장난스레 웃 었다.
"강한 전 혼자서도 잘 하니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깔끔 하게 끝내고 올 테니 공자님은 쉬 세요."
괜히 으스대자 칼이 기묘한 미소 를 지었다.
"역시 재밌단 말이지."
" 네?"
평소의 낯을 한 그가 고개를 저었 다.
"아무것도 아닐세. 그대 덕분에 이제 괜찮아졌다."
힘없던 조금 전과는 달리 굳건한 목소리였다. 조금 걱정스러워져 그 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 더는 두렵지 않아."
제 머리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 낸 칼이 내가 눌러쓴 후 드 위에 붙은 눈송이들도 털어 주 곤 씨익 웃었다.
"강한 네가 날 지켜 줄 거 아닌 가."
지켜 준다고 한 적 없는데.
장난스러운 대답을 삼킨 채 마주 웃어 주었다. 하여간 제멋대로였다.
이번 마수 토벌은 숲 중반쯤 가루 를 뿌려 북부 마수들의 침입을 막
고, 결계 안 마수들만 떼려 잡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장기적으로 봤 을 땐 주먹구구식보단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았다.
조는 내 조와 파르베 조로 나뉘어 져 구성되었다. 칼은 나와 같은 조 였다. 우리 조의 마법사 둘이 마수 탐지 마법을 발동시키며 동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토벌은 내게 상 당히 익숙한 일의 연속이었다.
"나는 소드 마스터인 아버지를 뒀 고. 여태껏 수많은 기사들을 봤지
만......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은 칼이 중얼거렸다.
"너같이 검을 휘두르는 인간은 내 일생에 유일할 거다."
모닥불 앞에서 주먹밥을 베어 물 다 말고 재채기를 했다. 하얀 입김 이 피어올랐다. 매서운 추위에 망 토를 여미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처럼 휘두르는 게 어떤 겁니 까?"
"죽기로 작정한 피에 미친 광전사
처럼 방어는 하나 없고 공격만 쏟 아붓는, 대중도 없고 규칙도 없는 미친 검술."
이어지는 대답은 신랄했다. 질렸 다는 표정을 짓는 칼과 아직도 이 전에 본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상기된 얼굴로 날 힐끔거리는 일행들을 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검술을 배운 적이 없으니 까.'
내 검은 오직 생존을 위한 검. 최 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신념 아 래,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장을 나
돌며 오직 무언가를 베기 위해 벼 려진 검.
난 지키기 위해 베기로 결심했고, 검엔 검사의 인생이 묻어나는 법이 었다.
"대신 아무도 안 다쳤지 않습니 까."
욱신거리는 어깨를 휘휘 돌렸다.
사실 이번 토벌은 보통의 페이스 보다 무리하는 감이 없잖아 있었 다. 아리아가 프레이야 백작가로 가게 될 사건이 가까워져 빨리 돌
아가야 하기도 했고, 익숙지 않은 단체 토벌에 긴장했기 때문도 있었 다.
'......누군가 다치는 꼴을 보고 싶 지 않아.'
마주한 것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거대 마수들이었다. 그들이 휘두르는 앞발은 마나를 두른 내겐 생채기를 낼 뿐이나, 다른 기사들 이나 마법사들이 맞았을 땐 중상을 피할 수 없었다.
'내가 나서서 좀 다치고 끝내는 게 나으니까.'
나는 마수를 만날 때마다 사람들 을 뒤로 물리고 마수를 혼자 잡듯 검을 휘둘렀다. 덕분에 아무도 다 치지 않았지만 빠른 시간 내에 사 람들을 지키며 검을 휘두른 탓에 몸에 조금 무리가 갔다.
"미련한 놈......
칼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 의 눈은 무뚝뚝한 태도완 상반되게 미미한 걱정을 담고 있었다. 두렵 다고 고백하던 어젯밤의 칼이 떠올 라 입매를 늘어뜨렸다.
"공자님께선 괜찮으십니까?"
"보다시피."
칼이 무심하게 답했다. 그는 숲에 들어올 때와 하나 달라진 것 없이 멀쩡했다.
"공작님의 마법 덕분에 빨리 끝낼 수 있었던 겁니다. 대단하시더군 요."
"아부하지 마라."
딱 잘라 질책하는 칼의 표정이 눈 에 띄게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입 안 살을 물어 터지려는 웃 음을 참았다.
잔소리 그만하라는 일종의 아부기 도 했지만, 거짓을 말한 건 아니었 다.
'조금 전은...... 정말 대단했지.'
그가 재능을 빛낸 조금 전의 토벌 을 떠올렸다. 대상이 거대할수록 정신 조종 마법을 발동시키는 게 어려워지고, 마기에 물들어 이지가 없는 마수를 조종하는 건 그야말로 최고난이도라고 들었건만.
' 멈춰.'
칼은 거대 마수들을 곧잘 조종했 다. 그의 가벼운 손동작 아래 나타 난 수많은 마법진들이 마수들을 뒤 덮고 그들의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 었다. 칼의 조종에 걸린 마수들을 토벌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충분히 쉬셨으면 슬슬 들어가시 죠. 내일 조금 더 가서 가루를 뿌 리고, 이후엔 마을 가까이에 있는 마수들만 토벌하면 될 것 같습니 다."
어두워진 주위를 확인하고 빠르게 자리를 정리했다. 내일도 활동하기 위해선 일찍 자게 하는 편이 나았
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보초는 내 가 섰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제아무리 나라 해도 조금 긴장한 채 검집을 꽉 쥐었다.
마수가 서식하는 숲속에서의 야영 은 이전 산에서 한 야영이나 마을 에서 한 야영과는 차원이 다르게 위험하다. 아영하다 마수들의 습격 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게 한두 번 이 아닌 사람으로서 신경을 날카롭 게 새울 수밖에 없었다.
북부의 겨울밤은 무척이나 매서웠 다. 조금 먹먹한 코를 훌쩍이다 뺨 에 닿는 눈송이에 하늘을 올려다보 았다. 아침에 멈추었던 눈이 다시 세상을 덮으려 하고 있었다.
'••싫어.'
솔직히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칠흑빛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겨울이 싫었고, 눈이 싫었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애써 참 으며 잡생각을 지우고 보초에만 집 중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문득 뺨 을 스치는 은은한 바람. 그 바람을
타고 코를 간지럽히는 익숙한 체 향.
나는 그제야 조금 웃을 수 있었 다.
"비행 마법 같은 고위 마법을 이 런 데다 사용하시는 건 재능 낭비 아닙니까."
"내 재능은 사치를 부려도 되는 수준이라서."
오만한 말투와 잔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내가 앉아 있는 나무의 맞 은편 나무로 날아든 인영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내게로 향한 붉
은 눈동자가 부드러운 빛을 머금었 다.
칼이었다.
"어제도 늦게 주무셨지 않습니까. 오늘은 날도 춥습니다. 들어가서 쉬세요."
"네가 쉬면 나도 쉬도록 하지."
"저는 보초를 서야 하지 않습니 까. 공자님이나 푹 쉬십시오."
"네가 안 쉬면 나도 안 쉰다."
잠시 실랑이를 벌였으나 칼의 고 집에 결국 포기했다. 어제도 나와 대화한다고 늦게 잔 그가 걱정되었
지만, 저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데 강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싫어하는 겨울과 눈도 잊고, 잠시 칼과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재앙은 늘 예고 없이 찾아 왔다.
팅-
사방에 뿌려 놓았던 기척을 읽는 오러의 실 중 하나에 무언가가 걸 리는 느낌이 드는 동시에, 직감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미르?"
말하다 말고 딱딱하게 굳은 날 칼 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으나, 그를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내 온 몸엔 소름이 돋고 털이 쭈뼛 섰다.
' 냄새.'
너무도 익숙하면서, 지독히 증오 하는 냄새. 살 썩는 내음과 진득한 피비린내, 불쾌하고 역겨운 악취가 뒤엉켜 내는 마기의 향.
'하나가, 아니야.'
너무 지독하다. 절대 하나가 낼
수 있는 위압감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었다.
"미르! 정신 차려! 괜찮은가!?"
비행 마법으로 나무를 건너 새파 랗게 질려 굳어 버린 내 바로 앞 나뭇가지에 발을 디딘 칼이 내 어 깨를 혼들었다. 혼들리는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내 형제.'
그와 알고 지낸 시간이라고 해 봐 야 며칠이다. 겨우 며칠이었건만.
혈연이라는 것이 확실히 진하긴 한 가 보다.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공자님."
"괜찮은 건가?"
" 칼."
U | M
"꼭, 살아야 해요."
예고도 없이 칼의 허리에 팔을 휘 감아 그를 안아들었다. 칼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휙!
" 무슨!"
발에 마나를 두르고 허공으로 도 약했다.
"다들 일어나세요! 마수 떼가 옵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