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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0화 (20/254)

20 화

"미르 님, 무슨 일입니까!"

황급히 나와 옷의 단추조차 채우 지 못한 기사 하나가 물었다. 모든 마나를 개방해 몰려오는 마수들의 위치를 가늠하던 나는 무겁게 대답 했다.

"지금 마수 떼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 전력으론 못 이깁니다. 도망 쳐야 합니다!"

"그게 무슨......•"

"적어도 마혼 마리. 상당한 크기 의 거대 마수입니다. 속도도 상당 히 빨라요! 뛰어서는 절대 못 도망 칩니다. 순간 이동을 사용해야 합 니다!"

따갑게 울리는 내 머리를 부여잡 고 얼떨떨해 보이는 두 명의 마법 사를 잡아끌었다.

"당신들! 지금 몇 명까지 순간 이 동시킬 수 있습니까!"

"네, 네!?"

잠이 덜 깬 맹한 얼굴의 그들이 반문했다. 다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멍만 때리고 있어 조급해질 때쯤, 침착함을 되찾은 칼이 날 붙 잡았다.

"우선 상황 설명부터 해라. 마수 떼가 어디 있다는 거지? 보이지 않 는데 • "

"다들 땅에 귀를 대 보세요."

내 말에 다들 갸웃하며 땅에 귀를 대었다. 그리고 굳었다.

쾅! 쾅! 쾅!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지, 지진입니까?"

누군가 겁에 질린 채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거대 마수 떼가 이동할 때 울리 는 진동입니다."

나 혼자 싸우면 아주 희미하게나 마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나, 저들 을 다 지키며 싸울 순 없었다. 내 가 싸우는 사이에 짓밟혀 죽을 게 뻔했다.

'젠장, 왜 거대 마수 떼가 지금 이동을 해!?'

거대 마수 떼의 이동은 정말, 정 말 드물었다. 떼로 서식하는 거대 마수종이 아주 적다는 것에 기인하 기도 했고, 거대 마수는 웬만해선 원 서식지에서 이동하지 않기 때문 도 있었다.

"빨리 몇 명까지 이동시킬 수 있 는지 대답하세요!"

허나 지금은 원인과 이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내 재촉에 두 마법사가 황급히 자 신들의 마력 회로를 확인했다.

"정말, 정말 무리하면 6명까진 가 능할 것 같습니다. 그 이상은 마력 회로가 터질 것 같아요......

"저도 6명까진 가능할 것 같습니 다. 그 이상은 제 능력 밖입니다."

그들의 대답에 기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곳의 인원은 총 14명.

두 명은 남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공자님! 공자님은 순간 이동 마 법 시전이 가능하십니까?"

"10명은....... 아니. 아니다. 난

순간 이동을 배우지 않았다."

다급한 물음에 무언가 대답하려던 칼이 황급히 말의 노선을 바꾸었 다.

' 젠장!'

입술을 짓씹었다. 한 명이 남아야 한다면 내가 남으면 된다. 이들 모 두를 지키며 싸워야 하는 것이 버 거울 뿐, 혼자서 싸운다면 어떻게 든 버텨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두 명이 남아야 한다면 다른 하나는 내가 싸우는 도중 죽어 버 릴 것 같았다.

"......내가 남겠다."

그리고 칼이 헛소리를 했다.

"도련님! 절대 안 됩니다!"

"개소리 작작 해요! 돌았나 진 짜!"

기사들이 크게 반발하고 내 입에 선 험한 소리가 튀어나갔다. 가도 가장 먼저 가야 할 공작가의 공자 가 이 상황에서 남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까드득 이를 갈았다. 처음으로 만

나 조금은 마음을 열었던 내 형제 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빌어먹을! 방법이- 아!'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열이 날 정도로 머리를 굴리다, 순간 머 릿속이 환해지는 느낌과 함께 무언 가를 떠올렸다.

황급히 허리춤에 찬 아공간 주머 니를 뒤지다 물건 하나를 꺼냈다. 한 손에 딱 들어가는, 은은한 은빛 이 감도는 돌을 닮은 물체.

'이것만 받아 줘요. 미르가 정말

걱정돼서 그래요. 부탁이에요, 응? 가지고만 있어 줘요.'

꽤 오래 전, 엘이 내가 걱정된다 며 쥐여 준 순간 이동 마법이 담긴 아티펙트였다.

'돌아가면 엘에게 키스해 줄 거 야!'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칼의 어깨 를 턱 잡고 그의 손에 억지로 돌을 쥐여주었다.

"시동어는 '투 미티 살바토르'. 가 고 싶은 장소를 떠올리면서 손에

꽉 쥐고 시동어를 외우면 됩니다."

"무슨...... 윽!"

내 검은 오러가 칼의 온몸을 꽁꽁 묶었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그가 털썩 쓰러졌다. 묶인 칼과 나 사이 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사들에 게 명했다.

"끌고 가십시오."

"뭐 하는 건가! 당장 풀어 귀족 시해 죄로 죽고 싶지 않다면 풀어 라!"

"고소도 살아 돌아가야 하죠. 얌 전히 돌아가십시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 치는 칼을 뒤로 한 채 마법사들을 이끌었다.

"마법진을 발동시키는데 얼마나 걸립니까?"

"10분 정도......

"5분! 5분 안에 해 보겠습니다!"

눈치를 보는 마법사를 지그시 응 시해 주니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고개를 끄덕이곤 점점 커지는 진동 의 방향을 탐색했다.

'북쪽.'

발 위를 마나로 감쌌다.

"자, 잠깐! 어디 가십니까?"

"마수 떼의 통행을 막아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동안 마을로 빠르게 도망치고, 다른 기사들에게 지원을 요청해 주세요."

"이 미친 새끼가! 이거 안 풀 어!?"

"칼 공자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공자님께서 다치시면 모두 중한 처 벌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공작가의 기사가 공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경을 쳐도 크게 칠

일이라는 것이 훤했기에 책임자도 아니면서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기사들은 꽁꽁 묶인 칼을 창백한 얼굴로 곁눈질하면서도 고개를 끄 덕였다.

'귀족 시해 죄로 뒤질지도 모르겠 네.'

시해 죄든 뭐든, 살아 돌아가야 하겠지만.

난 아직까지 발버둥 치고 있는 칼 의 몸에 오러 줄이 파고드는 것을 보고 줄을 조금 느슨하게 했다.

뢍 콰쾅-!

진동은 점점 커지고, 500m 전방 쯤에서 나무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일생에 딱 한 번 거대 마수 떼의 이동을 본 적 있었는데, 그땐 그 이동 때문에 숲이 아예 폐허가 되 었다.

'그리고 나는...... 소중한 것을 잃 었지.'

입술을 짓씹었다. 이번 토벌은 그 날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 정신이 아득해 지는 느낌이었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이들이 위험 하다. 정신을 다잡은 후 검을 단단 히 잡고 마나를 방출했다. 아연실 색한 칼에게 느리게 웃어 주었다.

"다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 미르!"

칼의 부르짖음을 뒤로한 채 땅을 박차고 올랐다. 그 기세를 잃지 않 고 주위의 나무를 밟아 다시금 뛰 어 올랐다.

뢍! 뢍쾅!

나무를 밟고 빠르게 이동했다. 진 동의 근원지에 가까워질수록 나무 들이 휘청거렸고 직감이 세차게 울 렸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덜덜 떨리기 시작한 몸과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식은땀을 느끼며 눈 을 질끈 감았다 떴다. 생애 처음으 로 거대 마수 떼를 마주했던, 기억 하고 싶지 않은 어린 날이 내 머릿 속을 사로잡았다. 악몽의 편린에 지배되어 생각이 마비된다.

통상적으로, 트라우마라 불리는 것이었다.

4 버텨야 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난 이제 강해졌다. 누군가의 지킴 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는, 이젠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다. 일행이 도 망칠 시간을 벌어야 했다.

두려움을 억누르고, 기억을 버텨 내며 빠르게 질주하면,

크아아아악-!

또다시 재앙과 마주했다. 버텨 내 기란 불가능처럼 보이는 재앙과.

시끄럽게 이동하던 재앙들의 눈동 자가 그들의 앞을 막아선 내게로 향했다.

'지옥에서 기어 오는 사냥개, 데 베라.'

외향은 개와 닮았으나, 그 덩치는 장정의 열 배쯤 될 정도로 거대했 다. 섬뜩하게 불타오르는 이지 잃 은 붉은 눈동자와 피비린내, 살 썩

는 역겨운 악취, 그리고 기묘한 마 력의 기운.

'......토할 것 같아.'

분명 죽어 숨을 멈춰야 하는 상태 임에도, 지옥을 거스른 듯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데베라의 꼴을 보며 사람들은 '지옥에서 기어 오는 사 냥개'라는 별칭을 붙였다.

크르릉.......

우두머리 알파로 보이는 가장 거 대한 데베라와 마주 섰다. 드러난 거대한 송곳니를 타고 역겨운 타액

이 뚝뚝 떨어졌다.

긴장으로 꼬리를 바짝 세운 데베 라는 날 경계하면서도 쉬이 덤벼들 지 않았다. 짐승의 본능적인 직감 으로 내가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챈 것 같았다.

데베라는 마수들 중에서도 가장 난폭하고 강한 축에 속하는 마수. 데베라 한 마리라면 그냥 죽이고 끝내면 될 일이지만, 떼를 상대하 는 건 얘기가 달라졌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싸우지 않고 살기로만 방향을 틀 수 있다면......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온몸에서 살기를 방출했다. 숲 전체를 옭아 맬 듯 터져 나오는 검은 연기. 살 기에 노출된 데베라들이 크게 움찔 거렸다.

살기는 대상의 강함을 공기로 담 은 날것 그대로의 기운. 자신보다 강한 존재의 살기에 노출된 존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본능적인 두려 움을 느꼈다.

살기에 잠식된 데베라가 물러나

다시 북부 지역으로 돌아가기만 하 면 굳이 싸울 필요도 없다. 때문에 나는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과하 게 살기를 방출했다.

'......물러선다.'

마수들은 마기에 중독되어 이성과 자각이 없는 난폭한 괴물들이나, 그럼에도 본능은 있었다. 살기에 몸을 떤 알파 데베라가 주춤주춤 물러나자 다른 데베라들도 꼬리를 내렸다. 옅은 희망이 생길 때.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크아아악!

날 마주하던 알파 데베라의 눈동 자에 광기가 물들고, 미미하게 느 껴지던 마력의 기운이 폭발하듯 터 져 나왔다. 데베라가 울부짖었다.

마력과 비슷한, 허나 훨씬 사악하 고 강력한 기운이 데베라를 지배했 다. 데베라는 줄에 걸린 꼭두각시 처럼 작위적인 몸짓으로 내게 달려 들었다.

'빌어먹을!'

마나를 두른 채 빠르게 몸을 피했

다.

방금 전까지 서 있었던 눈 내려앉 은 땅 위로 구덩이가 생겼다. 데베 라를 여러 번 상대해 왔음에도 여 전히 섬뜩한 위력이었다.

'......조종당하고 있다.'

시기와 상황이 모두 맞아 떨어졌 다.

난 이를 아득 갈며 북쪽 너머를 노려보다, 눈송이가 내려앉은 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쉬이이익!

저 하늘 위의 어둠을 베어내 하나 의 사념체로 만든 듯, 불길하게 일 렁이는 검은 오러. 내 삶을 담아 낸 어둠이 검을 에워쌌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게 살았 지."

작게 중얼거리며 검을 세웠다. 줄 에 걸린 이지 없는 꼭두각시가 된 데베라들이 마구 날뛰며 내게로 몰 려왔다. 저들을 밟아서고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아리아. 내 아이.'

끝일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서 떠오르는 얼굴은 결국 하나였 다.

내 의미이던 작은 아이. 무채색의 세상에 유일한 색채.

'널 다시 보고 싶어.'

그 집념 하나로, 다시금 내 몸뚱 이 하나로 거대한 재앙과 마주하려 할 때였다.

" 가드!"

환한 빛이 두 눈을 사로잡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 특유의 시원 한 마력이 일대를 지배했다.

나와 데베라 사이를 막고 펼쳐지 는 수많은 마법진들. 달려들던 데 베라들이 마법진에 부딪쳐 물러섰 다.

딱딱하게 굳은 몸을 힘겹게 돌렸 다. 오러 줄에서 벗어나려 마구 몸 부림 친 듯 온통 흐트러진 차림. 비행 마법으로 허공에서 떠오른 두

발. 바람에 날려 엉망이 된 머리카 락

그 사이에서 찬연히 빛나는 붉은 두 눈동자.

새하얀 눈. 추운 겨울. 북부와 가 까운 숲. 거대 마수의 떼.

악몽의 재연 같은 이 상황에서 내 게 다가온 그 붉은빛은, 어쩌면 내 게 일종의 구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새하얀 설원에서 죽은 시체를 끌어 안고 혼자 하염없이 울던 어린 나 를 향한 작은 구원.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그 죽은 시 체가 이번엔 당신이 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치미는 두려움.

그 순간 나는 느끼고 마는 것이 다.

아. 칼은, 이미 내게 구원과 공포 를 함께 느끼게 할 정도로 무거운 사람이 되었구나.

"미친 새끼......

물기가 차올라 먹먹해진 목소리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두 손에 마법 진을 떠올린 칼이 씨익 읏었다.

"멋진 건 혼자 다 하려고 했나? 미친 미르."

또 다른 나의 혈육이, 나와 함께 재앙에 맞서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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