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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1화 (21/254)

21 화

잠시 멍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눈을 부릅떴다.

"미쳤습니까? 머리 잘못됐냐고요! 여기가 어디라고 옵니까!"

버럭 소리 지르며 칼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엉망이 된 자신의 머리 를 툭툭 턴 그가 마법진을 더욱 크 게 넓혔다.

"미친 건 너지. 이것들을 혼자 상

대하려 했나?"

"혹 붙이고 하는 것보단 혼자 상 대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거칠게 으르렁거리니 그가 피식 읏었다. 나는 칼이 다칠까 걱정돼 죽을 것 같은데 그는 속 편해 보여 복장이 터졌다.

"혹은 안 될 테니 걱정 붙들어 매 지 그래."

"젠장! 당신 지금 이게 얼마나 위 험한 상황인지......!"

"잔소리는 나중에 하고. 우선 앞 에 괴물들부터 어떻게 하면 안 되 겠나?"

웃는 칼의 얼굴 위로 땀방울들이 툭툭 떨어졌다. 그제야 마법진을 펼친 그의 손목이 떨리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크르릉...... 크아아앙!

칼의 마법진에 둘러싸인 데베라들 이 미쳐 날뛰며 마법진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마법진이 위태롭게 떨렸다.

'빌어먹을, 진짜......•'

마음 같아선 청개구리 같은 칼을

쥐어 패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이 상황이 끝나 면 크게 혼을 내리라 다짐하며 한 숨을 내쉬었다.

"하...... 잘 들어요! 저 데베라는 이미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어 서 정신을 지배하는 건 불가능합니 다!"

"뭐?"

미간을 찌푸린 칼이 정신 조종 마 법을 시도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통 하지 않았고, 마법진이 파훼되기만 했다.

"대체 누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칼이 정신 조종 말고 도와 줘야 하 는 게 있습니다. 화염 마법 할 줄 아십니까?"

" 가능하다."

마법진을 유지하는 것이 힘에 부 쳐 보이는 칼에게 빠르게 설명했 다.

"데베라는 시체라 불에 약합니다. 그래서 큰 상처를 내고 그 상처 안 에 불씨를 집어넣어 속을 지지는 게 제일 확실히 죽이는 방법입니 다. 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가 제가

데베라에게 상처를 입히면 상처 안 쪽에 화염 마법을 시전하는 겁니 다. 할 수 있으십니까?"

"......해보지."

칼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데베라들이 마법진을 물어 뜯기 시작하며 그의 손이 경련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느리게 입을 뗐 다.

"순간 이동 아티팩트, 아직 가지 고 있죠."

"•..."그래."

잠시 머뭇거리던 칼이 한숨과 함

께 답했다. 그를 보며 흐리게 웃었 다.

"내가 다쳐서 전투 불능이 되면 바로 도망칠 거라고 약속하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오기 부리지 마십시오!"

반발하는 그를 향해 눈을 치켜떴 다.

"약속 안 하면 기절시켜서 강제로 보내 버릴 겁니다!"

난 위험 앞에서 도망쳐선 안 된 다.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삶이었

고, 위험에 맞서 싸워 사람들을 지 키는 것이 힘을 가진 자의 의무니 까.

하지만 칼은 공작가의 후계자이고 더 많은 사람들을 다른 방식으로 지켜야 하는 만큼,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야 했다.

"살아남을 거라고, 약속하세요."

사실 내 이기심일지도 모른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을 열게 된 상대가, 내 또 다른 혈육이 살기를 바랐다. 가능한 행복하게.

마음 한편에 자라나기 시작한 새 로운 바람이었다.

"......빌어먹을. 약속한다. 약속하 니까 그 표정 좀 짓지 마!"

눈이 마주친 채 동요하던 칼이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버럭 소리 를 질렀다. 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돌아서서 마수들과 마주했다. 마수 들에게 갉아 먹힌 마법진들이 거의 파괴되어 있었다.

"셋 세면 거두는 겁니다."

침묵에서 그의 수긍을 느낄 수 있 었다. 크게 심호흡했다.

"셋."

온몸에서 끌어올린 마나를 검에 집중시켰다. 떨리는 손에 더욱 힘 을 주었다.

또 소중한 것을 잃어 버릴 것만 같았다. 데베라의 붉은 눈동자가 나와 내 소중한 것을 집어삼킬 불 길의 재앙처럼 보였다.

"둘

마나를 온몸에 뒤덮어 신체를 강 화했다. 칼이 빠르게 뒤편 나무 위 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나 또한 재앙이니까. 내 힘은 재앙에서부터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벼려 낸 재앙이었다.

" 하나."

마법진이 파괴된다. 재앙들이 풀 려났다. 데베라가 거대한 헤일처럼 몰려왔다. 그 거대한 재앙 앞에서, 난 검은 오러를 앞에 내세웠다.

내 검은 무언가를 지킬 때 가장 날카로워졌다.

쉬익-!

크아아악!

한꺼번에 몰려오려는 데베라들을 오러의 바람으로 밀어내고, 한 마 리씩 잡아 베었다. 검은 오러로 물 든 검이 데베라의 썩은 살을 난도 질했다.

악취가 후각을 마비시키고 검은 피와 썩은 살점들이 온몸에 튄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갈고리

같은 데베라의 발톱이 내 어깨를 긁었다. 마나로 둘러진 몸은 조그 만 생채기를 제외하고 멀쩡했다. 다시금 날아오는 앞발을 잘라내고, 몸통에 칼을 찔러 넣은 채 아래로 쭉 그었다.

크악!

검은 피가 사방으로 튄다. 데베라 가 절규했다. 칼을 향해 손짓했다.

" 지금!"

" 발화!"

붉은 마법진이 상처 바로 위에 나

타나 불로 화한다. 불꽃이 데베라 의 속으로 들어갔다. 지독한 타는 냄새와 함께 부패한 살이 팽창하며 데베라가 폭발했다.

" O "

나무 위에 올라선 칼이 헛구역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괜찮 은 척하려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위태로워진 그의 기운을 느끼지 못 할 리 없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요. 당신이 제 대로 서포트해 주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뺨에 튄 썩은 살점을 거칠게 닦아 내며 고함을 쳤다.

칼의 곁으로 가 위로해 줄 수 있 다면 좋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이곳에 남기로 결정 했음으로,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져야 했다.

"넌, 내가 절대 죽게 하지 않는 다!"

칼이 오기 서린 목소리로 외쳤다. 잠시 상황도 잊고 피식 웃다 몰려 오는 데베라들을 보며 검을 다잡았

다.

나와 함께 일했던 어떤 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네 검은 뭣도 없지. 규칙도 없고, 요령도 없고...... 보통 기사들의 검 처럼 화려한 검술 같은 것도 없어. 그런데 이상하지. 네가 검을 휘두 르는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으니. 네 검은 뭐랄까, 살아 있음을 온몸 으로 증명하는 것 같아. 네가 이곳 에 존재하고 있음을 네 검으로 이 야기하려는 것 같다고. 변칙적이면 서도 정도를 따르며, 담백하나 묵 직하지. 뭐, 그렇다고 잘하고만 있

다는 건 아니야. 방어 좀 해, 이 자 식아! 어떤 미친놈이 무식하게 공 격만 하냐!'

내 체력은 소드 마스터 평균에 비 해 형편없다. 어떤 체력 단련도 없 이 검만 휘둘렀기에 그랬다. 방어 는 아예 할 줄을 몰랐다. 가끔 보 이는 치명타만 간신히 막을 뿐, 웬 만한 공격은 무식하게 몸으로 받아 냈다.

회복력도 좋지 못했다. 제대로 먹 지도, 푹 자지도 못하는 나날들이 한가득. 영양실조와 만성피로를 몸 에 달고 살며 면역력이 생길 틈도

없었다.

이런 내가 검은 재앙이라 불릴 수 있었던 건, 오직 멈추지 않는 공격 때문이었다.

크아아악!

끊임없이 베고, 또 벤다. 온몸이 검은 피와 썩은 살점으로 물들어도 계속 베었다. 갈고리 같은 발톱이 내 피부를 긁고, 흉측한 이빨이 내 살을 뚫으려 해도 멈추지 않는다.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신념 아래, 살아남기 위해,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검을 휘두르던 삶.

날 죽이지 못했던 모든 것은 날 강하게 만들었다.

"젠장, 미르!"

데베라 중 하나의 송곳니가 내 팔 을 뚫었다. 데베라의 침은 마비독 의 일종이었기에 팔이 딱딱하게 굳 어 갔다. 지독한 현기증에 휘청거 리다, 날 물었던 데베라의 아가리 에 검을 처박고 위로 베어 올렸다.

검을 쓰는 오른팔이 아닌 왼팔이

물려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발화!"

칼이 상처 입은 네 마리의 데베라 를 향해 화염 마법을 시전했다. 한 개 이상의 마법진을 동시에 전개하 는 건 상당히 어렵다고 들었건만, 무려 네 개를 동시에 전개한 걸 보 면 과연 천재는 천재인 모양이었 다.

'원소 마법은 마력 소모가 심하 니...... 빨리 끝내야겠네.'

조금 더 무리해야 할 듯했다. 남

은 데베라는 열 마리 남짓. 벅찬 숨을 뱉으며 검 손잡이를 옆으로 잡은 채 날을 가로로 세웠다.

"칼! 데베라들 막고 시간 좀 끌어 줄 수 있습니까!"

"30초! 그 이상은 안 된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칼은 이유조 차 묻지 않고 방어막 마법진을 전 개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빛나는 기이학적 문양의 마법진들. 데베라 를 잠시 붙잡아 두긴 충분했다.

이성을 잃고 날뛰는 데베라들을

칼이 필사적으로 막는 사이, 난 심 호흡과 함께 허공으로 마나를 모았 다.

응축하고, 또 응축한다. 내 속에 든 오러를 모두 헤집어 하나로 모 으자 커다란 검은 구(球)가 하나 떠 올랐다.

'궁극기'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했 으나 그거 말곤 표현할 말이 없었 다. 1대 다수의 싸움을 치러야 할 때 사용하기 위해 개발한, 가장 파 괴력이 높은 기술.

"칼! 방어막 해체해요!"

이름을 지으라고 한다면 '흑풍(黑 風)'이라 지을 기술이었다.

빛이 사그라들고, 재앙들이 내 앞 으로 돌진한다.

서걱.

검날을 세우고 나와 데베라들의 사이에 떠오른 오러의 구를 거침없 이 벴다.

뢍! 콰쾅-!

검은 바람이 세상을 덮는다. 응축

되었던 오러의 구가 검의 궤도를 따라 터져 나갔다.

검은 오러가 달려드는 데베라들을 탐욕스럽게 집어삼킨다. 귀가 먹먹 해질 정도로 커다란 소음이 일대를 울리고 대지가 들썩였다. 거센 돌 풍으로 눈을 뜨기 힘들어 잠시 눈 을 감았다 뜨면.

"허••••••

상황은 모두 끝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두 뺨에 튄 검은 피를 손등으로 벅벅 닦아냈

다. 시체 썩는 냄새와 살 타는 냄 새가 온몸에 진동했다. 시체 더미 에 빠진 기분에 구역질이 일 정도 였다. 수십 번을 씻어도 이 더러운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 다.

'확실히 다 죽었네.'

혹여나 살아 있는 데베라가 있을 까 봐 역겨움을 참고 데베라들의 시체를 뒤져 보았으나, 다 확실히 숨통이 끊어져 있었다. 특히 마지 막에 해치운 열댓 마리의 데베라들 은 몸이 아예 반토막으로 잘린 데 다 검은 오러에 새까맣게 타 형체

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그 불쾌한 기운도 사라졌고.'

아마도 원작의 그것으로 짐작되는 사술도 거두어져 있었다.

난 칼에게로 다가갔다. 데베라 중 하나의 발톱이 다리 근육을 살짝 끊은 탓에 절뚝거릴 수밖에 없었 다.

"칼, 괜찮습니까."

커다란 나뭇가지 위에 몸을 뉘인 채 가픈 숨을 내쉬던 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진 않았다."

"그럼 어떤 상태신가요. 반 정도 죽으셨나요? 반의 반 정도?"

내 힘 빠진 농담에 그도 힘없이 웃었다. 몸에 힘을 쭉 뺀 그가 반 쯤 감긴 눈으로 중얼거렸다.

"......살았군."

"우리 둘 다 살았습니다."

몸은 성한 데가 없고, 온몸에선 죽음의 악취가 풍기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하

늘 아래 두 눈을 뜨고 있었다.

'이 설원에서, 둘이 살아남았구 나.'

아주 비슷한 상황에서 혼자만 살 아남았던 기억이 있는 내게는 이 상황이 정말 기이한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어쩐지 눈물이 터져 나 올 것만 같은 기분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살아 있다는 게...... 이런 기분인 줄 몰랐다."

칼이 중얼거렸다. 어떤 형태이든,

살아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참을 수 없을 만큼 찬연한 구석이 있었다.

칼이 한참 동안 날 응시했다. 독 이 퍼져 욱신거리는 왼팔을 부여잡 은 나도 그를 응시했다.

서로를 딛고 사지에서 함께 살아 남은 이들에겐 말없이도 통하는 무 언가가 있었다.

아마도 똑같은 눈빛으로 서로를 응시하길 한참. 칼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나, 내려갈 힘이 없다."

"그래 보이십니다."

그가 몸을 뉘인 나뭇가지 바로 아 래서 두 팔을 벌린 채 씨익 웃었 다.

"떨어지시죠. 받아 드리겠습니 다."

"왼팔을 물리지 않았었나."

"칼 정도는 충분히 들 수 있습니 다."

회복 속도가 소드 마스터 평균에 비해 떨어지긴 해도 소드 마스터는 소드 마스터다. 독에 대한 내성이 생긴 것도 한참 전이었기에, 살짝

떨리긴 해도 칼 정도는 너끈히 들 수 있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인 칼 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기꺼이."

옅은 바람 소리와 함께 추락하는 소년의 몸을 가뿐이 받아 들었다. 칼은 나보다 머리 하나 반쯤 컸기 때문에 몸을 한참 구겨야 내 몸에 안착할 수 있었다.

눈이 반쯤 감겨 비몽사몽하면서도 깨어 있으려 노력하는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자도 괜찮습니다."

"......그럼, 좀, 자겠네."

거절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피곤했던 모양이다. 더듬거린 칼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입술을 우물 거리던 그가 느리게 중얼거렸다.

"우리...... 이후에도, 친, 구......

툭.

수마를 이기지 못한 칼이 말을 맺 지 못하고 고개를 늘어뜨렸다.

'......친구라.'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칼을 내려다보다,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반듯한 이마 위에 입술을 맞췄다.

"좋은 꿈 꿔요, 내 친애하는 칼."

칼은 이미 내게 친구 이상으로 소 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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