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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2화 (22/254)

22 화

그날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데베라 떼를 토벌하는 사건으로 마력을 다 소진한 칼은 사흘 내리 기절해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미르 를 찾는 칼에 조금 긴장한 파르베 가 호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 다.

"이건 미르 님께서 남기고 가신 쪽지 입니다."

미르가 사라졌다는 말에 알 수 없 는 빛으로 가라앉아 있던 칼의 눈 동자가 번뜩였다. 파르베의 손에서 쪽지를 낚아챈 칼이 빠르게 쪽지를 폈다.

[먼저 갑니다. 숲에서 나오는 김 에 만난 마수들도 싹 처치했습니 다. 마수에게서 나온 부산물들이 꽤 돈이 될 듯하니 보상금은 안 받 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일어나면 목 욕부터 하세요. 공자님께서 시체 썩은 내 나더군요. -미르.]

"허."

칼이 헛웃음을 뱉었다. 끝까지 기 대를 저버리지 않는, 읏기는 놈이 었다.

칼은 태어나기를 기묘하게 태어났 다.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분명 제 심장엔 피가 공급되고, 제 폐는 공기를 갈구했으나, 영혼은 죽어 버린 것 같았다. 그를 만들던 조물 주가 육신을 완성한 뒤 영혼의 호 흡을 불어넣는 것은 깜빡한 것처 럼.

지루한 삶이었다. 하루하루가 무

료했다. 만사에 감흥이 없었고, 무 얼 해도 무감각했다. 그나마 가장 흥미로웠던 건 마법이었으나, 마법 을 하는 그 순간만 재미를 느낄 뿐,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부턴 단조로움의 반복이었다.

세기의 천재인 그에겐 초고난이도 라는 마법도 너무 쉬울 뿐이었다.

칼은 자극적인 걸 찾기 시작했다. 도박이나 마약 같은 것들까지도 손 을 대 보았으나, 극상의 쾌락이라 불리는 것도 칼에겐 지루할 뿐이었 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아악!'

그나마 가장 재미있었던 건 인간 을 고문하는 것.

살고 싶다는 욕망. 살기 위한 몸 부림.

그에겐 없는 것들이었다. 칼은 고 문으로 죽어가는 이들에게서 모순 적으로 생을 느꼈다.

허나 그것은 스스로를 잡아먹는 달콤한 늪 같았다. 고문을 마친 직 후엔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 가는 것 같다는 더러운 기분을 느끼면서

도, 하지 않으면 중독에 빠진 사람 처럼 손이 떨렸다.

인간은 타인의 죽음에 무뎌질 때 비로소 괴물이 된다. 17살의 칼은 괴물이 되기 직전의 경계에 서 있 었다.

'사람 고문하는 거, 그만둬라.'

그 앞에서 잠시 브레이크를 걸어 주었던 건 다름 아닌 카이사르였 다.

'크리시스 가문에 유전처럼 내려 오는 정신병이다. 내 아버지에겐

없었으니 절대적이진 않지만 우리 가문에서 자주 발병하지. 나 또한 늘 너와 같은 무료함에 빠져 있다. 넌 그 정도가 더 심한 것 같지만, 그래도 네 무료함이 어떤 느낌인지 는 알아. 고문은 잠시간의 만족감 은 주지만 영구적인 대책이 되지 못해. 당분간은 저택에만 있어라.'

카이사르의 명이 떨어진 이후 칼 은 한 달 동안 저택에서만 머물러 야 했다. 카이사르는 칼에게 무료 함을 타파할 수단들을 끊임없이 공 급해 주었지만, 재앙처럼 밀려오는 무료함 앞에선 모든 것이 무용지물 이었다.

저택에 발이 묶인 탓에 저택의 모 든 기물을 파괴할 기세인 칼의 통 행 가능 지역이 자신의 방과 수련 장밖에 남지 않았을 때.

"뭘 보는 거지?"

칼은, 운명처럼 그와 마주하게 되 었다.

"허, 헉! 도, 도련님! 저희는 그게 아니라......!"

"됐고. 뭘 보고 있었던 건지 대답 해라."

훈련 시간에 수련장 밖에서 딴 짓 을 하고 있던 두 기사의 얼굴이 새 파랗게 질렸다. 어쩔 줄 모르고 더 듬거리는 그들을 가볍게 무시한 칼 이 기사 중 하나의 손에 들린 영상 마도구를 가리켰다.

"이, 이거 말씀이십니까?"

"세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힉! 용병 미르의 전투 영상을 보 고 있었습니다!"

" 미르?"

칼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미르는 칼도 익히 알고 있는 자였

다.

미르. 3년 전부터 용병계에 발을 들였고 현재는 소드 익스퍼트로 추 정되며, 마수 토벌 계열의 의뢰는 모두 독식하다시피 하는 은빛 방패 용병.

제국에 기사들이 많은 만큼 기사 의 전투를 녹화한 영상 마도구야 혼히 거래되었다. 허나 아직까지 용병 일을 천히 보는 기사들이 많 아, 용병의 전투를 녹화한 마도구 는 본 적이 없었다.

"네! 대단한 분이죠! 미르의 전투

영상은 정말 구하기가 힘든데 전투 영상 마도구를 판매하시는 저희 아 버지께서 힘들게 매입하셔서 딱 한 번만 보고 돌려 드린다고 사정을 하고 빌려 온 참입니다!"

칼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은 것 처럼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기사를 무감한 눈으로 스쳐보고 마도구를 낚아챘다.

멀쩡히 돌려놓지 않는다면 아버지 에게 사지가 찢겨 죽을 거라고 호 소하는 기사를 무시하고, 그는 영 상을 재생했다.

챙!

검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아직은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 듯 조금은 불안정한 검술. 절도 있 고 품위 있는 기사들과의 검과는 사뭇 다른, 오직 생존을 위한 검. 움직임 하나하나에 처절함이 담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생생히 드러내 는 몸짓.

우아함도, 절도도 없다.

허나 경이로울 정도로 생생히 살 아 있었다.

" 얼마지?"

"네, 네?"

"이걸 얼마에 팔 계획이었냐고 물 었다."

"어, 음...... 듣기로는 하나에 백 골드까지도 생각하고 계시던데요."

"퇴근하기 전에 테일러를 통해 열 배 받아가도록."

" 네?"

칼은 경악에 빠진 기사를 뒤로한 채 마도구를 챙겨 제 방으로 돌아 갔다.

눈은 죽어 있었다. 허나 눈빛이, 그 몸짓이, 솟구쳐 오르는 오러가,

마수를 베어 내는 검날이 살아 날 뛰고 있었다. 칼은 그것에 전율을 느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생생함을 탐미했다.

그것이 전환점이었다.

"용병 미르의 전투 영상, 전부 사 들여라."

칼은 산 자의 생생한 몸부림을 끊 임없이 돌려 보았다. 그것을 보고 있자면 그 또한 살아 있는 것 같았 다.

"요즘 용병 미르에게 관심이 많다

들었다. 고문도 더는 집행하지 않 고."

얌전해진 제 아들을 보며 의문을 품은 카이사르에게 칼은 고개를 끄 덕였다. 더 좋은 길이 생겼으니 더 는 고문으로 생을 탐할 이유가 없 었다.

"......그래. 미르의 정체라도 알아 봐 주랴?"

그 순간 칼은 고민했다. 직접 만 나 본 미르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정말 그렇게, 찬란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는 '예.'라고 답하고 싶은 욕망 에 휩싸였으나, 결국 고개를 저었 다.

"됐습니다. 숨기려 애쓰는 것을 굳이 드러내 밝히고 싶지 않습니 다."

그것은, 칼 크리시스가 타인을 위 해 자신의 욕망을 누른 첫 번째 순 간이었다.

"......그래. 부족한 게 있다면 말 하고. 돌아가 봐라."

카이사르의 무심한 목소리가 잔잔 한 호의를 담고 울려 퍼졌다.

칼이나 카이사르나 누군가를 사랑 할 수 있는 위인은 되지 못한다. 허나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칼이 원 하는 것을 들어 주거나 칼의 무료 함에 신경을 쓰는 등, 최악의 아버 지는 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 다.

건조하고 푸석한 이 부자 관계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카이사르 덕분이었다.

"네."

그리고 칼은, 그런 카이사르를 사 랑하지 못했으나 이해하고 존중했 다. 둘은 서로의 고요한 이해자였 다.

그 이후 칼의 삶은 꽤 정상적인 궤도를 찾았다. 더는 쾌락을 찾아 방황하지 않았고, 고문 집행에서도 깔끔히 손을 뗐다. 많은 이들이 그 가 180도까진 아니더라도 90도 정 도는 달라졌다고 입을 모았다.

허나 사실 달라진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칼은 여전히 무료했고, 사 랑을 몰랐으며, 여전히 생을 탐했

다. 달라진 건 단 하나뿐이었다.

그가 미르를 알게 되었다는 것.

칼은 미르의 찬연한 생을 음미하 며 또 죽은 하루를 살아갔다.

영상 속 미르가 아닌 정말 살아 숨 쉬는 미르가 칼의 삶으로 굴러 떨어진 건, 미르를 알게 된 지 2년 이 지난 어느 겨울날이었다.

"도련님. 공작가에서 연락이 왔습 니다."

"바쁘다고 해."

"공작님께서 보내신 연락입니다."

마법진을 그리던 칼의 손이 멈칫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마탑에서 보내는 칼에게 카이사르가 직접 연 락을 보내는 일은 혼치 않았다. 카 이사르는 칼의 취미 시간을 방해하 려 하지 않았으니까.

"가문에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 가?"

"그것보단 공자님께 기회가 생겼 다고 볼 수 있겠군요."

시종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마 도구를 건네받은 칼은, 그 위로 떠 오른 글자들을 읽은 즉시 겉옷을

챙겨 입었다.

"지금 당장 순간 이동 기계 작동 시켜."

"이미 대기 중입니다."

오랫동안 칼의 곁에서 일한 시종 은 칼을 잘 알았다.

[용병 미르가 이번 루주 마을 마 수 토벌에 참여한다. 빨리 오면 껴 서 갈 수 있을지도.]

카이사르 크리시스 또한, 제 아들 을 잘 알았다.

"안 가십니까?"

순간 이동 기계 앞에 목석처럼 서 있는 칼을 보며 시종이 고개를 기 울였다. 칼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 다.

아마, 이 앞을 지나면 미르가 있 을 것이다. 2년 동안 그의 생에 원 동력이 되던 주인공이.

그리고 그 순간 앞에서, 칼은 답 지 않게 망설이고 있었다.

분명 미르가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미르의 생을 탐미하던 2

년 동안 칼은 그 누구보다 미르의 실존을 체감하고 싶어 했으니까.

다만, 그는 두려웠다.

두려움. 칼 크리시스에게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가. 그럼에도 그는 바라던 그 순간 앞에서 두려 움에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생을 탐미하던 미르가, 사실 은 정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면 어쩌지.

문득 머릿속을 지배한 가정 하나 가 칼 크리시스를 미치게 했다.

참으로 우습지만 근 2년 동안 미 르는 칼에게 소년들이 으레 동경하 는, 일종의 상상 속 영웅과도 같았 다.

어쩌면 닿지 않기에 더 빛나 보이 는 별. 정체를 모르기에 숭배할 수 있는 우상. 본질을 알 수 없기에 동경할 수 있는 이상향. 정체를 확 인하는 순간, 속절없이 무너져 버 릴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마음.

정체도 모르는 용병 나부랭이에게 칼은 너무 많은 마음의 지분을 허 락해 버렸다.

"......도련님."

오랫동안 칼의 시중을 든 늙은 시 종은 주인을 잘 알았다. 어쩌면 주 인보다 더. 그가 느리게 입을 뗐다.

"두려움은 마주하지 않는 이상 계 속 품고 살아야 합니다. 평생 두려 움을 품고 괴로워하느니, 저라면 한 번 마주하고 속 시원하게 털어 낼 것 같군요."

칼이 시종을 돌아보았다. 세월이 담긴 인자한 미소가 시종의 얼굴 위에 떠올랐다.

"도련님의 마음은 값싼 것이 아닙 니다. 줄 가치가 없는 자에겐 베풀 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이 늙은 이의 바람입니다."

미르에게 가치가 있는지 직접 확 인하라는 뜻이었다.

"......맞는 말이군."

두려움이 깃든 인상을 쓰고 있던 칼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평 소 그가 짓던 그 오만한 미소였다.

"장치를 열어라. 직접 확인하러

가겠다."

마주 읏은 시종이 공간 이동 장치 를 발동시켰다.

"잘 다녀오십시오."

시종의 배웅 인사를 들으며, 칼은 망설임 없이 일렁이는 공간 속으로 걸어 나갔다.

"적이 아닙니다! 검을 넣어 주십 시오!"

공간이 뒤틀리고, 기사단장의 목 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붉은 연기에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누가 온 겁니까?"

그리고 뒤를 따르는, 칼이 익히 아는 변조된 목소리.

평소처럼 오만한 미소를 입가에 띤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나 말인가?"

그리고 마주한 작은 인영.

허나 그 작은 몸집에서 뿜어져 나

오는 기백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칼은 홀린 듯 그의 영웅을 관찰했 다.

익히 알고 있는 외양. 허나 영상 너머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 은 느낌이 너무 달랐다.

저 눈.

칼을 생으로 이끌었던 그 두 눈이 었다. 기이한 진분홍빛으로 번뜩이 는 죽은 눈. 이미 죽었으나 찬연하 게 살아 반짝이는 모순적인 마음의 새

실제로 본 그 눈은, 영상에서 봤 던 것보다 훨씬 더 빛나고 있었다.

그때 칼은 깨달았다.

"이자가 미르인가?"

아. 난 이자를 놓을 수 없구나.

* * *

"......도련님?"

파르베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칼이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무언가 고민 하듯 입술을 짓씹던 칼의 입가 위

로 어느샌가 매혹적인 미소가 떠올 랐다.

"파르베 로만."

"네, 도련님."

공작가의 충성된 기사가 작은 주 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칼 크리시스는 멍청한 인간을 혐 오했다. 제 주제도 모르고 달라붙 는 버러지들이나, 속에 든 것이 맹 수인 것도 모르고 겉에 바른 달콤 한 설탕물에 끌려드는 벌들 같은 것. 아주 같잖고 귀찮았다.

다만 그는 멍청하게 구는 미르가 싫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미르는 멍 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칼이 봐 온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지혜롭고 날카로웠다.

그는 마수에 관해서는 깊은 경험 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식견을 보 였고, 동경심을 품은 기사들이 다 가갈 때면 은근히 거리를 두는 조 심스러움을 보였으며, 날카롭다 못 해 경이로운 직감과 빠른 상황 판 단력을 보였다.

허나 그렇게나 영특한 미르는, 어 째서인지 칼 앞에서만 멍청하게 굴 었다.

칼이 가면을 썼음을 느낀 것처럼 미간을 좁히다가도, 그 눈동자 위 에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를 믿음이 스며들며 의심을 거둔다. 같지도 않은 나약한 모습을 보이니 걱정하 며 위로해 주고, 제 주제도 망각한 것처럼 공자인 자신을 안쓰럽게 여 겼다.

칼은 자신을 바라보는 미르의 눈 동자를 떠올렸다. 늘 무심한 기색 을 품고 있다가 자신을 보는 순간

사뭇 기묘한 빛을 품는 그 두 눈.

무지와 몰이해의 세계에서 이해자 를 만난 듯이, 혹은 자신이 그의 이해자라는 듯이. 기이한 기쁨을 품은 기만적인 눈빛.

미르는, 그를 이미 알고 있다.

언제부터일진 모르겠다. 아니, 언 제부터인지는 상관없었다. 미르가 왜 그런 눈빛을 하는지, 자신을 어 떻게 알게 됐는지도 관심 없었다.

그저, 그 두 눈이 싫지 않았다. 아니, 소름 끼치게 좋았다.

영원히 몰랐다면 잡지 않았겠지 만, 그걸 알게 된 순간부터는 놓을 수 없다.

광기 어린 미소를 지은 칼이 차갑 게 명했다.

"미르를 찾아. 얼마가 들든 무슨 수단을 쓰든 상관없다. 찾지 못하 면 자결할 각오로 미르의 정체를 알아내."

칼은 한 번 문 것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한편 이미 공작가를 나서기 전 공 작에게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을 들었던 파르베는 부자 가 쌍으로 지랄이라고 속으로 쌍욕 을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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