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화
"으 "
나는 왼팔을 부여잡은 채 가쁜 숨 을 뱉었다. 지끈거리는 머리와 어 지러운 시야, 비처럼 내리는 땀방 울. 열이 오른 팔이 터질 것만 같 았다.
'젠장! 하필 알파 데베라에게 물 려서는!'
왼팔을 내주었던 데베라가 알파
데베라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보통 데베라에게 물렸다면 루주 마을에서 수도로 돌아오는 동안 다 회복됐겠지만, 알파 데베라의 독은 보통 데베라보다 5배 더 독했다. 현재까지 온몸이 마비되지 않고 버 티고 있는 건 오직 내가 소드 마스 터인 덕분이었다.
'오두막...... 빨리......
거칠게 고개를 휘저어 머리 위로 쌓이는 눈송이를 털어내고 손으로 나무를 짚었다.
아리아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약 을 연구하던 오두막. 그곳엔 해독 제를 만들 재료들이 있었다. 오두 막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 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는데, 설상 가상으로 발목까지 쌓인 눈들은 걸 음을 방해했다.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질질 끌고 겨우겨우 오두막 앞까지 다다랐다.
끼익-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오두막 안은 어두웠 다.
그리고 빨간불이 들어온 직감.
스릉.
고통으로 잠시 죽어 있던 직감이 날뛰었다.
멀쩡한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 침 입자의 목에 겨누었다. 침입자의 몸이 움찔했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싸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는데 다행히 침
입자에게선 어떤 무력의 기운도 느 껴지지 않아 가볍게 제압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침입자의 정체를 겁 없는 좀도둑 으로 추측하고 있을 때였다.
탁
오두막의 불이 켜졌다. 그제야 온 몸에 밴 피비린내 사이에서 조금은 익숙해졌던 바닐라 향을 느낄 수 있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연갈색 곱슬머리 가 문 틈새로 새어 들어온 겨울바
람에 휘날렸다. 심해를 닮은 푸른 빛 눈동자가 내 꼴을 확인하고 크 게 혼들렸다.
" 디디?"
남의 이마를 훔치고 튀었던 도둑 놈이 제 발로 돌아왔다.
* * *
쪼르륵-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은은히 오두막 안을 울렸다. 기다랗고 예 쁜 손이 찻주전자를 찻잔 위에 기
울였다.
평생 대접만 받아 온 도련님이라 차도 못 우릴 줄 알았건만, 그가 능숙한 손길로 우려 낸 홍차는 예 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받게."
디디가 찻잔 하나를 내게 건넸다. 멀쩡한 오른손을 뻗어 잔을 잡다 살짝 손이 떨려 홍차를 이불에 흘 렸다. 마비 독의 여운 때문에 몸을 가누기가 힘겨웠다.
" 이런."
흔들리는 내 손목을 본 디디가 굳 은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다 가오는 그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 오."
내 차가운 반응에 그가 손을 거두 며 물러났다. 억지로 냉랭한 표정 을 지으려 노력했지만, 디디의 푸 른 눈과 마주친 즉시 인상을 풀 수 밖에 없었다.
'침입자인 주제에...... 왜 상처받 은 표정을 짓는 거야.'
입술을 꾹 깨물며 깊게 한숨을 쉬 었다. 경계하는 시늉이라도 하려 했건만, 디디의 처량하게 처진 눈 꼬리 앞에서 차마 더 날을 세우지 못했다.
몸에 힘을 푼 채 침대 맡에 몸을 기댔다. 허리까지 굽이치는 검은 머리가 벽 위로 흐트러졌다. 붕대 가 감긴 왼팔을 매만지다 조금 삐 뚤어진 가면을 제대로 맞춰 쓰곤 입을 열었다.
"......치료해 준 건 고맙습니다. 이제 찾아온 이유를 말씀해 주시
죠.
"이게, 대체......
오두막에서 날 기다리던 디디는, 반쯤 시체가 된 날 보며 딱딱하게 굳었다. 물어볼 게 산더미 같았지 만, 온몸으로 퍼져 가는 마비 독으 로 인해 검을 들고 있는 것조차 힘 겨웠다.
"날 죽이러 왔습니까?"
"......뭐?"
"날 죽이러 왔냐고 물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나!"
"그럼 날 좀 도와주십시오."
이틀 밤을 새우고 난 뒤 데베라 떼와 맞서고, 숲속의 남은 마수들 을 모두 토벌한 뒤, 말을 타도 일 주일은 걸리는 거리를 맨몸으로 이 틀 만에 주파했다. 그 사이에 한 번 씻은 것 빼고는 휴식도 없었다. 의심이고 자시고 죽을 것 같았다.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나."
"선반에, 윽...... 페리윙클 파우더 가 있습니다. 그걸 물이랑 1:5로 섞고......•"
마비 해독제를 만들기도 힘든 상 태였다. 어쩌다 보니 귀족가 도련 님을 종처럼 부리게 되었으나, 그 가 날 돕길 원하는 기색이었으니 죄책감 갖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미, 미쳤는가! 왜 갑자기 옷 을......!"
"그럼 입고 치료합니까? 당신도 벗었으면서 왜 이럽니까."
침대에 기대 앉아 입고 있던 검은 와이셔츠를 거칠게 벗어던지니 디 디가 경악하며 제 두 눈을 가렸다. 그의 양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 다. 정작 벗은 나는 아무렇지도 않
았다.
디디와 처음 만났을 때 목소리 변 조 마도구를 착용하는 걸 잊어 여 자라는 건 이미 들켰다. 용병 일을 할 땐 움직임에 걸리적거리지 않게 하기 위해 가슴에 압박붕대를 둘렀 으니, 가릴 데는 다 가려졌단 소리 였다.
"손 떼시죠. 가릴 데는 다 가렸으 니까."
딱 귀족가 도련님 같은 반응에 난 혀를 차며 내 몸을 내려다보다, 살 짝 입매를 굳혔다.
"......그런데 좀 징그러울 수는 있 겠군요."
생뚱맞은 소리에 디디가 살짝 손 을 내렸다. 내 맨몸을 보게 된 그 가 순식간에 얼굴을 차갑게 굳혔 다.
"너, 몸이 왜 그래."
"멀쩡한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 까."
혼들리는 동공 앞에서 무심하게 대답했다.
평생 동안 검을 휘두른 소드 마스 터의 몸이다. 매끈하고 예쁜 게 더 이상했다.
마른 몸엔 오로지 근육뿐이었고, 목 아래부턴 온몸이 말 그대로 아 작 난 고깃덩어리를 얼기설기 꿰맨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치료 안 해 줄 거면 이리 주 세요. 내가 할 겁니다."
디디의 굳은 시선에, 상처투성이 몸에 와이셔츠를 덮어 가리곤 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상처를 입으며 살아온 삶에 후회는 없었지만 상처
한 점 없이 매끄럽던 그의 몸과 비 교하면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미안하다."
"......네?"
뻗은 내 손목을 살짝 잡아 내 손 을 막은 디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기 울이니 그가 울 듯 얼굴을 일그러 트렸다.
"네가, 이런 삶을 살게 해서, 미 안하다."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일렁이는 두
푸름을 지그시 응시했다. 요즘 어 린놈들은 왜 나이답지 않은 책임감 을 지고들 사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쩐지 몸에 힘이 쭉 풀려서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별 말 없이 그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려 쓰다듬어 주 었다. 귀족 모독죄고 뭐고, 이젠 생 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당신 탓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인생이다.
나는 책임감으로 찌든 푸른 눈동 자와 올곧이 마주하며 그렇게 대답
해 주었다.
"대답 안 할 생각입니까?"
하지만 도와준 건 도와준 거고 침 입한 건 침입한 거다.
붕대가 깔끔하게 매인 왼팔을 휙 휙 휘두르며 속으로 감탄했다. 디 디가 둘러 준 붕대였다. 도련님이 라 기대는 안 했건만 손이 꽤 야무 졌다.
그를 돌아보았다. 디디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홍차를 기울 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아한 명 화 한 점을 연상시켰다. 눈이 마주 치니 그가 눈을 곱게 휘었다.
'......상황이 반대가 됐네.'
얼마 전 저 자리에 앉아 디디를 치료했던 건 나였건만, 이젠 내가 상처를 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얼마 전 이 침대에서 이유를 묻던 건 디디였건만, 이번엔 내가 침입 의 이유를 묻고 있었다.
'••••••졸려.'
넉넉한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 붕대가 둘둘 둘린 왼팔을 느리게 주물렀다. 디디의 도움으로 치료를 마친 왼손은 더 이상 마비가 진행 되진 않았다. 허나 마비 해독제엔 진통제로 쓰이지만 강한 정신 착란 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있는 약초가 사용되었기에 정신이 몽롱했다.
"글쎄. 이유가 필요한가."
물음에 대한 대답도, 내가 했던 것과 같다. 날 놀리는 건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니, 그가 짐짓 울상 을 지었다.
"함부로 들어온 건 내 깊이 사과 하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반응 이 없기에 아무 생각 없이 당기니 그냥 열려 버리더군. 당황해하고 있는 사이에 그대가 왔던 거야."
"뭐...... 그건 안 잠근 제 탓도 있 으니 그리 할 말은 없군요. 그럼 오기는 왜 온 겁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네. 그냥 발걸 음이 이끌렸어."
"디디는 참새고 이 오두막은 방앗 간입니까?"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리니 큽 하고 급하게 숨을 들이켠 디디가 웃음을 참았다. 그가 나와 눈을 맞
춘 채 부드럽게 웃었다.
"얼마 전에 그대가 말했지. 사람 을 구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고."
"......그랬죠."
맹하게 눈을 끔뻑이고 있으니 디 디가 느리게 내 머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눈짓으로 허락을 구했다. 허 튼 짓을 하진 않을까 싶어 잠시 망 설이다, 그의 손목은 내가 건드리 기만 해도 부러트릴 수 있다는 걸 떠올리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디가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가느다랗고 곧은 손가락이 엉망으 로 흐트러진 내 머리를 정리했다.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손끝이 내 귀를 느리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눈을 휘었다.
"그것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 는 데 특별한 이유는 없지 않겠나, 슈슈."
매혹적인, 확연한 유혹의 의도를 담은 웃음이었다.
"사람이 참•• ... 됐습니다."
얼굴을 지나치게 잘 사용했다. 약 해지는 마음에 불퉁하게 얼굴을 구 기다 푹 한숨을 쉬었다. 이유고 자 시고, 지금은 너무 피곤했다.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자고 갈 겁니까? 침대 내줘요?"
온몸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지끈거 린다. 의심하기도 지쳤다. 지나치게 여상스러운 내 물음에 디디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때도 느꼈지만 위기 감이라곤 조금도 없군. 내가 누구 인지도 안 묻나?"
"아무리 자기 굴에 쳐들어온 존재 라도 사자가 개미를 두려워하겠습 니까. 물어봐도 누군지 말 안 해 줄 거 아닙니까."
일반인을 제압하는 것쯤이야 손도 안 대고 할 수 있었다. 내 신랄한 비유가 불쾌하지도 않은지 디디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호선을 그리 는 그의 입꼬리에선 후각을 마비시 킬 것만 같은 단내가 났다.
"그렇긴 하군. 그래도 그대가 물
어보면 대답해 줄지도 모르는데."
제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은 그가 느긋하게 턱을 괴었다. 굽힌 상체 로 인해 거리가 좁혀든다. 사자 굴 에 제 발로 기어 온 주제에 제 집 인 것처럼 여유로운 그를 보며 어 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객기라기보단...... 눈치가 비상하네.'
디디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위험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 가소롭지만 옳은 판단임은 분명했다. 나는 죄 없는 일반인을 해치지 않으니까.
"됐습니다."
한숨과도 같은 웃음을 뱉으며 고 개를 저었다. 망설임 없는 내 부정 에 디디가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 다.
"......궁금하지 않은 건가?"
"궁금하긴 합니다."
"그러면 왜?"
내 착각인지 몰라도 그는 조금 초 조해 보였다. 내가 궁금해하길 바 라는 것처럼.
그런 디디를 지그시 응시하다, 한 숨처럼 웃음 지었다.
"당신은 보나마나 귀족이겠죠."
귀족이 아닐 리 없다. 살짝 미간 을 좁힌 디디는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보다시피 평민입니다. 평민 인 나는 귀족인 디디를 알게 되면 이렇게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평민이 귀족 나으리 앞에서 편하게 침대에 앉아 있습니까. 예의를 차 리고 선을 지켜야 할 겁니다."
평민이 귀족에게 검을 들이민 것
자체가 옥살이를 해도 할 말 없는 일이다.
여유롭게 잔을 기울여 홍차를 입 안에 머금었다. 지금 이 순간의 편 안함은 우리가 서로의 특이점을 눈 감고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었 다.
"••••••아."
느리게 탄성을 뱉는 디디의 이마 를 친한 친구를 대하듯 검지로 툭 밀었다. 멍한 표정을 지은 그를 향 해 흐드러지게 웃었다. 정신이 몽 롱해 평소보다 유한 웃음이 나왔
다.
"그러니 귀족인 디디 아무개는 모 르는 걸로 하겠습니다. 우리 둘 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