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화
디디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디디와 나 사이엔 수많은 이해타산 들이 들어선다.
겨우 두 번 만나 봤다지만 나는 디디가 마음에 들었다. 대화의 주 파수가 꽤 잘 맞는다는 점이나, 침 착하고 우아한 태도나, 다정한 성 격 같은 것들. 늘 외롭던 이 오두 막에 타인의 온기가 들어차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당신은, 내 앞에선 그냥 디디로 남아 있어 줘요. 내가 당신 을 당신 자체로 볼 수 있도록."
일순 디디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리던 그가 한참 입을 떼지 못하더니 결 국 입술을 꾹 깨물었다. 투명한 물 위로 붉은 물감이 천천히 번져 나 가듯 그의 귓가로 붉은빛이 스몄 다.
"••••••젠장."
고개를 떨군 디디가 거칠게 마른 세수를 했다. 해독제의 부작용 탓
에 온몸에서 힘을 뺀 채 그를 바라 보고만 있었다.
"그대는......
급속도로 달아오르는 하얀 두 귀. 디디가 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사람을 참, 이상하게 만드는 재 주가 있어."
확실히 이상해 보이는 그의 반응 에 어리둥절하며 디디의 뺨을 쿡 찔러 보았다. 그가 크게 움찔한다. 손끝이 닿은 그의 왼뺨이 기이할 정도로 붉게 달아올랐다.
"늦게까지 잠을 안 자니 사람이 이상해지는 겁니다."
계속 얼굴을 두 손에 처박고만 있 었다.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이 멍해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디디를 맹하니 바라 보다 가볍게 넘겼다.
"자고 갈 겁니까?"
침구를 정리하며 다시금 물었다. 창밖을 곁눈질하니 매서운 눈보라 가 불고 있었다.
"자고 가야겠군요. 이 눈보라는 뚫기 힘듭니다."
단정 지으니 고개를 휙 든 디디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긴 하품을 뱉었다.
"자네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 게 하나!"
"그럼 뭐, 울면서 합니까?"
좀 더워 보이는 그를 이상하게 바 라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졸음으 로 발걸음이 바닥에 뚝뚝 달라붙었 다.
"......하룻밤만 신세 지겠네."
천장이 살짝 들썩거릴 정도로 퍼 부어지는 눈보라를 본 그가 희미하 게 속삭였다. 디디도 이걸 헤치고 돌아가는 건 무리라고 느낀 모양이 었다.
감기는 눈을 겨우 뜨며 중얼거렸 다.
"침대에서 자요. 내가 의자에서 잘 테니까."
얼굴을 겨우 진정시킨 디디가 어 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당연히 환자인 그대가 침대에서 자야하는 거 아닌가?"
"제가 아파도 디디보다는 훨씬 강 하니까요. 약한 사람이 침대에서 자는 게 맞죠."
울컥한 그가 할 말이 많은 듯 입 술을 움찔거렸지만 결국 반박하진 못했다.
"......내가 약한 건 맞네만 그렇게 까지 말하면 좀 상처받지 않겠나?"
'네가 약한 걸 어떡해.'
디디의 근육 잡힌 몸을 내려다보 다 혀를 찼다. 몸은 좋으나 무력의 기운은 없다. 내 앞에선 여린 강아 지 한 마리일 뿐이었다.
"날 침대에서 재우고 싶습니까?"
"애초에 그대가 이 오두막 주인인 데 그게 당연하지 않나."
"그럼 어쩔 수 없군요."
"그래. 그게 도리에 맞는 거지."
"같이 자도록 합시다."
"그래. 그렇게...... 뭐?"
고개를 끄덕이던 디디의 몸이 순 식간에 뻣뻣하게 굳었다. 멍한 되 물음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의 잘난 얼굴에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졸려.'
반쯤 감긴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굳어 버린 디디를 뒤로 하고 침대 에 픽 누워 버렸다. 머리가 잘 돌 아가지 않았다. 연약한 그를 침대 에서 재워야 할 것 같았지만 오늘 은 나도 침대를 포기하고 싶지 않 았다.
'사랑니 마취한 느낌이야...... 수 면내시경 마취나......
마취로 인해 흑역사를 산더미처럼 쌓았던 전생을 떠올리며 침대를 굴 러다녔다. 원래라면 해독제에 들어 가는 약초 하나 때문에 이러지는 않았겠지만, 상태가 최악인 상태로 정신 착란 부작용을 이겨 내려니 영 무리였다.
머리가 멍하고 졸음이 온몸을 사 로잡았다.
"뭐 합니까. 누우세요."
몽롱한 눈을 굴리며 침대에 남는 공간을 툭툭 쳤다. 침대는 완벽한 1인용이었지만, 옆으로 누워 등을
맞대면 둘이 누울 수 있을 수준이 었다.
" □ O X "
-r" "TTT •
무언가에 영혼을 흡입당한 듯 멍 하던 디디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 기 시작하더니, 이내 푸른 눈동자 와 정확한 반전을 이룰 수 있을 만 큼 붉어졌다. 그의 동공이 쉴 틈 없이 혼들렸다.
"......괜찮으십니까?"
툭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두 귀 를 멀거니 바라보다 그에게로 얼굴
을 가까이했다. 경기 일으키듯 황 급히 내게서 물러선 디디가 이를 악물었다.
"진짜, 진짜 미친 건가?"
"진짜 미친 정도는 아니고, 한...... 반 정도는 미친 것 같아 요."
머리가 띵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잠에 잠긴 눈을 힘겹게 끔뻑이니 디디가 환장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한 침대 좀 같이 누웠다고 두근거리는 나이는 아니잖습니까."
물론 그야 팔팔한 20대가 맞다. 하지만 나는 정신 연령이 약 50살 인, 겉만 젊은 늙은이였다. 지금 삶 에선 이성과 교제 한번 안 해 봤다 지만 과거엔 꽤 시원하게 놀던 경 험이 있었기에, 어린놈이랑 한 침 대에서 잠만 자는 것쯤이야 별 감 흥도 안 들었다.
"불 끄고 이리 와요. 안 덮치니 까."
대자로 누워 고개를 훅 젖힌 채 그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내 머 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리며 머리
카락에 가려지던 목선이 드러났다.
반쯤 감긴 눈 사이로 디디의 목울 대가 울렁이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 다.
"지금 안 누우면 내쫓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해야 한다는 걸 성 가셔하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디디가 헛웃음을 뱉었다. 부드러 워 보이는 연갈색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은 그가 벌떡 일어났다.
"난 정말 그대가 미워.
"네, 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빨리 자는 것밖에 없었다. 느릿한 몸짓으로 오두막의 불을 끈 그가 침대에 털 썩 걸터앉았다. 두 사람의 무게를 버티는 일인용 침대가 크게 삐걱거 린다. 가까워진 바닐라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침대에 앉기까지 한 그는 눕는 것 을 주저했다. 부끄러운가 보다 생 각하며 기다리기를 몇 분.
"아 쫌! 자! 자라고!"
" 무슨......
결국 확 상체를 일으켜 그의 팔을 콱 잡아당겨 버렸다. 굳어 있던 디 디의 몸이 쏠리며 내 옆에 쓰러졌 다. 아예 숨도 못 쉬고 얼어 버린 그의 목덜미를 턱 잡았다. 미간을 확 좁힌 그가 뜨거운 숨을 뱉었다. 바닐라 향이 후각을 잠식했다.
살짝 고개를 틀어 천천히 붉은 그 의 귓가 가까이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지금 당장 자지 않으면 수면이 아니라 영면을 하게 해 드리지."
피곤에 찌든 음울한 목소리가 고 저 없이 퍼져 나갔다. 디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소드 마스터의 감각은 절대적이 다. 현재 감각이 많이 죽고 직감도 무뎌진 상태라지만, 바로 옆에 멀 쩡히 깨어 숨 쉬고 있는 사람이 있 는데 잠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자요, 자."
키 차이 탓에 내 머리가 그의 가 슴팍쯤에 닿았다. 푹 한숨을 쉰 그 가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진짜, 너는...... 하......
솔직히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심 장소리가 너무 커 잘 수는 있을까 싶었으나, 또 계속 들으니 힙합 스 타일 자장가 같아 노곤하게 눈을 깜빡였다.
잠 잘 생각이 없어 보이는 디디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살짝 쓰다듬 어 주었다. 그가 숨을 멈췄다. 디디 는 체온이 뜨거웠다. 본능적으로 따뜻함을 찾아 그의 가슴팍에 머리 를 기대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잘 자요...... 좋은 꾸우움......
그리고 난 잠들었다. 아주 푹.
'죽을까.'
제국의 황태자, 디에고 솔라티네 는 그의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작 은 일인용 침대에 구겨진 채 끊임 없이 생각했다.
그의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기다랗 고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 가슴 팍으로 닿아 오는 조용한 숨소리. 코끝을 찌르는 은은한 체향. 자신
의 허리에 팔을 두른 가느다란 팔.
터져 버릴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 키려 부단히 노력했다. 이 소드 마 스터는 지나치게 예민하니 그가 조 금이라도 소음을 냈다가는 단숨에 깨 버릴게 뻔했다. 이러지도 저러 지도 못하는 디에고는 정말 죽고 싶었다.
아주 천천히,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허리까지 굽이치며 살랑거리는 머 리칼. 검은 가면 아래 창백하다 못 해 투명한 피부와 그 위를 덮은 딱
딱한 근육. 제 머리를 만진 채로 잠이 든 바람에 여전히 제 머리 위 에 올라 있는 투박한 손. 제 숨결 에 팔랑이는 기다란 속눈썹. 꾹 물 린 산호색 입술까지.
' 빌어먹을!'
디에고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달아 오른 몸을 식히려 해도 제 품에 작 은 인영이 끊임없이 열기를 전해 왔다. 피부가 닿는 부분 부분이 타 오를 것 같았다.
이건 고문이었다.
이제 막 싹을 틔우던 감정 위에 영양제와 비료가 무자비하게 퍼부 어지는 기분이었다. 이 감정이 무 엇인지 알고 싶어 다시 이곳을 찾 긴 했지만, 이렇게나 빠르게 알고 싶진 않았단 말이다.
첫눈에 반했다는 것부터 어이가 없는데 이런 본능적인 작용으로 자 각하게 되다니, 정말 가벼운 사람 이 된 것 같았다. 그는 죄책감과 회의감, 그리고 뛰는 심장 사이에 서 제정신을 찾기 힘들었다.
'아, 제발
뒤척이던 카슈미르가 작은 손을 그의 목 위로 올렸다. 긴 손가락이 목덜미를 스쳤다. 디에고의 얼굴이 목덜미까지 온통 홧홧해졌다. 그는 정말 죽고 싶었다.
'......아주 잘 자는군.'
디에고는 자신을 마구 혼드는 장 본인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그 를 5살 먹은 어린애처럼 보던 작은 인영은 제국의 황태자를 바디 필로 우처럼 안고 세상 편한 얼굴로 자 고 있었다.
그 태평한 얼굴을 확 꼬집고 싶었
으나, 함부로 가면 위에 손을 댔다 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디에고가 푹 한숨을 쉬었다. 어느 새 창문 새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 었다.
'잠은 다 잤군.'
그에겐 너무도 기나긴 밤이었다.
* * *
"후 "
나는 나무에 이마를 박은 채 한참
숨을 골랐다. 물에 젖어 해초처럼 된 머리카락이 마구 풀어 헤쳐져 얼굴을 간지럽혔다.
'같이 자죠.'
"아악! 악! 미친 새끼!"
쾅! 쾅!
거친 나무 기둥 위로 미친 듯이 머리를 박았다. 한참 동안 샘에 처 박고 있었던 탓에 물이 뚝뚝 떨어 지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들이 사 방으로 튀었다.
'불 끄고 이리 와요. 안 덮치니 까.'
휙 몸을 돌려 바로 뒤에 있던 샘 에 머리를 처박았다. 차갑다 못해 뼈가 얼어 버릴 것 같은 한겨울의 샘물이 머리를 적셨다.
마취약으로 제정신이 아니던 어젯 밤을 떠올리면 딱 혀를 깨물고 죽 어 버리고 싶었다.
'미친 새끼! 왜 그런 소리를!'
내 정신 연령이 50년가량을 넘어 섰다고 해서 부끄러움과 성애적 관
념이 사라진 건 아니다. 환장하겠 다는 표정을 짓던 디디를 떠올리면 그를 볼 면목이 없었다.
' 미안합니다.'
멀찍이 있는 오두막을 바라보다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조금 늦은 오전쯤에 눈을 뜨니 디디를 죽부인 처럼 안고 있었던 나는, 거의 기절 한 것처럼 잠든 디디를 깨울 수도, 그를 안고 있는 채로 버틸 수도 없 어 도망을 택했다.
[어젯밤엔 감사하고 죄송했습니 다. 원하는 만큼 쉬시다 눈보라가
좀 잦아들면 알아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뒤 쪽지를 읽을 디디가 내게 너무 분노하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 었다.
조금 전까지 물기로 젖어 있었으 나 매서운 한파로 인해 살얼음이 껴 버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털어 냈다.
"언니! 왔어?"
작고 허름한 자택의 문을 여니 주 방에서 식사를 차리던 아리아가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방긋 웃은 채 고개를 돌리던 아리아의 얼굴은 내 꼴을 보는 순간 살짝 굳어 버렸다.
' 이런.'
붕대가 둘둘 감긴 왼팔을 등 뒤로 숨기며 어색한 웃음을 띠고, 서늘 한 기색이 엿보이는 아리아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다녀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