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화
아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 술을 꾹 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 숨을 고르던 아리아는 이내 느리게 고개를 들고 내 허리에 팔 을 둘렀다. 결국, 아무것도 묻지 않 은 채.
"잘 다녀왔어."
별거 아닌 이 대화에 담긴 감정들 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아리 아와 나만이 알 것이다.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와 아직 죽 지 않았다는 안심. 혼자 둬야만 했 다는 죄책감과 혼자 있어야만 했던 외로움.
우리는 왜 이렇게 늘 아파야 할 까.
아이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슬 퍼서 나도 슬프게 웃고 말았다.
"자! 이제 밥 먹자! 마침 밥 먹으 려고 하고 있었어!"
한참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숨을
죽이던 아리아가 방긋 웃으며 부엌 으로 몸을 돌렸다. 나도 아리아의 붉은 눈가를 못 본 척한 채 작은 식탁 앞에 앉았다.
"빵집 마리아 아주머니가 덤을 많 이 챙겨 주셔서 오늘 식사는 풍족 해."
재잘재잘 떠드는 아리아가 식탁 위로 접시들을 올렸다. 저렴하지만 충분히 먹을 만해 보이는 빵들과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는 크림수프. 얼마 전 겨울을 대비해 편백나무를 장작으로 잔뜩 패 왔던 덕분에 집 안은 따뜻했다.
숟가락으로 수프를 뜨며 재잘거리 는 아리아에게 거듭 맞장구를 쳐 주었다.
"흐음. 데카르도 후작 영애가 검 은 가면 쓴 기사 하나를 찾는다 네."
"크 "
그리고 먹던 수프를 그대로 뱉어 버렸다. 아연실색한 얼굴로 앞에 앉은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읽는 걸 좋아하는 아리아는 식사 시간에 도 신문을 읽느라 바빠 보였다.
"뭐, 뭐라고......?"
"르웰린 데카르도 말이야.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크게 올렸네."
여상스럽게 대답하던 아리아는 숟 가락을 인중에 댄 채 멍하니 굳어 버린 날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탐색하는 기색이었다. 아리 아의 날카로운 눈빛을 애써 피하며 더듬거렸다.
"자, 자세히 좀 읽어 줘."
"흠. 어려울 건 없지• 약 일주일 전 수도의 시내로 나갔던 르웰린 데카르도 백작 영애는 술 취한 행 인과 마주쳐 어려움을 겪을 뻔했으
나 홀연히 나타난 한 기사 덕분에 위험을 면했다. 영애는 자신을 구 해 주고 사라진 이 기사를 찾고 있 으며, 제 앞에 나타날 시 커다란 보상을 해 줄 거라고 장담했다. 백 작 영애는 그 기사가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으며, 변조된 목소리를 냈고, 작은 키와 몸집의 소유자에, 검은 오러를 사용한다고 증언했다. 해당 사실을 조합했을 때 '검은 재 앙' 용병왕 미르와......
"쿨럭, 쿨럭!"
빼도 박도 할 것 없이 나였다. 먹 은 것도 없는데 기침이 터져 나왔 다. 당혹스러워하는 나를 보는 아
리아의 얼굴 위에 느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먹잇감을 본 맹수의 얼굴과도 비 슷한, 내가 잘 알고 있는 표정.
"그러고 보니, 백작 영애가 기사 를 만났다는 거리가 우리가 저번에 갔던 카페 바로 옆이네. 날짜도 그 때랑 같고."
아리아가 목표물을 사냥할 때 짓 는 표정이었다.
"그으래......? 시, 신기하네."
"흐응. 신기해?"
턱을 괸 아리아가 고개를 기울였 다. 사람의 표정을 읽으며 분위기 를 주도하는 데 있어서는 소드 마 스터인 나보다 뛰어난 감각을 보이 는 아리아는 무언가를 감지할 때마 다 저런 의미심장한 태도를 보였 다.
사람을 말과 태도로 사냥하는 것 에 너무도 익숙한 포식자의 눈빛.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고개 를 끄덕였다.
"언니가 신기하다면 신기한 거겠 지."
어깨를 으쓱인 아리아가 묘한 눈 빛을 거뒀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평하게 수저를 드는 모습이 한 번은 봐 주겠다는 것으로 보였으나 제발 아니길 바랐다.
"그런데 말이야 언니."
상체를 살짝 숙인 아리아가 흐드 러지게 눈꼬리를 휘었다. 그 모습 은 '요정의 밤'에서 으레 아리아를 표현할 때 사용하곤 하던 '봄의 요 정' 같은 웃음이라기보단 사람을 홀리는 사이렌 같은 웃음이었다.
"늘 생각하지만, 언니는 멍청하도 록 착해."
나만 위하지 못하고 다른 쓸데없 는 것들도 돌아볼 만큼.
청각을 사로잡는 옅은 속삭임. 내 게는 자주 보여 주지 않는 날것 그 대로의 모습.
솔직히 너무 무서워서 기절할 뻔 했다.
묘하던 식사 시간이 끝난 뒤, 쉬
는 날을 맞이한 나는 낡은 소파에 걸터앉아 아리아가 읽던 신문을 슬 그머니 들었다.
'이건 보기도 싫다.'
1면 아래쪽에 커다랗게 걸린 광 고를 보며 인상을 썼다. 짜증스럽 게 앓는 소리를 내는데 1면 정면에 큰 제목으로 쓰인 기사가 눈에 띄 었다.
'아타라 왕국의 왕권 교체라.'
유심히 볼 가치가 있는 기사였기 에 집중해서 읽어 내렸다.
[올해 여름, 본격적으로 왕위 쟁 탈전에 발을 들였던 알렉산드로 1 세는 반대하던 귀족들을 대거 숙청 하며 이번 가을 왕위에 올랐다. 그 의 즉위식엔 제국의 사신들도 함께 했다. 알렉산드로 1세는 즉위식에 서 '여태껏 탈이 많았으니 한동안 은 국가를 안정시키는 데 집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아타라 왕국의 사절단은 오는 봄 제국을 방문하 며.......]
긴 기사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살펴보다 작게 안심했다. 아타라 왕국 즉위와 관련된 내용은 원작과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즉위가 이렇게 빨랐 던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왕이라고 하긴 했는데.'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알렉산드로는 소설 중후반부에 등 장하는 캐릭터였기에, 원작 내에서 그의 초기 행적은 잘 서술되지 않 았다. 즉위가 조금 빠르다는 기묘 한 감상이 들긴 했으나 다른 쪽으 로 생각을 돌렸다.
'이 자식이 사위 후보란 말이지.'
느리게 입술을 쓸며 씨익 웃었다.
내가 아타라 왕국에 관심을 가지 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 알렉산 드로가 아리아의 남자기 때문이다.
'내 동생 진짜 대단하다니까. 거 물들만 망태기에 집어넣었어.'
어쩐지 뿌듯해졌다.
아타라 왕국은 제국의 동맹국 중 하나로, 대륙의 이단아와도 같은 북부 지역과 밀접되어 전쟁이 자주 일어나는 왕국이었다. 때문에 상당
한 무력을 지녔다.
'보석 자원이 어마어마해 부와 무 모두 갖춘 나라지.'
제국의 패왕이라 불리는 챔버러가 대륙을 평정한 이후, 대륙의 모든 나라와 민족이 제국 앞에서 무릎을 꿇었으나 오직 아타라 왕국만이 동 맹국으로서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여태까지도 아타라 왕국은 제국의 형제 국가라 불리며 제국과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후 몇백 년이 지난 지금. 홀연 히 나타나 피와 검으로 왕좌를 쟁
탈한 젊고 막강한 왕. 알렉산드로 레오네 드 아타라.
'라이너와 함께 검사 포지션이었 지.'
피 묻은 왕관을 쟁취한 그는, 라 이너와 마찬가지로 소드 마스터를 앞둔 강력한 소드 익스퍼트 검사였 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 자기 형제를 몰살하고 귀족 대부분을 숙청했다 지.'
타닥거리는 평화로운 장작불 소리
를 감상하며 그의 악명을 떠올렸 다.
라이너가 올곧고 뻣뻣한 정석적인 기사라면 알렉산드로는 그와 정반 대로서, 말 그대로 검든 망나니였 다.
'수틀렸다 하면 검 드는 미친놈이 지만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한 포지 션이었지.'
만약 알렉산드로가 아리아에게 난 폭하게 굴었다면 나는 알렉산드로 와 아리아의 접촉을 막을 방법을 머리 터지도록 강구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짐승남 수준이 아니라 짐 승 그 자체로 미쳐 돌아가던 알렉 산드로도 아리아 앞에선 꼬리 치는 강아지가 되곤 했으니, 사위 후보 1 정도론 남겨 둬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신문에 커다랗게 찍힌 알렉산드로 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17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성숙 한 외모. 짧게 다듬어져 부드럽게 휘날리는 새하얀 백발과 지루한 듯 나른하게 뜬 연녹색 눈동자. 날카
롭고 강직한 인상과 사진으로도 느 껴지는 위압적인 분위기까지.
소름 끼치도록 잘생긴 얼굴이었 다.
'이 정도면...... 아리아 앞에 얼굴 들이밀 수준은 되네.'
어리고 돈 많고 권력 있고 잘생겼 다. 작중 망나니 같은 그의 행적이 걸리지만, 아리아에겐 순한 양이 되는 만큼 아슬아슬한 합격점을 줄 까 했다.
'그런데......
미간을 구기며 사진을 노려보았 다. 지금 들어서는 안 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깜박거리는 직감이 신경을 거슬렀다.
다 큰 청년의 사진 위로 신기루처 럼 일렁거리는 어린 소년의 얼굴. 어디서 본 것만 같은 익숙함.
통상적으로 '기시감'이라 부르는 감정이었다.
'라이너도 그랬는데......
직접 만나 본 유일한 남주인 라이
너에게서도 이런 기시감을 느꼈었 다는 것이 기묘했다. 계속 좁혀지 려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알렉산 드로의 사진에 누군가가 겹쳐 보였 다.
'대답해! 왜 날 살린 거냐고!' 슈슈, 누나.
처음 만났을 땐 상처받은 고양이 처럼 굴던 어린 소년. 헤어질 때가 돼서야 보드라운 뺨을 붉힌 채 겨 우 누나라는 호칭을 입에 담던 작 은 소년. 보드라운 갈색 머리에 동 그란 연녹색 눈을 빛내던,
'••••••잠깐.'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고 사진 속 알렉산드로와 기억 속 소년을 대조 했다. 머리색이 다르긴 하지만 눈 이 꽤 닮았다.
'......아냐. 분위기가 너무 다르잖 아.'
휘휘 고개를 저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지워냈다.
내가 만났던 소년은 성격은 미친 개 버금갔지만 그래도 앙칼진 길고
양이 같은 감이 있었다. 저런 거대 한 맹수 한 마리가 아니었다.
'그 자식...... 잘살고 있으려나.'
조금 쓰게 웃다 신문을 접었다. 소년에 대한 생각으로 기분이 가라 앉아 더 읽고 싶지 않았다.
'하기야, 지금 내가 누구 걱정할 처지인가. 잘살고 있겠지. 어디 가 서 사기당할 성깔은 아니었으니까.'
한 성깔 하던 소년을 떠올리며 피 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전쟁에도 대비해야 하는데.'
아타라 왕국 하니 저절로 떠오르 는 재앙에 얼굴이 굳었다.
내가 원작이 비틀릴 때마다 아리 아의 피폐물이 될까 걱정하는 이유 가 있다.
'실제 원작 후반이...... 꽤 피폐했 으니까.'
원작 후반에선 제국과 북부 민족 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 죽는 이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착한 아
리아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 고 치유사로서 전쟁에 나가게 되 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며 점점 피폐해져 갔다.
'그 시련이 그렇게 길지만은 않았 지만.'
난 아리아가 짧은 시련도 없이 늘 행복하기를 바랐다.
'전쟁을 막을 수는 없어.'
당연하게도 전쟁은 내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의 사건이 아니다. 이는 오랫동안 배척당하던 북부인들이
긴 시간 동안 준비해 온 제국과의 거대한 전쟁이었으니까.
'하지만 도울 수는 있겠지.'
소드 마스터는 검 한 자루와 단신 만으로 재앙으로 불리는 자들. 내 도움이 있다면 전쟁은 더 빨리 끝 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리아가 끼어들 틈도 없 이 말이다.
'준비해야 해.'
잠시 맞은편에 앉은 아리아의 눈
치를 살폈다. 혼들의자에 앉아 책 을 읽던 아리아는 어느덧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아이처럼 잠든 모습이 사랑스러워 걱정도 잊고 푸 스스 웃고 말았다.
아리아를 안아 들고 방으로 발걸 음을 옮겼다. 해가 기웃거리는 느 지막한 오후. 겨울이 찾아온 창문 밖엔 작은 눈송이들이 내려앉고 있 었다.
"잘 자, 아가."
아리아를 눕혀 두꺼운 이불을 꼭 꼭 덮어 준 뒤 동그란 이마 위에
입술을 맞췄다. 조금 찡그리고 있 던 아리아의 미간이 화사하게 풀렸 다.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온 나는, 집 한구석에 모여 있는 양피지를 꺼내들고 탁자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겐 긴 밤이 될 듯했 다.
귓가로 꽂히는 작은 신음에 번쩍 눈을 떴다.
밤의 장막이 드리운 한밤중. 창문 밖의 세상은 눈송이들로 인해 새하 얗게 변모했다.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한 눈송이는 땅 위에 내려앉으며 점점 더 쌓이고 있었다.
'방금 뭐였지.'
희미했지만 분명 들었다.
날카롭게 신경을 세웠다. 집 안에 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아리아의 것 이 유일하다. 사방에 뻗어 놓은 오
러에 걸린 존재는 없었다.
"흐으
' 그럼••••••
소리의 출처는, 하나뿐이었다.
탁자에 엎드리고 있던 몸을 천천 히 일으키고 양피지를 주머니에 쑤 셔 넣었다. 탁자 위에 놓인 불빛 마도구를 집어 들었다. 마도구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제발.'
섬광처럼 떠오른 가정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라며 좁은 집에 단 하나 뿐인 방으로 성급하게 발걸음을 옮 겼다.
벌컥.
" 그고 O 으 "
-I , - "I •
온몸이 굳었다. 누군가 세계의 종 말을 고한 것처럼. 막을 수 없는 재해를 코앞에 둔 사람처럼, 모든 사고가 정지하고 정신이 아득해졌 다.
"아, 파......
붉은 피로 물든 하얀 침대보. 아 리아의 입가를 장식한 혈혼. 마른 입술 틈새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고통 어린 신음. 비처럼 흐르는 식 은땀. 희미해진 심장 박동. 불안정 한 호흡. 눈가에 아롱진 눈물.
"•"•••아리아!"
아리아가 위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