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화
모든 인간은 연약하다.
검으로 산을 가르는 소드 마스터 도, 손짓 한 번으로 해일을 만드는 대마법사도, 한 나라의 황제도, 국 왕도, 결국 본질은 한 줌의 티끌일 뿐이었다.
인간은 모든 인과응보에 저항할 수 없으며, 한 치 앞조차 예언할 수 없다. 생과 사는 인간의 주관이 아니고, 인간은 예상을 벗어나는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
"언니•••••• 아, 파•..."
그것은 재앙이라 불리는 용병왕 미르에게도, 험한 인생을 헤쳐 온 카슈미르에게도 마찬가지 였다.
쨍그랑!
손에 힘이 풀리며 쥐고 있던 마도 구가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 각이 났다.
빛이 사라진 공간을 어둠이 메웠 다. 시야가 가려졌음에도 원망스럽
게 뛰어난 감각들은 죽어 가는 사 랑을 온몸으로 느꼈다.
"......아리아."
목이 졸린 듯 처참한 소리가 입술 사이로 튀어 나왔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감 정이 범람한다. 온몸을 감싼 오러 가 요동쳤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뛰는 심장을 토해 내고 싶었다.
나는 생생히 무너졌다.
' 왜?'
원작이 뒤틀렸다. 아리아는 원작 과 다른 시간에 쓰러졌다.
요정 숲의 약수를 주기적으로 복 용시켰으니 몸 상태가 더 나아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늦게 쓰러지 면 쓰러졌지 더 일찍 쓰러지는 건 내 예상 안에 없었다. 몸이 많이 안정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쿨럭."
" 아리아!"
수많은 의문들은 침대보를 적시는 피와 함께 바람에 날리는 티끌처럼
사라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기듯이 침대 앞으로 다가가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로 아리아를 안아 들었다. 창백하게 식어 가는 몸과 느린 심장 박동이 바로 앞에서 생 생히 느껴졌다.
죽어 가는 사람의 상태였다.
'안 돼.'
시야에 투명한 물감이 번지는 듯 앞이 뿌예졌다. 세계가 무너지는 파열음이 귀를 울렸다. 충격으로 굳어 버린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
았다.
'생각, 생각을, 생각을 해야 하는 데,'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이성적인 사고는 되지 않고 북받치는 감정만 이 온몸을 지배했다.
너무 힘들다. 심장이 짓이겨지는 것 같다. 모든 것을 놓고 그저 울 고 싶었다.
나의 세계가 파괴되는 참혹한 재 앙 앞에서 날 일어서게 한 건 단 하나였다.
'살려야 해.'
아리아는, 내 친애하는 사랑은 여 기서 죽어선 안 됐다. 옅어지는 정 신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까드득, 이를 악물었다. 그럼에도 정신이 자꾸 옅어져만 갔다.
'빌어먹을! 정신 차려!'
쾅! 쾅! 뢍!
광인처럼 벽에 머리를 처박았다. 튀어나온 못에 긁힌 이마에서 굵은 핏줄기가 떨어지고 고통이 머리를
울렸다. 시야가 핑 돌았다.
누군가 뇌를 잡고 억지로 뒤흔드 는 느낌.
잠시 토기가 올라오긴 했으나, 정 신을 들게 하기엔 충분했다.
'방법. 방법을 찾아야 해.'
혼란스러워할 시간도 없다. 점점 더 차가워지는 아리아의 몸을 힘껏 안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찢어지며 연한 입술 피부 위로 세 차게 흐르는 핏물이 비렸다.
현재 아리아가 아픈 이유는 아리 아가 요정 혼혈이기 때문이었다. 물고기가 살기 위해선 물이 필요한 것처럼, 요정들도 요정 숲의 기운 이 있어야 살 수 있었다. 요정들이 요정 숲에서만 머무는 폐쇄적인 종 족이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요정 숲의 정기를 받지 못한 요정은 천천히 말라죽어 갔 다.
'요정 숲의 약수는 일시적으로 상 태를 지연시킬 뿐이야. 원래는 요 정 숲에서 살아야 하는 게 맞지만 아리아가 제국에서 살기를 원하는
이상 장기적인 수단이 필요해.'
그 수단은 원작에서 설명된 바 있 다. 바로 요정 숲의 정기. 요정 숲 의 약수보다 기운이 훨씬 짙게 농 축된 정기는 한 번 마시면 10년쯤 은 가볍게 버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희귀하지.'
요정 숲의 정기 한 병을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이 무려 100년이다. 얻 는 것도 요정들과의 거래밖에는 방 법이 없는데, 폐쇄적인 요정들은 인간들과 웬만해선 소통하지 않아 서 요 몇십 년 간 아예 수입 자체
가 없었다.
이 희귀한 정기를 현재 보유 중일 단체를 찾아야만 했다.
'프레이야? 데카르도? 아인하르 트? 태양 신전?'
나, 혹은 아리아와 접점이 있는 권력 있는 단체들을 두서없이 떠올 렸다.
부유한 프레이야 백작가가 요정 숲의 정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건 원작에서도 등장한 내용이다.
데카르도 후작가의 경우 보석부터 골동품까지 수많은 귀중품을 수집 해 저택에 없는 게 없다는 소문이 돌았으니 데카르토 후작가도 지니 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인하르트 후작가의 경우 검소함 을 중시하는 기사들의 가문인지라 있다고 확신할 순 없었으나, 유서 깊은 가문인 만큼 수집품으로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태양 신전의 경우 창고에 제물로 받은 귀중품들이 넘쳐 난다고 하 니, 정기도 있을지도 몰랐다.
'프레이야는 우연이 겹치면서 도 와준 것뿐이야. 데카르도도, 르웰린 데카르도가 내게 보상을 해 주겠다 곤 했지만 그 비싼 요정 숲의 정기 까지 내어 줄 리는 없어. 아인하르 트는 라이너에게 검부터 들이민 나 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 태양 신전 은 대신관인 엘이 내게 호의는 보 이지만 이유가 확실한 호의도 아니 야!'
과열된 두뇌가 터질 것 같았다.
없다. 나와 아리아를 도울 단체가 없었다. 거친 숨을 뱉으며 아리아 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코를 찌르
는 혈 향에 죽음의 향기가 섞여 날 미치게 했다. 짐승의 울부짖음 같 은 비명을 애써 삼키며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크리시스 공작가.'
그리고 섬광처럼 떠오르는 이름 하나.
유서 깊고 부유한 가문으로, 황가 와 신전에 버금가는 귀중품 수집 창고를 지녔다는 막강한 단체. 원 작에서 카슈미르를 받아 준 전적이 있으며, 무(武)에 가장 관심이 많 고, 도와달라고 뻐길 명분이 있는
존재.
'나의 아버지, 카이사르 크리시 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시야를 가리는 눈물과 이마에서 흐르는 핏방울을 거칠게 닦아냈다. 더는 지체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 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세운다. 두꺼 운 망토로 차가운 아리아의 몸을 덮고 작은 몸을 안아 들었다. 다른 모든 변장 도구를 뒤로한 채 검은
가면으로만 얼굴을 덮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공작위에 올랐다는 카이사르에게 딸이라는 명분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 다.
허나 상관없었다. 나 또한 그 얄 팍한 명분에 기댈 생각이 없었으니 까.
철컥.
허리춤에 검집을 찼다.
딸이라는 신분은 내 말을 듣게라
도 하려는 미끼에 불과했다.
나는 그에게 딸이란 이유로 선물 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미르라는 이름을 내걸고 거래를 청할 거야.'
충직한 한 자루의 검이 되어 쟁취 할 것이다.
공작가와 노예 계약을 하게 될지 라도, 일생을 크리시스 가의 검으 로 이지 없이 휘둘러질지라도, 아 리아만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받 아들일 수 있었다.
"제발...... 조금만 버텨."
내 사랑의 하얀 얼굴 위로 투명한 물방울들이 떨어진다. 아리아의 둥 근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작은 몸을 단단히 고쳐 안고, 창문 밖으로 뛰 어내렸다.
"난 절대 널 못 보내."
혼들리는 감정에 동화되어 광기 어린 난폭함으로 날뛰는 오러를 온 몸으로 내뿜으며 땅을 딛고 도약했 다. 폭발적인 마나가 두 발을 감쌌 다.
나는 아리아를 품에 안은 채 순식 간에 마을을 벗어났다.
크리시스 저택은 늘 무거운 침묵 을 유지했다.
첫째는 크리시스의 큰 주인과 작 은 주인이 소란을 싫어하기 때문이 었고, 둘째는 황가와 신전 외에 그 어떤 단체도 우위에 두지 않는 고 고한 최강을 감히 건드리는 이들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하얀 것들이 세상을 뒤덮 은 한겨울 밤이었다.
눈 내리는 소리만 가득한 고요한 밤. 공작을 포함한 대부분의 이들 이 잠에 든 늦은 시간. 잠에 들지 않은 얼마 되지 않는 이들 중 하나 인 크리시스 저택의 총괄 집사, 테 일러는 해가 뜬 이후에 해야 하는 일들을 바쁘게 정리하고 있었다.
크리시스 저택의 사용인들은 늘 조용히 바빴다. 얼마 안 되는 사용 인들로 거대한 저택을 관리해야 했 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바쁜 사용인들 중에서도 가장 바 쁜 테일러의 하루는 길었다. 오랫 동안 저택에 종사해 온, 나이 지긋 한 노년 사내의 하루는 늦은 밤에 끝나 이른 새벽에 다시 시작했다.
그날 밤도 그런 일상의 연장선일 뿐이었고, 그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쾅
범상치 않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 리였다. 깨어 있던 이들은 기겁하 고. 잠들었던 이들조차 벌떡 일어
날 법한 소음이었다.
"제기랄! 문 열어! 나오라고!"
잠자는 악마의 침대를 부수는 행 위에 가까웠다.
쾅! 쾅쾅!
"하이네, 사용인들을 진정시키게. 내가 나가 보겠네."
"네, 네!"
테일러는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 다. 감정 통제는 공작가의 오래된 사용인으로서 쉬운 일이었다. 혹여
나 사용인들의 떠들썩함이 주인의 심기를 더더욱 거스를까 싶어, 테 일러는 가까이에 있던 시종에게 명 을 내렸다.
밤 귀가 예민한 작은 주인은 북부 지역 작은 마을로 떠났으나5 감각 이 예민한 큰 주인은 진즉에 눈을 떴을 게 분명했다.
하이네가 사용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황급히 뛰어나간 사이, 테일 러는 밤손님을 맡기 위한 채비를 했다.
'주인님께 원한을 가진 자인가.
악마의 잠을 방해한, 정신이 한 바퀴 돈 것 같은 인물에게 대입하 기 좋은 대상이었다.
테일러는 여기저기 차고 넘치는 주인의 원수들을 속속히 떠올리며 차근히 밤손님의 후보를 추렸다.
테일러는 살벌한 기세로 뒤혼들리 는 문을 열지도, 가만 두지도 못하 고 당황한 얼굴로 옹기종기 모인 사용인들 사이를 헤치고 나갔다.
"이러지 마십시오, 미르 님! 이러 시면 곤란합니다!"
"문 열어! 제발!"
문 밖에서 기사들과 침입자의 실 랑이가 들려왔다. 기사들의 당혹 어린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운 처절 한 호소 아래 묻혔다.
'......미르? 용병 미르?'
문으로 다가가던 테일러가 상상치 도 못한 이름에 멈칫했다.
용병 미르.
가난한 마을들을 돕는 영웅으로 유명하며, 대륙에 얼마 되지 않는
소드 마스터에 마수 토벌에 있어서 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인자. 그리고 얼마 전에 루주 마을 마수 토벌을 자원했던 기묘한 이.
마을의 재건을 돕는 기사단들보다 먼저 루주 마을을 떠났다는 소식은 전보를 통해 들었건만, 보수도 원 치 않는다며 홀연히 떠난 이가 한 밤중에 공작가를 찾아온 이유를 예 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제발 열어요!"
'......미르는 남자 청년이 아니었 던가.'
테일러는 갈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찢어지고 갈라져 형체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처 절한 목소리이긴 했으나, 그의 귀 를 건드린 목소리는 분명 어린 소 녀의 것이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짐작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쯤.
두드리는 소리가 뚝 멈췄다.
'위험하다.'
테일러는 우그러진 문을 보며 심
호흡을 했다. 오랫동안 카이사르를 지켜보며 소드 마스터의 무력에 익 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웅장한 철 문이 몇 번의 두드림으로 안쪽까지 걸레짝 모양이 된 것을 보고 있자 면 압도적인 무력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온몸을 잠식했다.
"빌어먹을! 다 물러세"
그리고 울려 퍼지는 경고.
쉬익!
돌풍 소리와 함께 문 틈새로 검은 연기가 새어 들어왔다.
"으악!"
안개 같던 검은 연기가 빠르게 뭉 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소용돌이 가 되어 미친 듯이 회전하며 문 주 위에 선 사용인 일대와 기사들을 거칠게 물렸다. 테일러의 몸 또한 검은 바람에 의해 문 멀리로 밀쳐 졌다.
거대한 공작가 저택의 문이 검게 물들었다.
쾅
커다란 폭발음이 일대를 울린다. 눈 깜짝할 사이 저택을 굳게 지키 던 강철 문이 바람에 날리는 가루 가 되었다.
뚫린 공간으로 세찬 겨울바람과 굵은 눈송이들이 쳐들어왔다.
"으 "
" 아아••••••
범인은 이해 못 할 경이로운 무위 를 두 눈으로 목격한 이들이 비명 조차 지르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카이사르의 막강한 오러에 익숙했 던 테일러조차 난폭한 오러에 할
말을 잃었다.
뚜벅, 뚜벅, 탁.
통제되지 않는 검은 난폭함의 주 인이 새하얀 세상을 등지고 저택으 로 발을 들였다.
겨울 밤바람에 휩싸여 거칠게 휘 날리는 칠흑 같은 긴 머리카락. 비 쩍 말라 작은 덩치. 추운 날씨임에 도 식은땀으로 젖어 덜덜 떨리는 몸. 오러에 휩싸인 검을 꽉 쥔 작 은 손. 저만큼이나 작은 소녀를 안 아 든 가느다란 팔.
온갖 어두운 것들로 범벅되어 나 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중인 죽은 진분홍색 눈동자.
가는 두 다리가 비틀거리며 저택 중앙 홀로 들어선다. 그 누구도 감 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새하얗게 질려 바들바들 떨리는 카 슈미르의 입술이 열렸다.
"......제발, 당신들의 주인과 만나 게 해주십시오."
벼랑 끝에 몰린 처절한 목소리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