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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8화 (28/254)

28 화

커다란 눈으로 날 응시하는 테일 러. 미친 듯이 웅성거리는 사용인 들. 내게 검을 겨누어야 하는지 말 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기사 들. 그들의 눈에 혼란이 가득했으 나 그런 걸 신경 쓸 여력 따윈 없 었다.

"세 번은 말하지 않는다. 나를 내 아버지 앞으로 안내해."

고저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하

며 꽉 쥐고 있던 검에 폭발적인 오 러를 불어 넣었다. 일도에 산을 가 르는 소드 마스터의 오러가 검을 감싸고 날뛴다. 사람들이 다시금 뒷걸음질 쳤다.

"막아서는 자는."

시야가 붉게 물든다. 아마도 카이 사르와, 칼과 똑같은 핏빛으로.

"모두 벨 것이다."

살기로 오염된 핏빛 눈동자와 정 면으로 마주한 테일러의 눈동자가 공포에 사로잡혔다.

"물러서라, 테일러."

그리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

소리가 난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 다.

' 아.'

일렁이는 핏빛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온몸이 굳었다.

뚜벅뚜벅.

침묵이 가라앉은 홀에 구두 소리 만이 크게 울려 퍼진다. 잠자리에 서 방금 나온 듯 흐트러진 샤워 가 운 차림의 남자가 느긋이 계단을 내려왔다.

검은 구두가 내 앞에 멈춰 섰다.

'멸망을 고하는 검을 쥐고 암흑을 담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소름 끼 치게 무감각한 핏빛 눈동자로 전장 을 응시하는 학살자.'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

는 차가운 인상. 일대를 압도하는 능숙한 아우라.

카이사르 칼라 드 케니스 크리시 스. 내 아버지였다.

"흠."

권태로운 숨을 내뱉은 카이사르가 일순 살기를 내뿜었다.

이미 홀에 자욱하게 퍼진 검은 살 기 사이로 붉은 연기가 덮쳤다. 자 신의 구역에 영역 표시를 하듯 진 득하게 퍼져 오는 핏빛 살기에 순 간 숨을 멈췄다.

'역시 대륙 최강자를 다투는 크리 시스 공작인가.'

내 살기는 모든 걸 집어삼킬 듯 탐식하며 날뛰는 것 같다면, 카이 사르의 살기는 훨씬 절제되고 성숙 했다.

' 위험하다.'

본능이 날뛰며 나도 모르게 살기 를 더욱 강하게 풀었다.

"흐윽......

두 소드 마스터가 작정하고 내뿜 는 살기에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몇몇 이들은 눈 을 뒤집고 쓰러졌다. 나는 흠칫했 다.

여기서 시체를 치울 순 없다. 이 를 악물고 살기를 거두었다. 싸우 려고 온 것이 아니라는 의지를 표 명하기 위해 쥐고 있던 검도 놓았 다.

" 재밌군."

나와 아리아를 지그시 응시하던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피어났

다.

"용병 미르."

이미 가까운 거리임에도 성큼 더 거리를 좁혀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검지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네가 내 딸이라고?"

마주친 붉은 눈동자에 흥미가 넘 실거리고 있었다.

그 물음에 숨이 턱 막혔다. 지그 시 눈을 감고 위태로운 몸과 마음 을 정돈했다. 여기서 무너져선 안

됐다.

" 네."

다시 뜬 눈엔 혼들림이 없도록. 오직, 확신만 담기도록. 물러섬 없 이 그와 마주한 채 단호하게 수긍 했다. 카이사르가 느리게 눈을 깜 빡■였다.

핏빛 붉은 눈동자가 찬찬히 나를 살폈다.

느긋하지만 날카로운 눈빛• 산 채 로 해부당하는 느낌에 그에게서 벗 어나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

다.

"닮았군. 나와도...... 그 여자와 도."

관찰을 마친 그가 턱을 들어 올린 손을 내렸다. 참았던 숨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그 여자'라는 단어에 담긴 미묘한 감정에 순간 미간을 좁혔으나, 공작이 창기에게서 느낄 감정이 뭐가 있을까 싶어 생각을 지워 냈다.

"넌 며칠 전에도 공작가를 찾아왔 었지. 용병으로서."

그의 목소리는 딱 0도에 맞춰진 것 같았다. 따뜻함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으나 얼 정도로 차갑지도 않다. 앞에 둔 것이 무기질이라도 되는 듯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 다.

카이사르의 붉은 눈동자가 지그시 날 내려다보았다.

"그땐 분명 아무 말 없더니 이제 야 다시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이 유가 뭐지?"

무심한 말투에 가슴이 철렁했다. 아리아를 다시금 고쳐 안음으로써

혼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리아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

"전 공작님의 딸입니다. 혼외 자 식이지만 확실히 공작님의 피를 이 었습니다."

"그건 안다. 널 찾기도 했으니 까."

'......날 찾았다고?'

휙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카이사르가 어떤 경위로 내 아버지 가 된 건지는 원작에서도 설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의문을 품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넘실거리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쓸 데없는 감상에 휘말릴 때가 아니었 다.

"하지만 제가 공작님의 혈육이라 는 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

카이사르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 만'이 왜 나오냐는 표정이었다. 내 의중을 읽으려는 듯 느리게 구르는 눈동자가 스산했다.

털썩.

M | n

나는 다만 그 앞에서 모든 자존심 을 꺾고 무릎을 꿇을 뿐이었다.

"......무슨 뜻이지?"

인상을 왈칵 찌푸린 카이사르가 의중을 물었다. 떨리는 숨을 삼키 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부탁드립니다. 제 동생을 살려 주세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었건만 뱉어진 목소리는 처절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와 아리아를 번갈아 본 카이사르가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 다. 목덜미가 서늘하도록 권태로운 태도였다.

"네 무릎 위의 그 아이가 네 동생 인가?"

" 네."

"그 아이는 내 딸이 아닐 텐데."

"......네. 이 아인 제 동복동생입 니다."

"그럼."

카이사르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 다.

"내 핏줄도 아닌 것을 내가 왜 살 려 줘야 하지."

동정심 한 점조차 담기지 않은 목 소리는 차갑다기보단 아예 온도가 없는 것 같았다. 아리아에게로 닿 는 카이사르의 눈빛이 무기질을 보 는 듯 무감각했다.

'어째서 아리아를 살려야 하느냐 고.'

나는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생

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허나 없었다. 카이사르에겐 아리 아를 살려야 하는 이유도, 책임도 없었다.

'핏줄인 나한테도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이 사람이 과연 아리아에게 자비를 베풀까.'

내가 내리는 대답은 '그럴 리 없 다'였다. 피에 미친 악마라는 공작 이 아리아를 살려 줄 리 없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그걸 잘 알고 있음에 도, 카슈미르의 목숨과 미르로서의 정체까지 모두 다 내놓고 이곳에 온 이유는.

"당신의 딸인 내가...... 이 아이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리아를, 너무 사랑해서.

무거운 침묵이 맴돈다. 카이사르 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숨을 참 으며 고개를 숙였다. 눈꺼풀 아래 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대리석 바닥 을 적셨다.

'이렇게까지 사랑할 생각은 없었 는데.'

탄생부터 험준한 나날이 예고된 인생. 겨우 걸음마를 뗐을 무렵, 탄 생한 아이를 좁은 방 문 틈새로 몰 래 훔쳐봤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 다.

'어, 니! 같이 가!'

순수와 동경은 버린 지 오래이던 어린 시절, 작은 덩치로 커다란 세 상과 부딪쳐야 했던 내게 아리아의 탄생은 짐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

도 힘든데 먹여야 할 입이 하나 더 늘어난 것에 불과했다.

'너무 수고했어. 물부터 마셔!'

'언니! 이거 봐, 꽃이 피었어!'

'으응, 난 언니가 제일 좋은걸.'

'항상 미안해. 늘 고마워.'

그랬던 아리아가 소중해진 이유라 면, 내 무채색인 세상에 유일한 색 깔이었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뒷골목을 누비고 지쳐 돌아온 내 게 수고했다 말해 주는 이는 아리 아가 유일했다. 계절의 지나감도 보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사는 내

게 계절의 변화를 알려 주고, 시궁 쥐 같은 내가 좋다고 말해 주며, 슬픈 눈으로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 해 주는 것도 아리아가 유일했다.

'이렇게까지 사랑하고 싶진 않았 는데.'

그 작던 아이는, 어느새 자라 내 세상이 되어 버렸다.

치밀어 오르는 비참함에 고개를 떨궜다. 깨끗한 대리석 바닥 위로 처참하게 망가진 내 모습이 비쳤 다.

그 모습이 때 묻은 시궁쥐 같아 서. 사랑하는 것 하나 지키지 못하 는 무력한 인간 같아서.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흐르는 눈물로 대리석 위의 내 모습을 닦아 버렸다.

"하지만 이건 공작님께 이유가 되 지 못할 것을 압니다."

카이사르의 딸이라는 패는 그저 허울 좋은 미끼일 뿐이다. 내가 사 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카이사르 가 살려 줘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리아나 나나 완벽한 불청객일 뿐일 테니까.

"공작님께 핏줄로서 자비를 구걸 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를 악물어 눈물을 삼키며 카이 사르를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번져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 쁜 숨을 애써 고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다만, 허락하신다면 공작님 께 거래를 제안할까 합니다."

"••••••거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그 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간을 찌푸릴 뿐, 시답잖은 소리 라며 바로 내치진 않았음에 안심하 며 조금 전 떨어트렸던 검을 집어 들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 별 볼 일 없는 역겨운 인간으로 태어나 할 줄 아는 유일한 특기. 내 일생을 바친 유일한 쓸모.

치칫-

한계 앞에서 마주했던 나의 어둠. 늪 속에 발버둥 치던 순간들을 담 은 암흑. 빛내기 위해 사그라져야 했던 나의 절망.

내가 들여다보았던 심연을 담은 어두운 오러가 검을 둘러쌌다.

내가 출력할 수 있는 최대의 오러 를 감당하게 된 검이 미친 듯이 진 동했다. 쩌적, 살벌한 소리와 함께 칼날에 금이 갔다.

"제 동생만 살려 주신다면, 공작 가의 충직한 검이 되겠습니다."

검 끝을 바닥에 박은 채, 신을 앞 에 둔 인간처럼 굴복하듯 고개를

숙였다.

홀 일대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를 내려다보는 카이사르의 시선 이 무슨 감정을 담고 있을지 쉬이 예상할 수 없었다.

"으, 콜록!"

내 품에서 몸을 뒤척인 아리아가 다시금 피를 토했다.

' 제발.'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었다. 어느 정도 진정된 몸이 다시금 떨

려 오기 시작했다. 정면을 보고 있 는 아리아의 고개를 돌려 피가 기 도로 넘어가지 않게 했다.

"콜록! 큽, 콜록!"

"공작님, 제발......!"

발작적으로 피를 토해 내는 아리 아에 새하얗게 질려 카이사르 앞으 로 기어가 처절하게 그에게 매달렸 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것밖에 없었다.

"전 소드 마스터입니다! 평생 검 을 잡았습니다! 받아 두시면 유용 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유용하게 사용을 해?"

들은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카 이사르의 되물음이 돌아왔다. 사용 인들의 웅성거림이 잇달았다.

'통한 건가!'

그가 솔깃했다는 생각에 미친 듯 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마수에게 짓밟히며 검을 배웠습니다! 실전에 능하고 마수 토벌엔 정말 자신 있습니다! 명하 신다면 고기 방패로 전장에 나갈 수도 있습니다!"

"고기 방패•• ...

카이사르의 목소리가 차갑게 굳어 갔으나, 제정신이 아닌 난 느끼지 못했다.

검 한 자루만 준다면 전장에 고기 방패로서 혼자 출전하라고 해도 살 아남을 자신은 있었다. 반쯤 죽어 되돌아올지도 모르나, 아리아를 위 해서라면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었 다.

내 필사적인 간원에도 카이사르는 이렇다 할 확실한 대답이 없었다. 낭떠러지에 몰린 나는 그의 신발을

붙잡고 매달렸다.

"공작님 제발...... 정말 유용해질 수 있습니다. 아리아만, 아리아만 살려 주신다면 영원히 크리시스 공 작가의 충직한 검이 되겠습니다. 주제넘게 크리시스의 이름을 이어 받겠다는 망상은 하지 않습니다! 크리시스만의 개가 되어 기라 하시 면 기겠고, 죽으라 하시면 죽겠으 니......•"

다시금 눈물이 차오른다. 희미해 진 시야 사이로 크리시스 공작과 사용인들의 신발이 보였다.

수많은 이들 앞에서 무릎 꿇은 내 모습이 깨끗한 대리석 위에 비쳤 다.

'죽고 싶다.'

비참하고 처량했다. 허나 아리아 를 위해서라면 별 볼 일 없고 저렴 한 내 무릎 따위 수천, 수만 번이 라도 더 꿇을 수 있었다.

물기로 아롱진 눈을 들어 카이사 르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카이사르 크리시스 공작.

나의, 아버지.

"제발...... 아리아를 살려 주세 요......

마구 갈라지는 목소리가 처절했 다.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여전히 대 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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